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은 인간 관계를 맺어가는데 있어서 부처님의 가르침인 ‘중도’는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깊이 있는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자신이 맡고 있던 업무를 새로운 담당자에게 맡기고 물러나게 되었는데 새로운 담당자가 실무는 잘 하지만 사람 관리를 부담스러워 하고 업무를 겁내는 것 같아서 자신 때문에 새로운 담당자가 정착을 못하는구나 싶어서 자신이 빨리 물러나 주는 것이 좋겠다고 총장님에게 건의를 했다고 해요. 그런데 총장님은 새로운 담당자가 아직 부족하니까 조금 더 도와주라고 했고, 그래서 조금 더 일을 도와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자신이 새로운 담당자에게 잔소리를 많이 한 것으로 평가가 되어서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 도와주라고 해서 도와주었을 뿐인데 결과적으로는 간섭한 것이 되었다’ 하는 질문이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답해 준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너의 얘기를 가만히 들어보니 총장님이 도와주라고 해서 도와주었는데 지금은 간섭했다고 평가하니까 섭섭해 하는 것 같다. 너의 입장에서는 ‘총장님이 왜 평가가 왔다갔다 하느냐. 이중 잣대를 들이대느냐’ 이렇게 볼 수도 있는데, 다시 총장님의 입장에서 보면 처음에는 너가 그만두겠다고 하니까 ‘어, 아직 인수가 덜 되었는데... 더 도와주어야 하지 않냐’ 해서 도와주라고 한 것이고, 그러나 나중에 평가를 해보니 새로운 담당자가 많이 부담스러웠다고 이야기를 하니까 ‘너가 간섭을 너무 많이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얘기를 한 것이죠. 얼핏 보면 모순 같은데 총장님 입장에서는 처음에는 자기 생각에 도움이 필요한 것 같아서 도와주라고 한 것이고, 나중에 평가 하면서는 새로운 담당자가 부담스러웠다고 하니까 간섭을 한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얘기를 한 것입니다. 앞에는 이런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했고, 뒤에는 저런 생각이 들어서 저렇게 한 것이죠.
저도 이 집이 지어진 것을 보고 처음에는 ‘잘못 지었다’ 고 해놓고, 살아보고 나서는 ‘잘 지었다’고 또 얘기하지 않습니까. (대중들 웃음)
왜 이랬다 저랬다 할까요? 그 때는 그런 모습을 보고 그렇다고 이야기 한 것이고, 이번에는 이런 모습을 보고 이렇다고 이야기 한 것입니다. 사람은 늘 이렇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간섭하는 것도 되지 않고, 외면하는 것도 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것이 바로 중도입니다. 그러나 내가 어떻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객관적인 평가는 나는 도와주었지만 상대가 간섭으로 느끼면 간섭이 되고, 나는 상대가 잘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떠났는데 상대가 그것을 섭섭하게 느끼면 외면이 됩니다. 이것을 내가 맞춘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럼 이것은 상대의 문제일까요? 아닙니다. 이것은 내 마음 속에 내 뜻대로 하려고 하는 욕구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총장님이 도와주라고 하면 도와주고, 간섭이라고 하면 조금 물러나고, 외면한다고 하면 조금 더 접근해 보고, 또 간섭이라고 하면 조금 물러나고, 이렇게 이래저래 해보면 간섭한다는 소리도 조금 덜 듣고, 외면한다는 소리도 조금 덜 듣는 쪽으로 가게 됩니다. 그렇게 조금씩 중도에 접근해 가는 것입니다. 중도는 이렇게 하면 되는 것이라고 딱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 혼자 하는 일도 이렇게도 치우치고 저렇게도 치우쳐서 중도를 맞추기 어려운데 사람과의 관계는 내가 중도에 맞춰 놓아도 상대가 ‘너는 고행하고 있다’고 하면 고행한 것으로 평가가 되고, 상대가 ‘너는 쾌락에 빠져있다’고 하면 쾌락으로 평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도에 딱 맞춰야겠다는 생각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도 내 생각대로 하려고 하는 것에 해당합니다.
상대가 빨리 가자고 하면 빨리 걷다가 너무 빠르다 하면 천천히 걷다가 또 너무 늦다고 하면 좀 빨리 걷고, 이런 것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처음에는 총장님이 도와주라고 해서 도와준 것이고, 평가는 간섭한다고 나오니까 조금 떨어져 있다가, 또 새로운 담당자가 ‘왜 안 도와주십니까’ 하면 다시 조금 도와주다가, 또 ‘그만둔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간섭하고 있냐’ 고 하면 ‘저 사람은 간섭한다고 느끼는구나’ 알면 됩니다. 이렇게 편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간섭하는지 의지하는지 하는 문제가 아니고 이 사람은 이렇게 느끼고 저 사람은 저렇게 느끼는 것에 대해서 거기에 모두 맞추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랬다 저랬다 한다고 분별심을 내어서도 안 되고,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이냐’ 해서도 안 되고, 그냥 ‘이렇게 느끼시구나’, ‘저렇게 느끼시구나’ 파악하고 거기에 맞춰서 이렇게 조금 조절하고 저렇게 조금 조절하면 시간이 흐르면 간섭한다는 소리도 예전보다 덜 듣게 되고, 외면한다는 소리도 예전보다 덜 듣게 됩니다. 이것이 중도로 가는 길입니다.
사람들은 칭찬해 줄 때도 있고, 칭찬 안 해줄 때도 있고, 간섭한다고 할 때도 있고, 못한다고 할 때도 있는데, 그 뜻을 존중해서 ‘아, 그래요?’ 하면서 조금씩 움직여 가면서 적절함을 찾아가는 것이 중도입니다. 여러분들은 이것이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자기 생각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다 자기 식대로 하려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중도는 그 상황에 맞는 적절함인데 중도라는 것도 자기가 정해놓은 식으로 중도를 고집하니까 상대가 볼 때는 또 다른 극단이 됩니다.
도반들의 얘기나 법사님들의 얘기나 후배들의 지적이나 선배들의 지적에 너무 민감하게 대응하지 말고, ‘아, 저 사람은 저렇게 느끼는구나’ 이렇게 좀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자세를 가져 보세요. 너무 무시하지도 말고 거기에 너무 놀아나지도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명상할 때 다리를 펴지도 말고 참지도 말라는 얘기와 같은 것입니다. 지적을 받아들이면서 적절히 조정하면서 몇 번 시행착오를 거치면 처음보다는 경직성이 완화가 되어 갑니다. 명상을 할 때도 처음에는 마음을 편안하게 가진 것 같았는데 더 편해져서 보면 ‘아, 조금 전에는 경직되어 있었구나’ 이런 것을 알 수 있잖아요. 그것처럼 중도라는 것은 딱 이것이다 하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모인 40명 사이에서의 중도는 40명 각자의 뜻을 적절히 조정하는 것입니다. 귀가 얇아서 한 사람 한 사람의 말에 다 끌려가면 치우치게 되고, 경계에 끄달리지 않는다고 누구의 말도 안 듣고 자기 혼자의 뜻대로 나가면 그것도 치우치게 됩니다. 그래서 중도는 40명의 생각이 바뀔 때 마다 조금씩 조금씩 바뀌는 것입니다. 40명의 견해가 하나로 딱 뭉쳐지지 않습니다. 이 40명도 아침에 생각이 다르고 저녁에 생각이 다릅니다. 시간과 공간이 시시때때로 바뀌어 나가고, 같은 사람도 시간이 흐르면 생각이 바뀌고, 같은 장소에서도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다르고, 이렇게 요소가 바뀌면 그만큼 달라질 수 밖에 없는 것이 인연의 도리입니다. 본래는 정해진 것이 없지만 시공간에 따라서 정해지는 것입니다. 시간이 바뀌면 또 바뀌고, 공간이 바뀌어도 또 바뀝니다. 이렇게 이치적으로도 분명히 알아야 하고, 또한 실천적으로도 경험이 되어져야 중도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질 수 있습니다.
적절함, 과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고 이러지도 않고 저러지도 않고, 얼마나 말이 애매합니까. 경험하지 않고 논리로 설명해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경험되어진 만큼 유연해지는 것입니다.
공부가 끝이 없는 이유는 까르마가 끝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상황이 매번 바뀌기 때문입니다. ‘아, 이것은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정하는 즉시 상황이 바뀌어 버리기 때문에 또 안 맞게 됩니다. 답을 찾아 놓아도 상황이 바뀌어 버리면 또 안 되게 됩니다. 그래서 늘 깨어있어야 됩니다. 중도란 것은 사람처럼 늘 살아 움직이는 것입니다. 탁 깨치면 그 이후로는 그대로만 하면 된다 하는 것은 없어요. 이것이 수행에 있어서 큰 모순입니다. ‘아(我)’가 없다고 늘 이론으로 배우지만 이것 자체가 아(我)적인 사고 방식입니다. 일체가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했는데 또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늘 유동성 있게 작용하는 것이 진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변하는 것이 진리일 수도 없고, 변하지 않는 것이 진리일 수도 없고, 변화 속에 변하지 않음이 있고, 변하지 않는 것 속에 변화가 있는 것이 존재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중도란 살아움직이는 것이라는 말씀이 크게 와 닿았습니다.
*이 글은 정토회 '스님의 하루'에 실린 것입니다.
http://www.jungto.org/buddhist/budd8.html?sm=v&b_no=69325&page=3&p_no=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