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 고승 티진 “타인을 위한 자애심은 자신을 행복하게 한다”
한국 온 티베트 불교 사캬파 수장 사캬 티진 린포체
‘부처님 오신 날’(25일)을 앞두고, 티베트의 고승 사캬 티진(70) 린포체가 5~11일 일정으로 한국을 찾았다.
티베트 불교엔 달라이라마가 속한 겔룩파와 카규파, 사캬파, 닝마파 등 4개 종파가 있다. 사캬파의 수장인 그는 티베트불교에선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의 화현’이자 ‘밀교의 법왕’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달라이 라마처럼 티베트에서 태어나 인도로 망명한 그는 인도 북부 데라둔에서 300여명의 동자승들을 데리고 살며 가르치고, 전세계를 다니며 불법을 전하고 있다.
달라이 라마의 방한이 중국 정부의 압력에 따른 한국 정부의 비자 발급 거부로 성사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티베트불교권의 최고승이 방한해 불자들의 갈증을 풀어주었다. 8일 동국대 대강당에서 열린 그의 강연엔 500명이 입추의 여지 없이 들어찼다. 9~10일 내면의 불성을 깨우는 티베트불교 의식인 1박2일 관정엔 법회장인 서울 강남구 자곡동 탄허기념박물관 수용 정원을 초과한 400명이 참여해 성황을 이뤘다.
사캬 티진 린포체는 지난 7일 우리나라 문수 성지인 오대산을 찾았다. 그는 월정사에서 단기출가자들에게 ‘출가의 의미’에 대해 법문하고, 월정사와 상원사를 둘러보았다. 그와 오대산까지 승용차에 동승했다.
지혜 상징 ‘문수보살의 화현’으로
티베트 불교에서 추앙받는 인물
동국대·탄허기념박물관서 강연
불자는 불상에, 비불자는 사물에
마음 집중·성품 보는 수행 필요
“내면평화 위해 부동심 가져야”
티베트의 고승 사캬 티진 린포체
“우리가 세상에 온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스스로도 행복해지고, 남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다. 그걸 알아야만 삶의 의미가 생긴다.”
영동고속도로를 다 벗어나도록 깊은 침묵 명상 속에 빠져 있던 그는 오대산이 가까워지자 깨어나 ‘우리가 사는 이유’로 첫 말문을 열었다. 지혜(깨달음)와 자비(연민)라는 불교의 두 축 가운데 ‘깨달음’을 강조하는 경향이 짙은 한국 불교와 달리 그는 이타심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부처님께 올리는 최고의 공양도 바로 모든 중생을 위해 자애심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그런 자애심이 타인보다 바로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고 했다. 그런 자애심이 바로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와 가는 봄길은 아름다웠다. 신록이 푸르고, 꽃이 만개했다. 그는 “한국의 자연도 아름답고, 사람들도 친절하다”고 했다. 그러나 한국인들의 마음이 다 그런 봄날처럼 화창하지만 않다. 욕망을 이루기 위해 경쟁적으로 달려가면서 스트레스와 상처에 고통받는 이들이 많다. 그에게 “과연 욕망을 쟁취하기 위해 현실에서 부지런히 뛰어야 하는지, 아니면 그런 욕망을 비워야 하는지”를 물었다.
“중요한 것은 욕망이 아니라 동기다. 선한 마음으로 욕망을 가지면 욕망 자체도 좋은 것이지만, 이기적인 마음으로 욕망을 내면 좋지 않다.”
그는 “지난 50년간 물질문명이 대단히 발전해 모든 게 편리해졌음에도 사람들은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고 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돈이 없어 고통을 받는다. 부자들은 돈이 있는데도 정신적인 고통이 심하다. 우리 인간계는 고통과 행복이 함께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행복으로 여겨지는 것도 실은 고통의 원인이 된다. 그래서 참된 행복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니 세속에선 집착할 만한 게 없는 것이다.”
그는 “우리는 누구도 고통을 원치 않고, 모든 사람들은 매순간 행복하길 바라지만 아무리 삶이 편리해져도 마음에 평화가 없다면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며 “내면의 평화는 영적인 수행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내면의 평화를 위해서는 관념적 사유에서 벗어난 부동(不動)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며 이를 위한 사마타(집중) 수행의 필요성을 제시했다. “불자라면 불상에, 비불자라면 꽃 같은 사물에 두 걸음 정도 떨어져 시선이 떨어지는 곳에 두고 호흡, 시선,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집중하는 사마타 수행을 거쳐, 마음의 성품을 들여다보는 위파사나(관찰) 수행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티베트불교의 독특성은 윤회와 환생이다. 그가 얻은 린포체라는 명칭도 전생에 고승이었던 사람이 다시 환생했다는 의미다. 그런데도 그는 “수행을 하는 것은 좋은 조건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것도, 이번 생에서 복받고 잘살기 위해서도 아니다”라고 했다. 수행은 오직 영구적인 자유와 해탈을 얻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그는 “병을 치료하려면 병의 원인을 없애야 하듯이 마음의 고통을 치료하려면 고통의 원인을 없애야 한다”며 “집착을 떠나는 출리심(出離心)이 해탈의 길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도무지 집착을 버릴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세속적인 것이 행복의 원인이 아니라 고통의 원인이어서 집착할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제대로 이해할 때 출리심이 생긴다”고 덧붙였다. 그는 집착을 벗어나도록 하는 마음수행법을 더욱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선한 것을 창조한 것도 마음이고, 모든 악한 것을 창조한 것도 마음이다. 행복이나 고통 같은 것을 창조한 것도 마음이다. 꿈을 꾸면 그때는 사실이라고 느끼지만 꿈일 뿐인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 듣는 모든 것, 맛보거나 느끼는 모든 것은 마음이다. 우리의 마음이 행복하다면, 가장 가난한 국가에 산다 해도 행복을 느낀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이 행복하지 않다면 환경이 아무리 좋아도 행복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같은 장소에서도 한명은 행복을 느끼고 한명을 고통을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마음에 나타난 모든 대상은 환영이라고 여겨야 한다.”
평창 월정사/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