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논어 명장면] <8> 사랑과 존경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미약빈이락 부이호례자야)
-<논어> ‘학이’편 15장
가난하면서도 즐겁게 살고, 부유하면서도 예의를 좋아한다면 멋진 사람이 아닌가.
1. 자공의 재발견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기 전에 이른바 ‘진채지액’에서 있었던 사건을 한 가지 더 소개하겠다. 두 제자에 관한 짧은 일화이다.
앞에서 나는 공자 일행이 기아(飢餓)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자공의 수완 덕분이라고 말했다. 자공은 이때 “군자는 원래 궁한 사람이다”라는 공자의 말에 얼굴색이 바뀔 정도로 실망했다.(<사기> 공자세가) 그러나 자공은 대단히 영민한 사람이다. 그는 그 의혹의 순간에 오히려 시공을 초월하는 공자 사상의 불멸성을 직감했다. “하나의 도로 모두를 꿰뚫을 뿐이다”(‘위령공’편 2장)는 공자의 단호한 일성을 들을 때, 마치 진리의 한 끝을 본 듯 빛나던 자공의 두 눈을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자로가 기쁨에 겨워 춤을 추고, 안연이 소년처럼 스승의 품으로 달려가는 동안, 의혹의 미로에서 빠져나온 자공의 뇌리에는 무슨 생각이 피어나고 있었을까? 언제나 웃는 얼굴로 짐꾼들을 독려하던 자공을 볼 때마다 나는 종종 그런 상상의 진리화(眞理花)를 머릿속에 그려보곤 했다.
공자 일행이 명아주풀로 죽을 쑤어 먹으며 버티고 있을 때 자공이 어디선가 홀연히 식량을 구해왔는데, 그가 어떻게 쌀을 구했는지는 자세히 아는 사람이 없다. 나도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다.
“이하부(李荷夫·짐꾼인 나를 부르는 호칭), 그게 그리 궁금한가?”
“그럼요.”
그러자 자공은 씩 웃으며 이렇게 한마디하곤 그만이었다.
“성읍 문지기가 어수룩해 보이더군.”
자공이 지니고 있던 패물로 식량을 마련해온 것으로 알려진 이 사건①은 자공 자신에게도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본래 위나라 사람으로 뒤늦게 공문(孔門)에 들어온 자공은 노나라 출신 선후배들과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사이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공자 역시 자공이 출중한 재능만큼이나 덕을 갖추고 있는지 궁금했다.
공자가 위나라에 머물 때 일이다. 자공은 공문에 들어와서 보니 자신의 재주와 학문이 다른 노나라 출신 제자에 비해 크게 뒤질 것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젊은 혈기의 자공은 여러 문도 앞에서 자랑 삼아 공자에게 말했다.
“저는 남이 나에게 하지 않았으면 하는 일은 저도 남에게 하지 않으려 합니다!(我不欲人之加諸我也 吾亦欲無加諸人)”
의기양양한 자공의 큰소리에 돌아온 공자의 답변은 냉정했다.
“사(賜)야, 그것은 아직 네가 실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공야장’편 11장②)
공자는 지나치게 자신만만한 자공이 스스로 깨달을 수 있게 일부러 차갑게 대꾸한 것이지만, 스승에게 자기 존재를 드러내고 싶던 자공이 이 말씀을 듣고 내심 얼마나 실망했을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을 것이다.
이처럼 공문의 ‘굴러 온 돌’ 자공이 모두가 가장 어려울 때 결정적 한 방을 터뜨리고도 자기 공을 내세우지 않자, 다른 제자들은 물론이고 공자도 자공의 인품을 ‘재발견’한 게 아닌가 싶다. 자공 역시 이 일로 나름 자신감을 많이 회복했던 것 같다. 그날 이후 공자와 자공은 다양한 주제로 서로 머리를 맞대고 문답하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이는 같은 외국인 출신에게 동병상련을 느낀 한 이방인 일꾼의 피상적인 관찰에 불과한 것일까?
2. 안연, 스승의 밥을 먼저 먹다
자공이 쌀을 구해오자, 안연은 밥 짓는 일을 자청했다. 자로가 불을 지피고 안연이 솥을 걸어 밥을 짓고 있는데, 잠시 다른 일을 하는 사이에 그만 아궁이의 티끌과 그을음이 솥 안으로 날아 떨어졌다. 이를 발견한 안연은 즉시 주걱으로 그 부분의 밥을 퍼내버리려다가 아까운 생각이 들었는지 자기가 그것을 먹어버렸다. 마침 개울에서 물을 길어오던 자공이 저만치서 안연이 솥에서 밥을 퍼내 먹는 장면을 목격했다.
‘아니, 안연이 밥을 몰래 먹다니!’
‘아무리 배가 고파도 그렇지 선생님이 아직 드시지 않았는데, 어떻게 제자가 먼저 밥에 손을 대는가?’
자공은 기분이 몹시 언짢은 나머지 평소 인정해마지 않던 안연의 인품마저 의심할 지경이 되었다.
안연은 공자의 유수한 제자 중에서도 인격과 학문 양면에서 으뜸으로 손꼽히고 있었다. 그런 안연을 공자는 아들처럼 사랑했다. 오죽하면 “등용되면 나아가 경륜을 펼치고, 물러나면 조용히 도를 지켜나갈 사람은 오직 나와 안회뿐이다”(用之則行 舍之則藏 惟我與爾有是夫·‘술이’편 10장③)라고 하셨으랴.
영민함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고 싶지 않은 자공이 부러움 반 질시 반의 눈으로 안연을 바라보는 것을 알았는지, 어느 날 공자가 자공에게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사야, 뭐 하나 물어보자. 너는 너와 회 중에 누가 더 낫다고 생각하느냐?”
스승이 듣고자 하는 답을 자공이 모를 리 없었다. 자공은 짐짓 정색하며 대답한다.
“아이고, 선생님. 제가 어찌 감히 안회를 넘보겠습니까? 안회가 하나를 들어 열을 깨우친다면, 저는 하나를 들어 겨우 둘을 아는 정도인데요(回也 聞一以知十 賜也 聞一以知二).”
공자가 자공의 대답을 듣고 웃으며 답한다.
“그래, 그렇지? 너는 회만 못하지. 그런데 사야, 회만 못하긴 나도 마찬가지란다. 하하하.”(‘공야장’편 8장④)
자공은 공자 앞에서 안연과 자신을 대등하게 비교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안연의 우위를 일방적으로 인정하기엔 솔직히 자존심이 조금 상했다. 그래서 스승에게 어리광을 부리듯 항변해보았다.
“선생님, 안회 정도 되니까 그렇지, 사실 하나를 들어 둘을 아는 것만 해도 어딥니까?”
“그래, 사야, 너도 쓸 만한 그릇이다.”
“어떤 그릇입니까?”
공자께서 자공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말씀하셨다.
“너는 호련(瑚璉)이다.”(‘공야장’편 3장⑤)
공자는 일찌기 군자는 그릇처럼 모양이 한정된 사람이어선 안된다고 가르쳤다. 군자란 덕과 학문으로 세상의 다양한 군상(群像)들과 현상을 품어안아 새롭게 거듭나도록 이끌어 주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호련은 왕실의 종묘 제사에 쓰이는 가장 보배롭고 중요한 그릇이었다. 공자는 자공을 호련에 비교함으로써 자공이 비록 군자불기(君子不器. ‘위정’편 12장⑥)의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거의 그 단계에 이르고 있음을 격려해 주신 것이다. 사야, 너는 이제 군자의 문턱에 와 있다. 조금만 더 정진하거라….
3. 믿음과 존경
공자의 애제자 안연이 스승의 밥에 먼저 손을 댔다는 사실은 충격 그 자체였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사실에 자공은 좌고우면을 거듭하다 결국 공자를 찾아가 에둘러 물었다.
“어진 사람과 청렴한 선비도 곤궁에 처하면 절개를 바꿉니까?”
“절개를 바꾸었다면 어찌 어질고 청렴하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럼, 안회라면 그 절개를 변치 않을 사람입니까?”
“물론이다.”
공자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자, 자공은 고민에 빠졌다. ‘아, 이야기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내가 본 바가 정녕 사실이라면 선생님이 받으실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닐텐데…. 그렇다고 이대로 덮어두는 것도 옳지 않다. 이건 안연 개인만의 일이 아니다. 우리 학단 전체의 신의가 걸린 중대사이다.’
자공은 결국 최대한 조심스럽게 공자에게 자신이 본 광경을 털어놓았다. 공자는 자공의 고백을 심각한 표정으로 듣고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
“내가 안회를 어질다고 믿어온 지가 이미 오래다. 설사 네가 정확하게 본 것이라 해도 나는 안회를 의심하지 않겠다. 혹 무슨 까닭이 있으리라.”
공자는 자공에게 자신의 지시가 있기 전까지는 다른 사람들에게 일절 발설하지 말도록 당부한 다음, 조용히 안회를 불러들였다.
“회야, 내가 어젯밤 꿈에 선인(先人)을 보았다. 이는 곤경에서 벗어날 것을 알리는 좋은 징조가 아니겠느냐? 선인에게 먼저 젯밥을 올려야겠으니 밥을 다 지었으면 이리로 가져오너라.”
그러자 안연이 사색이 되어 대답한다.
“선생님, 죄송하지만 그건 안 됩니다.”
“왜 안 된다는 것이냐?”
안연이 자세를 고쳐 앉아 머리를 조아리며 말한다.
“사실은 제가 그 밥에 손을 댔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
“제가 밥을 짓는데 그만 부주의하여 티끌과 그을음이 밥솥에 떨어지는 걸 막지 못했습니다. 그 밥을 그대로 두자니 깨끗하지 못하고, 버리자니 아까워 제가 그 부분을 떠먹었습니다. 이런 부정 탄 밥으로는 정결한 제사를 지낼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울상이 되어 곧 눈물을 쏟을 듯한 안연을 보며 공자가 말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구나. 알았다. 그런 상황이라면 나도 그 부분을 떠서 먹었을 것이다. 이왕 일이 그리 되었으니 선인의 밥은 따로 짓도록 하자구나.”
안연이 풀이 죽어 돌아간 뒤 공자가 자공을 비롯하여 다른 제자들을 불러 안연이 밥을 먼저 먹은 사연을 설명한 다음 말했다.
“오늘 같은 일이 있을 줄 알고 내가 그동안 안연을 믿어온 것이 아니다.”(이상 <공자가어> ‘재액’편⑦)
그리고 공자는 이렇게 덧붙였다.
“제자들아, 기록해두거라. 믿을 수 있는 것은 자기 눈이겠지만, 눈으로 본 것도 믿을 수 없을 때가 있다. 믿을 것이라곤 마음이겠지만, 사실 마음도 믿을 수 없을 때가 있는 법이다. 그래서 사람을 안다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란다.”(<여씨춘추> 제17권 ‘심분람’⑧)
이 일이 있은 뒤 자공을 비롯한 여러 제자들은 더욱 더 안연을 마음으로부터 인정하게 되었다. 스승의 무한한 사랑과 신뢰를 한 몸에 받은 애제자 안연 역시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 거의 신앙에 가까웠다. 언젠가 안연이 공자의 가르침에 감복한 나머지 동문들 앞에서 스승을 찬탄하는 말을 나도 감명 깊게 들은 적이 있다.
아! 우리 선생님은 우러러보면 볼수록 더욱 높고, 깊이 파고들면 들수록 더욱 단단하시다. 앞에 계신 듯하여 바라보면 어느새 뒤쪽에 와 계신다. 차근차근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고, 학문으로 지식을 넓혀주시며, 예(禮)로써 우리의 행동을 가다듬어주신다. 공부를 그만두려 해도 그만둘 수조차 없어, 가진 능력을 다해보건만 선생님이 서 계신 곳은 더욱 높아만 진다. 아, 아무리 따르려 해도 도저히 어쩔 수 없음이여!(‘자한’편 10장⑨)
4. 자공의 근심
자공은 워낙 명민하고 대인관계가 좋아서인지 유수한 제자들 가운데서도 금세 두각을 나타냈다. 안연이 죽은 후 공자의 학통은 증자(曾子)를 통해 후세에 전수되었지만, 훗날 문도들이 공자의 어록을 편찬해보니 스승과 가장 많이 문답한 제자가 자공이었다. 자공은 세속적으로도 크게 성공한 사람이다. 명성 높은 외교관이었을 뿐만 아니라, 치부에도 성공하여 공자의 70여 제자 중 가장 부유했다.(<사기> 화식열전⑩) 언젠가 공자가 제자들과 인물평을 하는 자리에서 이런 자공을 안연과 비교하며 평하신 적이 있다.
“회는 성현의 도에 가까이 간 사람이다. 그는 종종 쌀독이 비어도 늘 태연했다. 사는 천명을 따라 살기보다는 스스로 부유해지고자 하였다. 워낙 머리가 좋아서인지 그의 (돈 버는) 판단은 늘 들어맞았다.”(子曰 回也 其庶乎 屢空. 賜 不受命 而貨殖焉 億則屢中. ‘선진’편 18장⑪)
이런 자공에게도 근심이 있었으니, 우습게도 돈이었다. 돈을 벌고 증식하는 일은 도를 닦고 지키는 일과 상충되기 일쑤였다. 자공은 부와 명예가 쌓일수록, 나이를 먹어갈수록, 가난을 즐거워하던 안연이 그리워졌다. 위대한 스승마저 감탄하지 않았던가….
어질도다 회여! 한 소쿠리 밥과 한 쪽박의 물로 배를 채우며 빈민굴에서 산다면 보통 사람들은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거늘, 안회는 그 즐거움을 바꾸지 않으니, 어질구나 회여!(賢哉 回也 一簞食一瓢飮 在陋港 人不堪其憂 回也 不改其樂 賢哉 回也. ‘옹야’편 9장⑫)
그런 안연을 잃은 공자의 슬픔을 생각하면, 평생의 라이벌이던 자공조차 늘 가슴이 아련했다.
‘자식이 괜히 일찍 죽어가지고는….’
어느 날 자공이 노경의 스승을 모시고 차를 마시다 죽은 안연을 회상하며 말했다.
“안회는 가난하였지만 세상에 아첨하지 않았으니 참 훌륭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참으로 훌륭하지.”
“선생님, 저 사는 어떻습니까? 부유하지만 교만하지는 않으니 그만하면 괜찮지 않겠습니까?”
공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물론 괜찮고 말고. 그러나 사야 너는 잘 알지 않느냐? 가난하면서도 도를 즐기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 못하다는 것을.”
(子貢曰 貧而無諂 富而無驕 何如. 子曰 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이상 ‘학이’편 15장⑬)
자공의 마음을 읽었음이 틀림없는 말씀이었다. 자공이 자신을 교만하지 않은 부자 정도로 낮춰 표현했지만, 공자는 자공의 겸손을 알고 그의 후덕함을 평가해준 것이다.
그날 마침 두 사람 곁에서 차 심부름을 하던 나, 이생은 공자의 말씀을 들으며 웃는 듯 우는 듯하던 자공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제자의 안타까운 마음을 읽어준 스승의 자애에 자공이 얼마나 감격했을지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뭉클해진다. 자공이 부유하면서도 인색하지 않았고, 사람들을 예로써 대하고 덕으로 베푼 것이 넓고 많았던 것은 실로 스승의 제자에 대한 사랑과 믿음 덕분이 아니고 무엇이었으랴.
그 무렵 노나라에 널리 퍼진 미담 하나가 있었다. 노나라 조정에서는 전쟁포로나 노예로 다른 나라에 끌려간 사람을 되사오면 보상금을 지급했는데, 자공은 많은 돈을 들여 노나라 사람들을 귀국시키고도 일절 보상금을 받지 않았다.(<설원> ‘정리’편⑭)
누구나 인정했던 수제자 안연이 요절하자, 사람들은 자공이 공자의 후계자가 될 것이라 여겼다. 자공의 명성이 높아지자 심지어 공자보다 뛰어난 인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천박한 사람들은 돈 많은 자공에게 아첨하기 위해 공자를 깎아내리기까지 했다. 이런 아부꾼들을 자공은 이렇게 타일렀다.
궁궐 담장에 비유하면, 나 자공의 담은 어깨 정도의 높이여서 담 너머로 궁궐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지만, 선생님의 담은 여러 길의 높이라서 대궐 문을 통해 정식으로 들어가지 않고는 궁궐 안의 아름다운 종묘와 수많은 문무백관들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이처럼) 우리가 선생님에게 미칠 수 없는 것은 마치 사다리를 타고 하늘에 오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른 현인들이 열심히 노력하면 넘을 수 있는 언덕 수준이라면, 우리 선생님은 해와 달과 같아서 아무도 넘어갈 수 없다. 비록 사람들이 선생님을 헐뜯고 깎아내리려 한들 그것이 저 높은 해와 달에게 무슨 손상을 미치겠는가? 그저 자기 분수를 모르고 날뛰는 꼴만 더욱 드러낼 뿐이다.(‘자장’편 23~25장⑮ )
5. 하늘이 큰일을 맡기려 할 때는
공자 일행이 굶주림에서 벗어나 다시 행장을 꾸려 길을 떠날 때 자공이 수레 고삐를 잡았다. 스승을 더욱 가까이 모시고 싶은 자공의 뜻을 안 자로가 배려한 것이다. 자공이 수레를 몰고 광야를 다 건널 즈음에 이르러 공자께서도 수레에서 내려 자공과 함께 걸으셨다. 곧이어 안연이 따라와 세 사람이 담소하며 나란히 걷게 되었다. 나는 쇠똥받이 삼태기를 어깨에 메고 휘파람을 불며 그 뒤를 따랐다. 이때 자공이 지나온 광야를 돌아보며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말했다.
“선생님, 저는 저 황야에서 선생님과 함께 겪은 고난을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공자도 멈춰 서서 감회 어린 표정으로 들판을 바라보며 말했다.
“훌륭하구나, 고난을 잊지 않으려 함은. 나 또한 어찌 잊을 수 있겠느냐? 무릇 이 진·채 사이에서 우리가 겪은 고난은 나에게도 다행이요, 나를 따라온 너희들에게도 다행한 일이다. 내 듣기로 한 나라의 임금도 고난을 겪어보지 않고서는 왕도를 이룰 수 없고, 열사도 고난을 겪지 않고서는 그 장렬함을 드러낼 수 없다고 하였다. 어찌 장부의 가슴을 격동시키고 뜻을 독려하는 결심이 이러한 고난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공자가어> ‘곤서’편<16>)
세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통쾌하게 웃는다. 자로와 재여 등 나머지 제자들과 짐꾼들이 하나 둘씩 웃음소리가 나는 곳으로 모여든다. 그 모습이 마치 뭇별들이 북극성을 따라 모여드는 것처럼 보였다.(‘위정’편 1장<17>)
後日子思門下曰 天將降大任於是人也 必先苦其心志 勞其體筋骨
餓其體膚 空乏其身 行拂亂其所爲 所以動心忍性 曾益其所不能
훗날 자사의 문도가 말했다. 하늘이 장차 한 사람에게 큰 사명을 맡기고자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 마음을 고뇌하게 하고, 몸을 수고롭게 하고, 배를 굶주리게 하며, 그에게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게 하여 하는 일마다 좌절하게 하는데, 그것은 온 마음으로 자신을 인내하여 일찍이 할 수 없었던 일을 마침내 이루도록 하기 위해서이다.(<맹자> ‘고자 하’<18>)
<원문 보기>--------------------------------------------------
*<논어명장면>은 소설 형식을 취하다 보니 글쓴 이의 상상력이 불가피하게 개입되었다. 역사적 상상력을 통해 논어를 새롭게 해석해보자는 글쓴 이의 취지를 살리면서 동시에 독자들의 주체적이고 다양한 해석을 돕기 위해 원문을 글 말미에 소개한다. 소설 이상의 깊이 있는 논어읽기를 원하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논어> 원문의 한글 번역은 <논어집주>(성백효 역주, 전통문화연구회 편)와 <안티쿠스 클래식6-논어>(한필훈 옮김)를 나란히 싣는다. 각각 신구 번역문의 좋은 사례로 생각되어서이다. 표기는 집(논어집주)과 한(한필훈 논어)으로 한다. 이와 다른 해석을 실을 때는 별도로 출처를 밝힐 것이다.
***<논어>는 편명만 표시하고, 그 외의 문헌은 책명을 밝혔다.
①<공자가어> 재액편에는 자공이 지니고 있던 재물을 풀어 포위망을 뚫고 농촌에서 쌀을 사왔다고 말하고 있다. 사마천은 <공자세가>에서 공자가 자공을 초나라에 보내 초소왕으로 하여금 군대를 파견해 공자 일행을 맞이해 갔다고 하였다. 그러나 공자의 초나라 방문설에는 후대에 이견이 제기된 바 있다. 전 회 참조.
②공야장편 11장
子貢曰 我不欲人之加諸我也, 吾亦欲無加諸人. 子曰 賜也 非爾所及也.
집-자공이 말하기를 “저는 남이 나에게 가하기를 원하지 않는 일을 저도 남에게 가하지 않으려고 합니다.”하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야! 이것은 네가 미칠 바가 아니다.”
한-자공이 공자에게 말하였다. “제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좋은 말이다. 그러나 너는 아직 그런 일을 실천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지 못하였다.”
③술이편 10장
子謂顔淵曰 用之則行 舍之則藏 惟我與爾有是夫. 子路曰 子行三軍 則誰與. 子曰 暴虎憑河 死而無悔者 吾不與也 必也臨事而懼 好謀而成者也.
집-공자께서 안연에게 일러 말씀하셨다. “써주면 도를 행하고 버리면 은둔하는 것을 오직 나와 너만이 이것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자로가 말하였다. “부자께서 3군을 통솔하신다면 누구와 함께 하시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맨손으로 범을 잡으려 하고 맨몸으로 강하를 건너려다가 죽어도 후회함이 없는 자를 나는 함께 하지 않을 것이니, 나는 반드시 일에 임하여 두려워하고, 도모하기를 좋아하여 성공하는 자를 데리고 할 것이다.”
한-어느 날 공자가 제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공자가 안회에게 말하였다. “관직에 등용되면 나아가 경륜을 펼치고, 관직에서 밀려나면 들어앉아 학문을 탐구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네와 나뿐인 것 같군.” 평소 용맹을 자부하던 자로가 물었다. “만약 선생님께서 군부를 통솔하신다면 누구와 함께 하시겠습니까?”“맨주먹으로 호랑이에게 달려들고 배도 없이 강을 건너려다가 죽어도 후회하지 않는 무모한 사람과는 함께 하지 않겠다. 모든 일에 신중하게 임하며, 미리 계획을 세워 일을 성사시키는 사람이 좋을 것이다.”
④공야장편 8장
子謂子貢曰 女與回也 孰愈. 對曰 賜也何敢望回. 回也 聞一以知十 賜也 聞一以知二. 子曰 弗如也 吾與女 弗如也.
집-공자께서 자공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안회와 누가 나으냐?”하셨다. 대답하기를 “제가 어떻게 감히 안회를 바라보겠습니까?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고, 저는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압니다.” 하였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안회만 못하다. 나는 네가 그만 못함을 허여한다.”
한-공자가 자공에게 물었다. “너와 안회 가운데 누가 더 낫다고 생각하느냐?”“제가 어찌 안회와 견주길 바라겠습니까? 그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지만, 저는 하나를 들으면 겨우 둘을 알 뿐입니다.” 공자가 기뻐하며 말하였다. “그 말이 맞다. 너만이 아니라 나조차도 안회에게 못미치는 점이 많다.”
⑤공야장편 3장
子貢問曰 賜也何如. 子曰 與器也. 曰 何器也. 曰 瑚璉也.
집-자공이 “저는 어떻습니까?”하고 묻자, 공자께서 “너는 그릇이다.”하셨다. “어떤 그릇입니까?”하고 다시 묻자, “호련이다.”하고 대답하셨다.
한-자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저를 어떻게 보십니까?”“너는 쓸만한 그릇이다.” “어떤 그릇입니까?” “종묘 제사에 쓰이는보배롭고 빛나는 그릇이다.”
⑥위정편 12장
子曰 君子不器.
집-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그룻처럼 국한되지 않는다.”
한-공자가 말하였다. “군자란 한 분야에 능통한 전문가나 기능인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일에 통달하고 남의 모범이 되는 지도자를 말한다.”
⑦<공자가어>(임동석 역주) 재액편
(…) 孔子顧謂二三子曰 吾之信回也 非待今日也.
내가 안회를 믿어온 것은 오늘 같은 일이 있기를 기다린 것이 아니었다.
⑧ <여씨춘추>(정영호 해역) 제17권 ‘심분람’
所信者目也 而目猶不可信 所恃者心也 而心猶不足恃 弟子記之 知人固不易矣.
믿을 수 있는 것은 눈이지만 그러나 눈은 오히려 믿을 수가 없고, 의지할 것은 마음이지만 그러나 마음은 오히려 의지할 것이 못된다. 제자는 이것을 기록하라. 사람을 아는 일은 진실로 쉬운 일이 아니라고.
⑨자한편 10장
顔淵위(한숨쉴 위)然歎曰 仰之彌高 鑽之彌堅 瞻之在前 忽焉在後. 夫子循循然善誘人 博我以文 約我以禮. 欲罷不能 旣竭吾才 如有所立卓爾. 雖欲從之 未由也已.
집-안연이 크게 탄식하며 말하였다. “(부자의 도는)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고, 뚫을수록 더욱 견고하며, 바람봄에 앞에 있더니 홀연히 뒤에 있도다. 부자께서 차근차근히 사람을 잘 이끄시어 문으로써 나의 지식을 넓혀주시고 예로써 나의 행동을 요약하게 해주셨다. (공부를) 그만두고자 해도 그만둘 수 없어 이미 나의 재주를 다하니, (부자의 도가) 내 앞에 우뚝 서 있는 듯하다. 그리하여 그를 따르고자 하나 어디로부터 시작해야 할 지 모르겠다.
한-아! 우리 선생님은 우러러 볼수록 더욱 높아지고, 뚫고 들어갈 수록 더욱 견고해진다. 또 앞에 계신 듯하여 바라보면 어느새 뒤에와 계시다. 선생님은 차근차근 질서있게 사람을 인도하여 주신다. 나의 지식을 학문으로 넓혀 주시고, 나의 행동을 예로 제약해 주셨다. 그러므로 공부를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 없어 최선을 다해 보았더니, 이제 무언가 앞에 우뚝 서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것을 따르려고 하지만 도저히 따라 갈 방법이 없구나!
⑩사마천은 <사기> 화식열전에서 자공이 위나라에서 벼슬살이를 한 뒤 조나라와 노나라간의 무역에 종사하여 재산을 모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마천에 따르면 자공이 제후를 방문할 때면 기마대의 호위 아래 네 마리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비단을 선물로 가져가니, 몸소 뜰 아래까지 내려와 맞이하지 않는 왕이 없었다고 한다.
⑪선진편 18장
子曰 回也 其庶乎 屢空. 賜 不受命 而貨殖焉 億則屢中.
집-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안회는 (도에) 가까웠고 자주 끼니를 굶었다. 사는 천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재화를 늘렸으나 억측하면 자주 맞았다.”
한-공자가 말하였다. “안회는 성인의 도에 가장 가까왔다. 그는 자주 쌀독이 비었지만 항상 태연하였다. 반면 자공은 천명을 따르지 않고 재산 늘리기에 골몰했는데, 워낙 현명해서 그의 판단은 늘 적중하였다.”
⑫옹야편 9장
子曰 賢哉 回也 一簞食一瓢飮 在陋港 人不堪其憂 回也 不改其樂 賢哉 回也.
집-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어질다! 안회여!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음료로 누추한 시골에 있는 것을 딴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뎌내지 못하는데, 안회는 그 즐거움을 변치 않으니, 어질다, 안회여!”
한-공자가 말하였다.“어질구나, 안회여! 한 소쿠리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을 마시며 누추한 골목에서 사는 것을 남들은 견디지 못하는데 , 안회는 변함없이 그 생활을 즐기는구나. 어질구나, 안회여!”
⑬학이편 15장
子貢曰 貧而無諂 富而無驕 何如. 子曰 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子貢曰 詩云如切與磋 如琢如磨 其斯之謂與. 子曰 賜也 始可與言詩已矣 告諸往而知來者.
집-자공이 말하였다. “가난하되 아첨함이 없으며, 부하되 교만함이 없으면 어떻습니까?”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괜찮으나 가난하면서도 즐거워하며, 부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자만 못하다.”하셨다. 자공이 말하였다. “<시경>에 ‘절단해 놓은 듯 하며, 다시 그것을 간 듯하며, 쪼아놓은 듯하며, 다시 그것을 간 듯하다.”하였으니, 이것을 말함일 것입니다.”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는 비로소 더불어 시를 말할 만 하구나! 지나간 것을 말해주자 올 것을 아는구나.”
한-자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가난하면서도 남에게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면서도 남을 업신여기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선생님은 그 사람을 어떻게 평가하시겠습니까?” “물론 훌륭한 사람이지. 하지만 가난하면서도 즐겁게 살고, 부유하면서도 예의를 좋아하는 사람보다 못하지 않을까?” 자공이 다시 말했다. “<시경>에 나오는 ‘옥을 갈고 닦아서 빛을 낸다’는 말은 바로 이같은 끝없는 인격 도야을 가리키는 것이군요?”“너하고는 같이 <시경>을 이야기할 만하구나. 지나간 일을 말했더니 앞으로 다가올 일까지 알아차리는구나!”
*절차탁마라는 사자성어는 이 문답에서 유래한다.
⑭<설원(說苑)>(임동석 역주) ‘정리’편
공자가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자공의 실책”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부자는 소수인데, 보상금을 받으면 깨끗한 부자란 소리를 못듣고 안 받자니 막대한 비용이 부담스런 상황에서 자공의 선례로 인해 부자들이 결국 노예송환에 적극 나서지 않게 될 수도 있음을 우려한 것이다. <설원>은 이에 대해 공자야말로 교화에 통달한 사람(孔子可謂通於化矣)이라며, 노자가 했다는 "작은 것을 볼 수 있는 것이 명이다(見小曰明)”라는 말을 소개하고 있다. (<여씨춘추> <회남자> <공자가어> 등에도 같은 이야기가 수록돼 있다)
⑮자장편 23, 24,25장
叔孫武叔 語大夫於朝曰 子貢賢於仲尼. 子服景伯 以告子貢 子貢曰 譬之宮牆 賜之牆也 及肩 窺見室家之好. 夫子之牆 數인(길 인) 不得其門而入 不見宗廟之美 百官之富 得其門者或寡矣 夫子之云 不亦宜乎.(23장)
집-숙손무숙이 조정에서 대부들에게 말하기를, “자공이 중니보다 낫다.”하였다. 자복경백이 이 말을 자공에게 일러주자, 자공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대궐의 담장에 비유하면 나의 담장은 어깨에 미친다. 그래서 집안의 좋은 것들을 들여다 볼 수 있거니와, 부자의 담장은 여러 길이 된다. 그래서 그 문을 얻어 들어가지 못하면 종묘의 아름다움과 백관의 많음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문을 얻는 자가 드물다. 숙손의 말씀이 또한 당연하지 않겠는가.”
한-노나라 대부 숙손무숙이 조정에서 다른 대부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자공이 공자보다 훌륭하다고 봅니다.”자복경백이 이 말을 듣고 자공에게 전하자 자공이 말하였다.“궁궐의 담장에 비유해 보지요. 내 담장은 어깨 높이 밖에 안 되어서 잘 꾸며진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지만, 선생님의 담장 높이는 몇 길이나 되므로 문을 제대로 찾아 열고 들어가지 않으면 아름답게 지어진 종묘와 수많은 신하들을 볼 수 없습니다. 그 문을 찾아 들어간 사람이 별로 없으니까 그 분이 그렇게 말한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요.”
叔孫武叔 毁仲尼 子貢曰 無以爲也. 仲尼 不可毁也. 他人之賢者 丘陵也 猶可踰也. 仲尼 日月也 無得而踰焉 人雖欲自絶 其何傷於日月乎. 多見其不知量也.(24장)
집-숙손무숙이 중니를 헐뜯자, 자공이 말하였다. “그러지 말라, 중니는 훼방할 수 없다. 타인의 어진 자는 구릉과 같아 넘을 수 있지만, 중니는 해와 달과 같아 넘을 수 없다. 사람들이 비록 스스로 관계를 끊고자 하여도 어찌 해와 달에 해가 되겠는가? 다만 자기의 분수를 알지 못함을 보일 뿐이다.”
한-숙손무숙이 공자를 헐뜯자 자공이 말하였다. “쓸데 없는 짓이다. 우리 선생님은 헐뜯을 수 없는 분이다. 다른 현자들은 언덕이나 산과 같아서 노력하면 넘을 수도 있지만, 선생님은 해와 달 같아서 도저히 넘어설 수 없다. 사람들이 비록 해와 달을 등지려 한들 해와 달이 무슨 손상을 입겠는가? 그저 말하는 사람의 어리석음을 드러낼 뿐이다.”
陳子禽 謂子貢曰 子謂恭也 仲尼豈賢於子乎. 子貢曰 君子一言 以爲지 一言 以爲不知 言不可不愼也. 夫子之不可及也 猶天之不可階而升也. 夫子之得邦家者 所謂立之斯立 道之斯行 綏之斯來 動之斯和 其生也榮 其死也哀 如之何其可及也.(25장)
집-진자금이 자공에게 말하였다. “그대가 공손해서 그렇지, 중니가 어찌 그대보다 낫겠는가?”자공이 말하였다. “군자는 한 마디 말에 지혜롭다 하며 한 마디 말에 지혜롭지 못하다 하는 것이니, 말을 조심하지 않을 수 없다. 부자를 따르지 못함은 마치 하늘을 사다리로 오르지 못하는 것과 같다. 만일 부자께서 나라를 얻으신다면 이른바 세우면 이에 서고, 인도하면 이에 따르고, 편안하게 해주면 이에 따라오고, 고무시키면 이에 화하여, 그가 살아계시면 영광스럽게 여기고, 돌아가시면 슬퍼하는 것이니, 어떻게 따를 수 있겠는가.”
한-진자금이라는 사람이 자공에게 말하였다. “자네가 겸손해서 그렇지, 공자가 어떻게 자네보다 훌륭하겠는가?”“군자는 말 한마디에 따라 지혜롭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으므로 말을 함부로 해선 안됩니다. 내가 선생님을 따를 수 없는 것은 마치 사다리로 하늘에 오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선생님께서 나라를 맡아 다스린다면, 백성들이 말 그대로 세우면 서고, 이끌면 따르고, 편안하게 하면 모여들고, 감동시키면 변화할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그 분이 살아 있으면 영광으로 여기고, 세상을 떠나면 하나같이 슬퍼할 것입니다. 내가 그런 분을 어떻게 따를 수 있다는 말입니까?”
<16> <공자가어> ‘곤서’편
子貢執비(고삐 비)曰 二三子從夫子而遭此難也 其弗忘矣. 孔子曰 善 惡何也 夫陳蔡之間 丘之幸也 二三子從丘者皆幸也. 吾聞之 君不困 不成王 烈士不困 行不彰 庸知其非激憤勵志之始 於是乎在?
자공이 말고삐를 잡은 채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들 제자들이 선생님을 따라서 왔다가 이런 곤액을 만난 일은 잊지 못할 것입니다.”공자가 말하였다. “훌륭하도다! 어찌할 수 있었겠느냐? 그러나 무릇 이 진채 사이에서 당한 곤액은 나에게 있어서는 다행한 일이고 너희들이 나를 따라온 것도 다행한 일이다. 내 듣기로 임금도 곤경을 겪어 보지 않고서는 왕도를 이룰 수 없고, 열사도 곤경을 겪어보지 않고서는 그 행동을 드러낼 수가 없다고 하였다. 어찌 격분시키고 뜻을 독려하는 시작이 이러한 곤액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고 여기겠느냐?”
<17>위정편 1장에서 차용
子曰 爲政以德 譬如北辰居其所 而衆星拱之.
집-공자께서 말씀하셨다.“정사를 덕으로 하는 것은 비유하면, 북극성이 제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뭇 별들이 그에게로 향하는 것과 같다.”
한-공자가 말하였다. “도덕을 정치의 근본으로 삼으면 마치 모든 별이 북극성을 향하는 것 처럼 백성들이 진심으로 따를 것이다.”
<18> <맹자>(범선균 역해) ‘고자’ 하
孟子曰(…) 故 天將降大任於是人也 必先苦其心志 勞其體筋骨 餓其體膚 空乏其身 行拂亂其所爲 所以動心忍性 曾益其所不能
맹자가 말하였다.(…) 그러므로 하늘이 장차 큰 직책을 어떤 사람에게 맡기려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그들의 심지를 괴롭히고, 근육과 골격을 수고롭게 하고, 육체를 굶주리게 하고, 그들 자신에게 아무 것도 없게 하여서, 그들의 하는 일에 어긋나게 만드는데, 그것은 마음을 쓰고 성질을 죽여 일찌기 할 수 없었던 일을 더욱 하게끔 해주기 위해서이다.
*맹자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의 문하에서 수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