길을 잃었더니, 새 길이 열렸다
-원창묵 선생을 만나다
길을 잃었다. 이래서 초행길은 조심해야 하는 법이다. 불성사 표지판에 분명히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관양동 방면이라 써 있었다. 길을 내려오다 보니 계곡이 있었는데, 거기서 길이 어디로 이어진지 알 수 없었다.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봄볓에 달구어진 바위에 걸터앉아 한숨 돌렸다. 같은 방향으로 하산하는 분이 길을 찾아 내려가는 것을 보고 뒤쫓았다. 내려오는 길에서 보는 풍광이 좋았다. 흙길이 나와 걷기도 좋았다. 한참을 즐거운 마음으로 걷는데, 표지판에 서울대 관악 수목원 방향이라 나왔다. 이런, 길을 잃었거나 잘못든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계속 걷기로 했다. 길이 좋았다. 나무는 높았고, 풀은 우거졌다. 그러다 내려가는 길이라 여겨 샛길로 들어섰던 건데, 정면에 경고판이 서있었다. 군부대가 있는 곳이란다.
내려오던 길에 큰 길을 본 기억이 났다. 흙길이었지만, 자동차가 다닐만했다. 거기를 찾아가보기로 했다. 가다보니 저수지가 나왔고, 철조망 친 부분으로 갔더니 생각지도 않은 길이 나왔다. 아까 보았던 큰 길로 이어지는 좁은 길이었다. 그 길로 걸어올라갔더니, 서울대 관악 수목원 후문이 나왔다. 다행히 문이 열려 있었다.
산에 오르면서 길을 잃은 적이 별로 없다. 가능하면 그 길을 먼저 타보았던 사람과 함께 한 덕이다. 이번에 같이 등반한 이는 원창묵씨로, 초등학교 교사다. 사는 곳이 인덕원인지라, 함께 서울대 입구에서 시작해 관악산 연주대에 올랐다가 인덕원 방향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그렇지만 원 선생도 이 길을 타보지는 않은지라 표지판이랑 지도 보며 걸었다. 능선 타는 일은 어렵지 않았는데, 관양동으로 내려가는 길을 찾기가 쉽지 않다. 마침 올라오던 분이 있어 하산지점을 잡았던 것인데, 예상과는 다른 길로 내려왔다.
서울대 관악 수목원을 지나니 안양예술공원이 나왔더랬다. 내려와서 지도를 찾아보니 불성사까지는 잘 내려왔다. 그런데 불성사 계곡에서 오른쪽 길로 가야 관양동이 나오는 법인데, 우리는 왼쪽길을 탔다. 계곡에서 길이 끊겼을 때 먼저 가던 분을 따른 것이 원인이었다. 그런데 어쩌랴? 길을 잃어 전혀 다른 길을 걸으며 즐거웠으니! 수목원에 이르는 길은 '악'자 들어간 산답지 않게 부드러운 속살을 드러냈다. 수목원도 고즈넉하니 걷기에 좋았다. 그저 바라건대 우리네 인생도 이랬으면 할 뿐이다. 길을 잃어 더 좋은 길을 만나길 말이다.
원선생은 서울교대를 졸업하고 단번에 임용고시에 합격해 일년정도 교사생활을 했다. 그러다 학사장교로 복무하고 복직해 지금 삼년째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다. 잘 알겠지만, 이런 이력을 기록하기 쉽지 않다. 교대는 여초(女超) 현상을 완화하기 위해 남학생한테 역차별 혜택을 준다. 일정비율로 남학생을 뽑는다는 말이다. 옛날같으면 이런 조치가 의미 있을 터였다. 교대 졸업하면 초등교사가 되었으니까. 그런데 임용고시가 생기면서는 별 의미가 없다. 초등교사의 경우 대체로 3대 1의 경쟁율을 뚫어야 하는데, 여기서 역차별로 입학한 남학생들이 낙방의 고배를 마시기 일쑤다. 남자가 임용고시 통과했다면, 들어갈 때부터 꽤 공부잘했구나, 라고 보면 틑림없다.
돌아온 대답이 의외였다. 고등학교 1학년까지는 별로 특별할 게 없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1학년때 과천으로 옮긴 다음, 줄곧 이곳에서 자랐다. 본디 고등학교는 시험보고 들어가는 비평준화 지역이었는데 원선생부터 이른바 뺑뺑이로 바뀌었다. 비평준화일 적에는 명문소리 듣던 학교로 진학했다. 성적 좋은 학생들이라 동아리 활동도 활발히 하면서 입시성적도 잘 거두었다고 한다. 여름에는 교복이 없었다고 한다. 학생들의 자율성을 믿었던 학교였다. 그런데 평준화 지역이 되면서 학교가 정책을 바꾸었다. 하복도 생기고, 동아리 활동도 축소하고, 야간자율학습도 했다. 자율성보다는 강제성으로 입시성과를 높이려는 정책을 폈던 셈이다. 그런데도 원 선생은 이렇다할 성적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키도 작은 편이고 조용한 편이라 더욱이 눈에 안 띄었을 성싶다.
고2때 반전이 일어났다. 하고싶은 일이 무엇인지 모르고 공부만 하려니 재미있을리 없다. 그러다 우연히 어머니랑 이야기를 나누다 턱없는 소리를 들었다. 초등교사를 해보면 어떻겠냐는 말을 하셨던 것이다. 당시 성적으로는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라도 들어가면 감지덕지할 형편이었다. 그런데 슬며서 초등학교 교사가 되고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아이들이랑 치고박고 사는 것도 괜찮을 듯하고, 방학때 하고싶은 공부하는 것도 좋을 듯했다. 그래서 목표를 정했다. 교대에 가자, 라고. 방향을 정하니 공부가 잘 되었다. 모의고사 성적도 올랐다. 그것도 쑥쑥. 비결이 무어냐고 물었더니, 자기도 모르겠단다. 그래서 공부가 제일 쉬웠다는 말이냐며 놀렸다. 정말 모른단다. 목표가 정해지니 다음 일이 잘 풀렸다. 마음을 다잡고 공부했고 그 과정에서 성적이 올랐을 뿐이다. 고2때 모의고사 성적과 나중에 수능에서 거둔 점수를 비교하니 무려 100점이 올랐더란다. 허, 이 양반, 공부의 신인가?
나는 신혼살림을 신림동에 차렸더랬다. 3년 남짓 이곳에서 살았는데, 안 사람이 선물로 받은 구두 티겟으로 등산화를 사주는 바람에 관악산에 자주 올랐다. 마침 연주암에서 점심을 공짜로 준다고 해 더 열심히 탔다. 곧바로 천원받고 비빔밥을 주었지만, 물통만 들고 가면 되는지라 자주 올랐다. 서울대 정문 옆으로 난 길로 올라가면 초입은 순탄하다. 이번에 가보니 잘 정비해놓아 초입에서 얼쩡거리며 놀다가도 되겠다싶었다. 어느 산이나 만만한 데는 없다. 관악산도 중간부터는 오르막길이라 쉽지는 않다. 거기다 계단을 많이 설치해 힘이 더 든다. 계단 오를 적마다 느끼는 거지만, 보폭을 강제당하면 힘이 든다. 내 보폭에 따라 걸어가야 덜 힘든다. 산 정비한다며 마구 계단 설치할 일이 아니다. 잡고 올라갈 시설을 마련해주는게 더 나을 성싶다. 원선생도 어릴 적 신림동에 살았다. 그래서 이 동네에 추억이 많다. 지금도 혼자 산에 오르면 관악산을 즐겨 찾는다. 과천쪽에서 올라오는 관악산은 상대적으로 완만한지라 힘이 덜 들기도 한다. 그래서 관악산 함께 오르기로 했다. 두 사람의 교집합인 신림동을 기점으로.
청년들이 많이 올라왔다. 등산화를 신고 있어 놀랐다. 내가 관악산 즐겨 찾을 적에는 남자는 운동화 신고 여자는 하이힐 신고 오는 경우도 자주 봤다. 아마도 서울대생과 데이트하러 왔다가 산에 올랐으리라. 등산제품이 상당히 널리 소비된다는 사실을 확인한 셈이다. 사당역쪽에서 오는 길도 있는지라 연주대는 붐볐다. 막걸리 파는 곳도 있었는데, 없어졌다. 신림동을 떠나고 나서 오랫동안 관악산을 오지 않은지라 풍경이 많이 바뀌었다. 정말이지 높은 산만 즐거움을 주는 게 아니다. 어느 산이나 나름의 즐거움을 준다. 오랫만에 연주암으로 갔는데, '하드'를 팔고 있지 않은가. 막걸리를 대신해 목을 축였다, 능선 길을 타니 풍광이 훨씬 좋았다. 산을 처음 타는 이들은 꼭대기에 오르기만 하려 한다. 하지만 등산의 묘미는 능선타기에 있다. 사람도 별로 없고하니 이런저런 이야기하며 걷기에도 좋았다. 사당역에서 출발해 안양까지 가는 능선을 타면 관악산도 꽤 품이 넓다는 느낌이 들 법했다.
다시, 질문공세를 펼쳤다. 어떻게 성적을 그리 높일 수 있냐고. 곤혹스러워 하면서 한 말에 중요한 게 몇개 있었다. 먼저 고2부터 언어영역과 사회탐구영역은 별도로 공부 안해도 거의 만점을 맞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어릴 적부터 책을 많이 읽은 덕이었다. 원 선생은 자신의 장점으로, 잘 팔린 책 제목에 빗대어 말하면,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을 탐닉하는 점을 꼽았다.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어젖힌 덕을 고등학교 때 봤다니, 다행이라면 다행일 터다. 문제는 영어하고 수학이었는데, 수학만 학원 다녔다고 한다. 언어하고 사탐 공부 시간을 줄인만큼 두 과목에 집중하니 자연스럽게 성적이 올랐다. 믿기지는 않겠지만, 그래서 부모된 자라면 의당 아이들 책 읽는 버릇 들 게 애써야 하는 법이다. 그러면 100점 상승의 기적을 목격할 터!
막상 들어가서 적성이 맞지 않았다면 다른 길을 갔을 테다. 실제로 동기 가운데 임용되었다가 사표내고 고시 준비하는 이들도 있다. 도저히 아이들하고 어울릴 수 없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얼마전 여학생들이 교사 하기를 원하는 비중이 상당히 높다는 통계가 나온 적이 있다. 아무래도 직업의 안정성 때문에 그럴텐데, 다른 무엇보다 적성이 맞아야 한다는 점을 알도록 해야겠다. 원 선생은 교대가 적성에 맞았다. 다양한 과목을 공부하는 것도 좋았고 예체능을 배우는 것도 좋았다. 천상 초등학교 교사할 사람이었다. 특별히 교육철학이 좋았다고 한다. 졸업하고도 줄곧 철학책 읽게 된 힘이기도 했다.
선행학습이 판치는 초등학교에서 교사로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회의적인 시선으로 물었는데 답변은 의외로 단순했다. 원 선생이 있는 학교는 낙후한 지역에 자리잡고 있어 교사로서 할 일이 많다고 한다. 내 아이를 앞서게 하겠다는 과욕, 돈 있으면 다해낼 수 있다는 오만, 공교육보다 사교육 담당자를 더 우수하게 여기는 편견이 없다면, 의당 학교는 건강하게 운영될 수 있다는 한 사례인듯하다. 듣다보면, 원선생은 아이들 '밥'이 되는 적도 잦은 모양이다. 요즘 아이들 덩치도 크고 생각하는 바도 조숙하니 그럴만 하겠다. 당연히 남자 교사가 적은지라 여러모로 관심대상이 되고 있다고 한다. 아직 총각인지라 연애 이야기 해달라고 철없이 조르니 들려준 이야기가 재미있다. 교감 선생님이 여자분이신데, 대학 선배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학교에서 연애하면 소문 나니 각별히 조심하라고 하나마나한 도움말을 주었다. 물론, 부장 선생한테는 원 선생 연애하게 도와주라는 엄명도 내렸다. 근데, 이 부장 선생님 좀 엉뚱하시다. 젊은 교사들이랑 모여 수다 떨고 뒷담화 나누는 걸 좋아하신단다. 누구랑 연결해주기 보다 그냥 즐겁게 지내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여교사들이 선호하는 직업이 있다고 한다. 교사보다는 번듯한 직장 다니는 남성에 우선적인 관심을 보인다고, 눈치를 보니 원선생은 동료교사와 인연을 맺었으면 하는 듯하다. 내가 보기에 서두를 필요는 없을 성싶다. 남교사가 턱없이 부족한 현장을 감안하면, 시간이 해결해 주리라. 나는 그저 원 선생의 '봄날'을 부러워 할 따름이다.
원선생은 가족사의 아픔이 있다. 가정 형편도 넉넉치 않다. 그런데도 잘 감수하고 있고, 낙천적으로 살아간다. 음악에도 관심 많다. 얼핏 보면 수더분한 면이 있는데, 알고보면 세련된 도시남자다. 홍대쪽에서 강의도 듣고 인디밴드 음악도 감상한다. 그는 여전히 넓고 얕은 지식을 추구하고 있다, 그것이 아이들을 좋아하는 것과 함께 초등교사의 미덕이라며 너스레를 떤다.
올해 아일랜드 여행을 준비했다더니 연수가 있어 어려운 모양이다. 입시준비하면서 읽은 지문에 아일랜드와 우리의 정서적 일치를 말한 내용이 있었다. 그때부터 돈 모으면 아일랜드를 가보고 싶었다고 한다. 더욱이 대학에 들어와 좋아하게 된 뮤지션 가운데 아일랜드 출신이 많았고 결정적으로는 영화 원스를 보고는 더욱이 아일랜드를 가보고싶었다. 그래서 월급 받게 되었을 때 작심하고 돈 모아 이미 한번 다녀왔다. 그가 말해주는 아일랜드의 아름다움은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펍에서 기네스 마신 이야기만 들어왔다. 하산해서 우리가 마신 술은, 그러나 막걸리였다. 아쉽지는 않았다. 그들에게 기네스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장수막걸리가 있는 거니까.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일은 힘겹게 마련이다. 그들에게 끼칠 영향이 큰 만큼, 부담도 크다. 그러니 늘 길을 찾을 수 밖에 없다. 더 좋은 길, 더 올바른 길, 더 빠른 길을 말이다. 그러나 두려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길을 찾지 못한다 하더라도. 오늘 우리가 산에세 배우지 않았던가. 길을 잃어 다른 길을 걸으니 또 다른 풍경을 만나게 되더라는. 가르치는 일도 마찬가지리다. 중요한 것은, 그래서 늘 길을 걷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다보면 또 다른 길이 나를 인도할 터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