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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사랑하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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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사랑하는 남자

[생활의 발견] 광릉 송민석 씨 인터뷰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뜻밖의 소식> 이희연 기자 2015.09.23  


"조금씩 베란다를 물들이며 다가온 설핏한 붉은 노을을 벗 삼아 빨래를 걷는다. 운동을 좋아해 언제나 흙과 함께하는 아들 녀석의 옷들은 애벌빨래를 하는데 더 신경이 쓰인다. 얼룩과 땀 내음, 그리고 움직임이 많은 부분을 따라 해진 보푸라기들을 만져보면 아이의 피톨이 느껴진다. 조용히 앉아 공부하는 딸내미의 교복에선 지난한 고단함이 물씬하다. 셔츠에 묻은 잉크 얼룩에 가슴이 먹먹해진다."광릉에 사는 두 아이의 아빠이자 가정주부인 송민석 아우구스티노 씨의 글이다. 하루 24시간 중 23시간 59분 59초를 집에서 보낸다는 이 남자의 일상은 청소와 빨래로 풍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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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민석 씨는 집에 애정이 생기니 먼지도 사랑스럽다고 했다. ⓒ이희연


집에서 청소하고 빨래하게 된 계기는?

2007년에 근처로 이사하고, 2011년에 지금 사는 광릉으로 아예 들어왔어요. 고등학교 2학년 딸과 중학교 3학년 아들이 있는데, 아이들을 직접 가르치려고 하던 일을 그만두고 시간을 냈죠. 예전엔 서울에서 과외를 했어요. 급하게 살았죠.

서울 청담동에서 과외를 하고 대치동에 갔다가 분당에 들러서 일산까지 돌고 집에 들어오면 새벽 2시쯤 돼요. 차로 120km를 다녔죠. 집에 와서 씻고 자기 바빠요. 아침엔 일어나서 운동은 해야 하니까 동네 한 바퀴 달리고, 서둘러서 수업준비하고 나서죠. 서둘러서 다니는 것이 일상이었어요.


지금은 집에서 우리 아이들도 가르치고, 다른 아이들 과외도 해요. 제가 물리 전공했거든요. 아이들에게 수학과 과학을 가르치죠. 하지만 멀리 돌아다니지 않고 집에 있으니까 시간이 너무 많은 거예요. 그런데 집안일이라는 게 누군가는 해야 하는 거잖아요. 집사람이 일찍 나가니까 안 하면 쌓이는데, 결국 누가 할 것인지 많이 생각해봤죠. 내 일을 핑계 삼아 집사람에게 미룰 건가? 효율성을 따져보니 제가 하는 게 낫겠더라고요. 교구 주보에 빨래에 대한 글을 썼을 때 "빨래하는 걸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 애쓰네."하시는 분들도 있었어요. 하지만 청소하고 빨래하다보면 느끼는 것들이 쏠쏠해요.


어느 날 거실에 앉아서 빨래를 개고 있었어요. 해가 지나가는 걸 보면서 빨래를 만지는데, 수건이 바싹 말라서 까실까실 하더라고요. 막 문지르면 다치겠다 싶더군요. 내 몸에서 물이 다 빠져 나가면, 나도 남을 다치게 할까? 내게도 적당한 수분이 필요하구나. 촉촉함을 유지해야지... 촉촉함의 정체가 뭘까? 유연함인가? 균형 잡힌 생활? 지혜? 종교? 이런 생각을 하면서, 빨래를 하면 싫지 않아요. 알아서 미리 하니까 집사람의 잔소리도 안 듣고요.


잔소리는 누구나 싫어하죠.

저는 잔소리가 정말 싫어요. 제가 유복자예요. 아버지 얼굴을 모르죠. 평생 어머니와 함께 살았는데, 학창시절에도 어머니는 공부하란 잔소리를 하신 적이 없어요. 처음엔 제가 공부를 너무 안 하니까 포기하셨고, 나중에 정신 차려서 공부할 때는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서 아무 말도 못하셨어요. 대학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못하시니까, 어머니는 일만 열심히 하셨죠. 그런 생활에 익숙해서 그런가 잔소리 듣는 걸 진짜 싫어해요. 결혼 전에 집사람에게도 이야기 했어요. "잔소리 하는 건 정말 싫으니까, 원하는 게 있으면 이야기를 해. 뭘 해주면 좋겠다든지, 뭘 고치면 좋겠다든지. 이야기해주면 내가 할게."그래서 담배도 힘들지만 끊었거든요. 하겠다고 하면 하니까 집사람도 제가 하는 일을 인정해줘요. 제가 무엇을 한다고 할 때면,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어주는 거죠.


바쁘게 하던 과외를 그만두고, 집에서 일하시면서 걱정했던 부분은?

제일 큰 불안감은 수입 문제였죠. 소비를 줄여도 최소한 생계비가 나올지 불안했어요. 실제로 지금 수입은 예전에 서울 쪽에서 과외 할 때의 반도 안 돼요. 여기 광릉은 강남만큼 돈 주면서 과외 할 학생도 없고, 그 돈을 줄 형편들도 아니고요. 저와 집사람이 많이 고민하면서 서서히 이곳 생활에 연착륙 해보자 했는데, 하다 보니 조금씩 줄여가는 건 제가 하지 못하겠더라고요. 한 번에 내려가야 그 깊이를 감당할 수 있겠다 생각했죠. 만약 이런 생활에 정착하는데 실패하면, 예전처럼 다시 나가서 과외를 해야 하잖아요. 이미 과외가 다 끊어졌는데 다시 나간다고 할 수 있을까 불안했죠. 지금은 경제적으로도 안정되었지만, 만약 실패했다면 힘들었겠죠. 집사람과 아이들이 많이 도와주었어요. 나 하나 씀씀이를 줄인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돈을 잃고, 이 생활을 얻었어요. 손해 본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이 생활에 익숙해져서, 전처럼 살라고 하면 못 살 것 같아요.


늘어난 여유시간엔 무엇을 하시나요?

모든 일정이 빡빡하게 짜여 있었는데, 어느 날 눈을 뜨니까 시간이 너무 많더라고요. 뭘 해야 하나 고민하면서 이것저것 해봤어요. 한 시간이나 달리기를 하고 와도 시간이 남더라고요. 그래서 책도 보고, 도자기도 배우고, 기타도 배웠어요. 그런데 책도 시간에 쫓기면서 봐야 재밌잖아요. 단순히 시간을 죽이려고 하는 건, 오래 못 가는 거 같아요. 다른 이유나 핑계가 생기면 곧 그만두게 되죠. 그렇지 않은 게 집안일과 달리기예요. 40평쯤 되는 밭에서 농사도 지어요. 집에서 좀 떨어져 있지만, 자주 가서 저희가 먹을 채소를 키우죠. 마라톤을 한지도 오래 되었어요. 2001년부터 시작해서 풀코스도 23번 뛰었네요. 100번을 채우는 걸 목표로 하고 있어요. 매일 밖에서 뛰다보니 까맣게 타서 발목에 양말 자국이 났네요. 하지만 뭔가 하지 않으면 나태해질 것 같았어요. 그래서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아이들 학교 가고 집사람 출근하는 걸 꼭 보려고 노력해요. 오전에 청소하고 빨래해야 오후에 과외 손님을 받을 수 있고요.


금연부터 마라톤까지 의지가 대단하시네요.

해야겠다고 하면 바로 하는 편이에요. 실은 냉담 기간이 길었어요. 1980년도에 고등학교 1학년이었는데, 친구가 "성당에 예쁜 여자애가 있는데, 네 맘에 꼭 들 거야."하기에 면목동 성당에 가서 세례를 받았는데 서울 면목동에서 받았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예쁜 여자애에겐 남자친구가 있더라고요.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나가다가 점점 안 가게 되었죠. 30년 넘게 냉담을 했어요. 어머니가 개신교 교회를 열심히 다니신 영향도 있었죠. 결혼할 때 집사람이 천주교라고 하니 성당 갈 거면 결혼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 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2011년 즈음 집사람이 "성당에 가보면 어떨까?"묻더군요. 교적이 살아 있을지 걱정했는데, 면목동에 가니 남아 있더라고요. 집사람이 성당 가자고 할 때 제가 싫다고 하면, 집사람의 설득이 길어졌겠죠.


돌아온 이후론 성당에 열심히 다녔어요. 혼배성사도 받고, 견진도 받고. 작년에는 주일미사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나갔어요. 꾸준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무언가를 바라보는 시선이 많이 바뀌었어요. 눈에 보이지 않는 면이나 행간을 보려고 노력해요. 예수님은 왜 저렇게 가셨을까, 십자가 뒤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아이들은 왜 저럴까 생각하게 되니 언어도 부드럽게 나가고요. 책을 볼 때도 천주교와 관련된 내용이면 손이 좀 더 쉽게 가요. 정약용에 대해서도 전에는 그저 역사책의 한 인물로 생각하고, 줏대 없는 배교자라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신앙을 갖게 되고 배교하는 과정에서, 정약용이라는 사람 안에 어떤 마음들이 있었을까 생각해봐요. 바쁘게 살 때는 세상의 한 가지 면만 보고 살았는데, 천천히 살다보니 다양한 면을 보게 되는 것 같고요.


책을 읽고 글 쓰는 것도 좋아하시나요?

어릴 땐 가난했고, 다른 친구들에 비해 키가 크거나 싸움을 잘 하는 게 아니라서 소위 왕따였어요. 소외당한 마음들이 안에 차곡차곡 쌓였죠. 그러다 고등학교 때 글을 하나 썼는데, '우와, 이거 내가 쓴 거 맞아?'생각한 글이 있었어요.

그 이후로 가끔 글을 썼죠. 자랑을 하나 하자면, 대학생 땐 평론으로 고대에서 주는 문학상을 받기도 했어요. 조금씩 계속 글을 썼는데, 과외 하러 돌아다닐 때엔 바빠서 못 썼죠. 그래도 언젠가는 글을 쓸 기회가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느낌이 있었어요. 지금은 글을 꽤 모았어요. 집에서도 시간 날 때면 종종 써서 모아두죠. 언젠간 빛을 볼 날이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요.


마라톤 잡지에서 인터뷰 기사도 썼었어요. 마라톤을 함께 하는 동업자를 만나 인터뷰해서 그런지, 더 반갑더라고요. 김훈 작가 인터뷰가 기억에 남아요. 그분이 괴팍하긴 하지만, 소설을 좋아해서 흑산까지는 많이 읽었어요. 무라카미 하루키와 김연수 작가의 글도 챙겨 읽죠. 마라톤 동업자니까요. 마라톤을 하면서 어떤 글을 쓸지 관심이 가요. 최근엔 김소연, 이병률 시인의 글도 재미있게 읽었어요.


청년들이 즐겨 읽는 작가들을 좋아하시는 걸 보니, 젊은 감정을 갖고 계신가 봐요.

집에 과외하러 오는 애들이 장난삼아 말해요. "선생님이 젊은 건, 선생님이 저희들 기를 다 빨아 먹어서 그래요."요즘 애들은 저희 때와 많이 다르죠. 그런 감성에 눈높이를 맞추고 이해하려고 해요. 아이들과 대화의 선을 찾아가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부모들은 아이들과 대화가 안 된다고 자신과는 선이 끊겼다고 포기하지만, 잘 찾아보면 아이들이 세상과 소통하는 선은 어딘가에 꼭 살아있어요. 아무리 말썽 피우고 폭력적인 아이들이라도 어딘가에 순수한 선은 살아있거든요. 세상과 내밀하게 소통하는 선을 누구에게나 보이는 곳에 두진 않을 테니 찾기 어려운 것뿐이에요. 그래도 애들은 소통의 선을 찾도록 힌트를 잘 흘려요. 가끔은 다른 아이가 넌지시 알려주기도 하고요. "선생님, OO가 여자친구 생겼어요."그럼 그 선을 갖고 물어보는 거죠. "너 여자친구 생겼다며? 걔 어디가 좋니?"처음엔 이야기 안 해도 나중엔 다 이야기해요. 선물로 뭘 살지 제게 상의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런 선도 오래 못 가요. 아이들은 많이 바뀌니까요. 소통하던 선 갈아치우고 다른 선 또 깔고, 또 갈아치우고... 인내심을 갖고 찾아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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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소리가 싫다고 하셨는데, 아이들에겐 잔소리 하시나요?

어떤 책에서 봤는데, 잔소리의 '잔'은 '남을 잔(棧)'이라 하더라고요. 잔여, 잔반 할 때의 그 '잔'이죠. 남아도는 쓸데없는 소리라는 거죠. 그런데 막상 잔소리 하는 사람은 꼭 필요한 이야기라고 생각하잖아요.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하죠. 나와 전혀 엮이지 않은 아이에겐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해."할 수 있겠지만, 제가 키우고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그렇게 말하긴 정말 어렵더라고요. 그 아이들에겐 공부해야 한다고 이야기 하죠.


아들이 자꾸 옷을 뒤집어 벗어서 가족회의까지 했어요. 제발 뒤집어 벗지 마라, 양말 또르르 말아서 벗지 말아라... 양말은 말려 있으면 빨아도 그대로 되어 있어서 다시 빨아야 하잖아요. 한 번은 너도 당해봐라 하고, 뒤집어 빨아서 뒤집어 말려서 뒤집어 접어서 줬어요. 그랬더니 아들이 뒤집어서 입고 나가더라고요. "어때, 뒤집어 입으려니까 힘들지?"했더니 "아니, 안 힘들어. 아빠 힘들면 그렇게 해."하더라고요. 할 말이 없었어요. 결국 빨래한 것 같지 않으니 제가 열심히 뒤집어서 빨죠.


제가 생각할 때 잔소리는 상황에 따라 변하는 이야기인 것 같아요.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달라지지 않고 언제나 같은 이야기면 그건 정말 해야 하는 이야기고요. 그래도 아이들에게는 달콤하게 포장해서 잔소리를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선생이라 그런지. 반성합니다.


집에서 하루를 보내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점심 먹을 때죠. 빨래도 청소도 다 하고 점심 먹으면, 밀린 숙제를 다 한 거잖아요. 처음엔 혼자 밥 먹는 게 불편했어요. 밖에서 일하다가 혼자 밥 먹는 건 익숙한데, 집에서 혼자 밥 먹으려니 입맛도 없고 몇 술 뜨다 말고. 이렇겐 안 되겠다 싶어서 친해지기 시작했죠. 책도 보고, 신문도 보면서 TV 흉내도 내요. 원래 정말 빨리 먹었는데, 집에서는 천천히 즐기면서 먹어요. 전엔 집이 잠자러 들리는 곳이었어요. 뭐든 빨리 하고 나가기 바빴죠. 요즘은 집에 머무르는 거잖아요. 밥 먹고, 일도 하고, 쉬기도 하고. 집에 머물다보니 구석구석 관심이 생겨요. 예전에 서둘러서 씻고 나가느라 못 봤던 것들이 눈에 띄죠. 먼지도 보이고, 쓰레기도 보이고, 아이들이 몰래 먹고 숨겨놓은 과자봉지도 보이고...


집에 애정이 생기니 먼지도 사랑스럽더라고요. 시간이 없으면 이 모서리까지 와보지 않을테고, 여기 구석에 와보지 않으면 먼지도 못 보는 거잖아요. 가끔은 먼지도 살아있는 것 같아요. "저 좀 치워주세요."말을 거는 것 같고요. 집안의 책 한 권, 사물 하나가 소중하게 느껴지죠. 살아가는 공간이 달라지니 삶도 달라지는 것 같아요.


이희연 기자/뜻밖의 소식


*이 글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5355)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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