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 선교 130돌, 최초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고향을 가다
<상> 조선 복음·근대화 위해 하나 되게 한 열정
130년전 푸른 눈의 두청년이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27세 헨리 아펜젤러(1858∼1902)와 26세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1859~1916)였다.
미국에서 ‘땅끝’ 조선으로 온 20대 두 청년이 심은 밀알이 그토록 창대해지리라곤 누구도 예상치못한 발걸음이었다. 유럽과 미주를 제외하고 개신교가 유일하게 이땅에서 주류종교로 자리잡게 한 첫걸음이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그들이 들여온 서양학문과 의술, 사회복지, 시민단체 등이 ‘봉건주의 왕국’을 계몽하는 근대화의 횃불이 되었다. 당시 개신교는 교세로는 1% 미만의 미미한 종교였으나, 한반도 변화에 가장 큰 촉매제였다.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 이후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기독교 국가 건립’ 정책과 선교 열정에 힘입어 한국 개신교는 전세계에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만큼 폭발적으로 성장해 주류종교가 됐다.
그러나 선교·성장·성전 제일주의, 대형교회 목사들의 타락과 비리, 추문 등 도덕성 위기, 근본주의 집착과 다양성 무시, 기득권화와 분단 갈등 조장 등으로 인해 반개신교 정서도 커지고 있다. 이에따라 교세도 정체를 보이며 최대의 위기를 맞은 개신교는 선교 초기 말보다는 실천과 봉사, 헌신으로 단단한 밀알을 심은 초심으로 돌아가야한다는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더구나 통일 시대를 앞두고, 독일 통일에 결정적인 구실을 한 교회의 소명을 다시금 되새길 때라는 성찰도 커진다.
*뉴브런스윅신학교 전경
이에 따라 경기도 용인 새에덴교회의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발자취 답사단’과 함께 지난 7~11일 함께 했다. 지난 7일 답사의 첫방문지는 스코틀랜드 장로회 가정에서 태어난 언더우드가 미국으로 이주해 뉴욕대학에서 교육학을 공부한 뒤 해외선교의 꿈을 키운 뉴브런스윅신학교였다. 뉴저지주 주립대학교인 럿커스대와 인접한 이 학교는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전쟁에 승리한 1784년 유럽에서 벗어나 미국다운 신학을 위해 세워진 미국 최초의 신학교다. 학생수 200여명에 불과하지만, 세계 선교의 선봉장이 된 곳이다. 뉴욕시내에서 자기 집안의 많은 노예를 풀어주고, 노예 해방에 앞장 선 존 헨리 리빙스턴(1746~1825)이 해외 선교에 뜻을 두고 설립한 이 학교 졸업생들은 19세기부터 15% 가량이 해외로 나갔다고 한다.
이 학교의 센터격인 중앙도서관엔 유일하게 언더우드의 흉상이 있다. 9년 전 연세대에서 기증한 것이다. 프린스턴신학교 등과 함께 미국 신학계의 자존심인 뉴브런스윅이 최근 ‘졸업생 언더우드’에 대한 대접이 뚜렸해지고 있다. 언더우드학이 개설돼 영어 이외엔 최초로 한국어로 공부하는 프로그램이 이 달에 개설된다. 언더우드의 후손들이 이 학교에 기증한 언더우드의 비공개 서한들도 내년에 출간될 예정이다. 또 헨리루스재단이 기금을 지원해 주어 앞으로 5년간 ‘언더우드 정신으로 어떻게 세계 기독교에 기여할 것인가’를 연구할 ‘언더우드 글로벌 기독교센터’가 이 학교에 마련됐다.
*뉴브런즈윅신학교 도서관에 있는 언더우드 흉상 앞에서 언더우드에 대해 설명하는 김진홍 교수, 존 코클리 교수, 그레그 매스트 총장(왼쪽부터).
초대 센터장을 맡은 이 신학교 김진홍 교수는 “기독교 선교학으로 보자면 가톨릭 예수회가 선교를 시작한 이래 18세기말 인도로 간 윌리엄 캐리와 버마로 간 저슨, 중국으로 간 허슨 테일러 등이 손꼽히지만, 그들이 간 나라는 복음화되지 못한 반면 언더우드가 우리나라는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복음의 토착화에 성공했다”며 “특히 장기비전을 가지고 초교파적 연합정신을 가지고, 와이엠시에이를 창립하고, 일반인들도 공부할 수 있는 연세대까지 만들며 장기비전을 세웠다는 점에서 가장 위대한 선교사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랭커스타제일감리교회 전경
다음에 아펜젤러가 감리교 신학의 본산격인 드류대에 진학하기 전 다닌 필라델피아주 랭카스터의 프랭클린 마셜대학과 인근 랭커스터제일감리교회를 찾았다. 개인적인 기도나 회심보다 공동체성을 강조한 스위스계 메노나이트였던 어머니의 영향 아래서 자란 아펜젤러는 대학시절 한 부흥집회에서 영적 회심을 체험한 뒤 21세에 풀뿌리 민중들에게 접근해 복음을 전도하는 감리교인이 된다. 이 교회 담임목사 조셉 디파올로는 “아펜젤러는 이곳에서 평신도 설교자로 1년간 봉사하며 자신의 뜨거운 체험을 전하며 가슴으로 믿는 신앙을 설교했다”고 말했다.
이 교회엔 7~8년 개축하면서 ‘아펜젤러 기념 채플’을 만들었고, 이 채플엔 아펜젤러가 건립한 정동제일교회에서 기증한 십자가가 걸려있다. 또 최근에도 아펜젤러가 세운 인천내리감리교회 교인 130명이 다녀가는등 감리교인들의 답사지가 되어가고 있다.
*랭커스터제일감리교회의 ‘아펜젤러 기념 채플’에서 아펜젤러의 선교 열정을 전하는 조셉 디파올로 목사.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최초로 만난 것은 1883년 코네티컷주 하트포드신학교에서 열린 신학생선교연합모임에서였다.
각기 학교 대표로 참여한 둘은 이때까지만도 아펜젤러는 일본, 언더우드는 인도로 갈 마음이었다. 1년 뒤 이들은 뉴저지주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열린 선교모임에 함께 참여했을 때 둘 다 조선행을 다짐하고 있었다. 조선행을 희망하는 선교사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고, 이들은 자신의 필요보다는 현지의 필요에 응답한 것이다.
한 배를 타고 이 땅에 도착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자기 교단만을 내세우지않고, 서로 협력해 교회 뿐 아니라 병원과 자선기관, 학교의 설립해 시종일관 협조해 놀라운 에큐메니칼(화해 일치) 정신을 보여주었다.
뉴브런즈윅 존 코클리 교수는 “언더우드 재학 당시 학생선교사회의 회의록을 보면 언더우드가 장로교신학교에 다니면서도 구세군에서 봉사활동을 해 교단을 넘나드는 초교파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김진홍 교수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초교파적 연합정신으로 훗날 한국과 세상을 이끌수 있는 리더쉽을 창출했다”고 밝혔다.
이번 답사를 기획한 새에덴교회 소강석 목사는 “지금으로 보면 너무나 이질적인 장로교와 감리교를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하나를 이뤄 학교와 병원을 세워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고 깨웠다”면서 “통일시대 북한동포와 소외계층 등을 껴안아 동일체성을 심어주기 위해서는 우리부터 공익을 위해 그 분들처럼 분열을 넘어 함께 해 가야한다”고 말했다.
뉴브런즈윅·랭카스터(미국)/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