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카탈류나 지역에 있는 영산 몬세라토. 바르셀로나에서 멀지않은 이곳엔 검은마리아상인 블랙마돈나가
중턱 베네딕도수도원에 모셔져있다. 젊은 시절 용감무쌍한 기사가 되길 원했던 성이냐시오는 전쟁터에서
부상당한 뒤 회심해 이곳에 와 검을 마리아상에 바치고, 만레사동굴로 수도하러 떠났다.
성 이냐시오가 수도한 만레사동굴에 건립된 성당. 마리아상이 제대에 모셔져있고, 동굴은 영신수련을 하러는
이들이 와서 수련을 하며, 그 밖엔 그가 걸식할 때 사용한, 올리브나무로 만든 탁발그릇이 있다.
근대 가톨릭의 횃불인 성녀 데레사와 성 이냐시오, 수도개혁의 현장을 가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주관으로 스페인에서 특별한 여정을 가졌다. 성인들의 성지 순례다. 개신교의 경우 루터의 종교개혁 500년을 앞두고 루터, 칼뱅, 얀 후스의 자취를 찾는 순례가 부쩍 늘긴 했지만, 원칙적으로 구약과 신약에 나오는 성소 외엔 성지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느님과 자신의 다리로서 성인을 모시는 가톨릭에선 성인들의 자취를 찾는 것은 기도와 수도의 여정이 된다.
스페인엔 근대 가톨릭에서 가장 중요한 성인들이 있다. 예수회 설립자인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1491~1556)와 ‘맨발의 가르멜회’ 설립자인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1515~1582)와 십자가의 성 요한(1542~1591) 등이다. 이들은 400~500년 전 동시대 인물들이다.
스페인은 카스티야왕국의 이사벨라 1세 여왕과 아라곤왕국의 페르난도 2세 왕이 결혼을 해 무슬림과 유대인을 추방하고 1492년 통일해 가톨릭왕국을 세워 가톨릭이 패권을 장악했던 때다. 그러나 교황청을 중심으로 한 교회는 13세기 십자군전쟁 이후 권위 추락과 부패로 마르틴 루터가 1517년 95개 반박문을 발표해 신·구교로 나뉘며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바로 이때 이냐시오는 1540년 ‘가톨릭 사관학교’ 격인 예수회를 설립해 개신교의 확산을 저지하고, 현지 토양문화를 존중하는 선교 방식과 교육으로 전세계적 선교의 선봉장이 됐다. 또 성녀 데레사와 성 요한은 호화 사치와 나태가 만연한 수도회를 개혁해 금욕과 관상의 전통을 고수했다.
마드리드에서 가까운 아빌라. 성녀 데레사의 생가가 있고 그가 맨발의 가르멜수도원을 창립한 곳.
기념수도원에 완덕으로 가는 7단계인 7궁방이 마등에 그려져있다.
■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마드리드에서 북서쪽으로 85㎞ 떨어진 아빌라. 지난 8일 도착해 본 아빌라는 철옹성이었다. 300년간 무슬림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가톨릭의 요새답게 해발 1131m의 고지 마을을 높이 12m의 성벽이 2400m나 둘러싸고 있었다. 이제 아빌라는 성녀 데레사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듯이 곳곳에 성녀 데레사 탄생 500돌맞이 펼침막과 깃발이 나부꼈다.
유대인의 딸인 데레사는 19살에 입회해 52살에 ‘맨발의 가르멜회’를 설립했다. ‘맨발’은 한겨울에도 샌들만 신는다는 데서 유래한 금욕의 상징이었다. 기존 수도회를 이탈한 개혁에 고난이 없을 리 없었다. 그를 따르던 수녀 55명이 파문을 당하고, 수사로서 그의 개혁에 동참한 ‘십자가의 성 요한’이 감금당하는 등 20년 만에 분리에 성공했다. 그가 맨발의 가르멜회를 창립해 머문 엥카르나시온 가르멜수도원은 마당엔 ‘완덕’에 이르는 7단계의 여정인 7궁방이 그려져 있다. 실내는 외부와 단절된 봉쇄수도원임에도 수도자들도 기뻐야 한다며 연주하게 한 악기들이 눈에 띈다.
아빌라에서 20여분 더 가면 세계적인 신학대학이 있는 살라망카를 지나 알바데토르메스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성녀 데레사가 설립한 17개의 수도원 중 하나로 선종한 곳이기도 하다. 썩지 않은 데레사의 심장과 왼쪽 팔이 전시돼 성인 신심을 북돋우는 곳이다. 이 심장과 팔은 스페인의 독재자 프랑코가 말년에 병이 들자 자신의 방에 놓고 쾌유를 빌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아빌라의 데레사 생가 박물관을 지키는 다니엘 데 파블로 마로토 신부는 “‘신발을 벗는다’는 것은 세속적 욕구를 떨쳐내는 것을 의미하며, 운동선수도 음식을, 알코올을 조절하지 못하면 목표에 도달할 수 없듯이 현대인들에게도 정말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유혹에서 한발짝 물러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바스크지역 로욜라. 성이냐시오의 생가. 전쟁터에서 부상을 당하고 돌아와 회심한 방 경당에 그가
회심하는 장면을 재현해놓았다. 기념성당에 예수상 위에 성이냐시오 상이 배치돼 있다.
■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로욜라는 지금도 스페인으로부터 분리독립운동이 벌어지는 북서부 바스크 지방에 있다. 지난 10일 찾은 이냐시오의 생가는 풍광이 수려한 산간지역에 있었다. 또 프란치스코 교황이 속한 예수회의 모교회여서 2013년 교황 선출과 동시에 세계의 매스컴들이 몰려들었던 곳이기도 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즉위한 이후 방문객이 25%나 늘어 지난해 10만명이 방문했고, 한국인도 4천명이나 찾았다고 한다.
생가와 함께 있는 기념성당 제대엔 작은 예수상 위에 성 이냐시오 상이 훨씬 크게 배치돼 있는 게 인상적이다. 이곳 영주의 아들로 태어난 그의 생가는 궁궐을 방불케 하는 대저택이었다. 이곳 4층은 그가 30살에 프랑스군과 전투에 참전했다가 다리에 중상을 입고 죽을 고비를 넘기던 중 회심한 침실이 경당으로 꾸며져 있다. 이냐시오는 용감무쌍한 기사가 되어 명예를 얻는 꿈을 꾸며 호화롭고 방탕한 생활을 즐겼던 전형적인 귀족이었다. 출가 전 자식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회심 뒤 그는 바르셀로나 인근의 영산 몬세라트로 순례를 떠난다. 해발 723m에, ‘톱날산’으로 불릴 만큼 뾰족하고 기기묘묘해 한국의 금강산에 비견되는 몬세라트는 장관이었다. 이냐시오는 산 중턱 베네딕토 수도원의 ‘블랙 마돈나’(검은색 성모상)에게 자신의 칼을 바치고, 넝마를 걸친 채 만레사 동굴에서 기도를 시작한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이냐시오가 10개월 동안 이곳에서 기도하며 정리한 ‘영신수련’이란 수도를 하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만레사 동굴이 있는 성당에선 멀리 몬세라트가 보였다. 근대에 추락한 가톨릭을 되살리고, 전세계에 서강대를 비롯한 200여개 대학을 설립한 예수회의 토대가 이 동굴에서 만들어졌다. 이냐시오 생가 성당 접견책임자인 아이노와 빌라는 “빈자와 이혼자, 동성애자도 차별하지 않고 껴안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언행은 성 이냐시오의 회심과 예수회의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했다.
아빌라 로욜라 몬세라트 만레사(스페인)/조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