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오현 스님
꽃이 활짝 핀 건 알아챘지만 내 자신은 온종일 숨 쉬면서도 쉬는 줄 모르고, 쉼 없는 맥박도 뛰는 줄 모른다. 무뎌지고 무뎌져 제 생명의 생동을 느끼지 못할 때가 많다. 볕 좋은 봄날 창가에 앉아 조오현(83) 스님의 시조들을 읊조리며 든 생각이다.
‘울지 못하는 나무 울지 못하는 새/ 앉아 있는 그림 한장// 아니면/ 얼어붙던 밤섬// 그것도 아니라 하면 울음큰새 그 재채기’(서울의 밤)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지고, 마침내 내 깊은 아우성도 들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저절로 터져나오는 재채기만이 생명의 유일한 증거가 되는가.
‘우리 절 상머슴은/ 논두렁을 하다가는// 시님요 시님요 사람들은/ 지 몸에서 도랑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카는데요/ 목마름은 끝없니더// 삶이란 얼레미 논바닥/ 엉그름을 누가 다 막고 살겠능교’(엉그름)
물속에서 목마름을 호소하는 인간군상의 놀음을 전하는 사투리가 히말라야의 크레바스처럼 입을 벌린 내 엉그름 속에 단비로 스민다.
엉그름이 패인 논바닥. 사진 김정효 기자
잡을 수 없는 마음을 이토록 선명하게 낚아채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다. 전광석화 같은 시조 한 수는 두려움 속에 꼭꼭 숨겨 곰팡이 슨 마음 창고를 부순다. 그러니 구두선이 아닌 활구다.
설악산 신흥사 조실인 설악무산 스님이 겨울 3개월간 감옥 아닌 감옥인 무문관에 스스로를 가뒀다가 나오자마자 미국 캘리포니아대 한국학센터에 초청받아 갔다. 그는 그 자리에서 “한국인은 미국에 건너올 때 김치만 가져왔는지 시조를 알리지 못했는데 일본인들은 미국에 하이쿠를 알려 미국 교과서에까지 수록됐다”며 “시조는 흘러간 유행가가 아니라, 한국인의 맥박”이라고 했다. 이어 “우리는 콜럼버스가 미국을 발견하기 전부터 풍류를 즐긴 민족”이라며 황진이의 시조들을 낭독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는 또 북한 핵 폐기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미국에선 서부 개척시대부터 총잡이들도 총을 동시에 꺼내고 내려놓는 게 정도 아니냐”며 “미국은 기독교 정신으로 나라를 세웠으니 핵과 살상 무기를 포기하는 모범을 보여 그 막대한 돈으로 복음 사업에 사용하라”고 권했다.
절 집안에서만 유통되던 선시와 고루하게 취급되던 시조를 들고, 그가 2009년 하버드대에 이어 이번에 캘리포니아대에서 원조 한류를 선보였다. 최근 ‘조오현 선시 연구’라는 김민서 박사학위 논문에 이어 권성훈 시인의 조오현 시조평 모음인 <이렇게 잃었다. 설악 무산 조오현 한글 선시>(반디 펴냄)란 책이 나왔다. 하룻밤 풋사랑과 이별과는 다른 인생사 풍파의 시린 가락을 이제라도 눈여겨보는 것인가.
‘한 그루 늙은 나무도 고목소리 들을라면/ 속은 으레껏 썩고 곧은 가지들은 다 부러져야/ 그 물론 굽은 등걸에 장독(杖毒)들도 남아 있어야’(고목소리). ‘사랑도 사랑 나름이지/ 정녕 사랑을 한다면// 연연한 여울목에/ 돌다리 하나는 놓아야// 그 물론 만나는 거리도/ 이승 저승쯤 되어야’ 이런 아픔, 이런 사랑에 돌부처가 아닌 다음에야 어찌 맥박이 다시 뛰지 않으리. 저 마음 아래에서 네박자 흥이 돋는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