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이 배설이 되고 배설이 밥, 요강에 생명의 꽃이 핀다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대안리 불편당 마당에서 요강 앞에 앉은 고진하 목사와 권포근씨 부부. 사진 고은비 제공
뉘엿뉘엿 저녁놀이 물드는 황혼녘, 산책을 다녀오는 길에 쑥부쟁이 한 다발을 꺾어 왔다. 늦여름에 수술을 하고 집에서 요양 중인 아내에게 꺾어 온 꽃을 쑥 내밀었다. 아직 병색이 덜 가신 아내 얼굴이 꽃처럼 환해졌다. 어머, 고마워요!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 거실로 들어가니, 창가의 탁자 위에 연보랏빛 꽃이 흐드러져 있었다. 그런데 꽃을 담아 놓은 용기를 보니 화병이 아니고 요강이다. 아니, 요강에 꽃을?
어머니도 나도 아내·딸도 한 개씩
밤새 방안에서 요강을 탄다
아침이면 찰랑찰랑 텃밭에 거름
불편함이 주는 아름다운 순환
날숨 버려야 들숨 들어오듯
욕심만 채우다 보면 변비 걸린 삶
비움의 미덕 잊어버리면
심각한 영적 치매에 걸린다
쑥부쟁이를 담아 놓은 요강은 아내 생일에 내가 선물한 나무요강이다. 풍물시장 골동품 가게에서 헐값에 샀다. 옛날 귀부인들이 가마를 타고 다닐 때 쓰던 거라고, 골동품 가게 주인은 너스레를 떨었지만, 난 그게 그렇게 오래된 진짜 골동품이 아니고 재현품이란 걸 안다. 아내는 나무요강을 화수분처럼 마루 구석에 모셔 두었는데, 오늘 거기 처음으로 꽃을 담았다. 당신 미적 감각은 정말 놀라워, 요강에 꽃을 꽂을 생각을 하다니!
사실 우리 집엔 나무요강 말고도 요강이 세 개나 된다. 작년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쓰시던 요강, 아내와 딸이 함께 쓰는 요강, 그리고 내가 쓰는 요강! 몇 년 전 지금의 전통한옥으로 이사하고 보니, 변소가 바깥에 있어 너무 불편했다. 당호를 불편당으로 짓고 불편도 불행도 즐기자고 굳게 마음먹었지만, 추운 겨울 한밤중에 내복 바람으로 변소를 다녀오면 온몸이 얼어붙었다.
여보, 안 되겠어요. 요강 좀 구해 봐요. 나는 곧 가까운 고물상을 순례하듯 돌며 요강을 몇 개 구해 왔다. 한 번도 요강을 써보지 않은 딸도 반색을 하며 그날 밤부터 요강을 타기(!) 시작했다.
요강을 타고 나서부터 식구들의 정도 새록새록 더 불어나더라. 한 요강에 오줌을 누면 서로의 몸 냄새도 자연스레 맡게 되니까. 더욱이 요강을 쓰면 자신의 건강 상태도 저절로 돌아보게 되더라. 내가 눈 오줌의 색깔을 보고 그 냄새도 맡게 되니까. 탁한 음식을 먹은 날은 영락없이 오줌의 색깔도 거무죽죽하고 악취를 풍겼다. 아, 그래, 내 몸에 함부로 뭘 집어넣으면 안 되겠구나! 정갈한 음식을 가려 먹어야겠구나! 요강을 사용하고부터 자연스레 내 내면을 돌아보게 되었다. 자연 그 자체인 몸은 정직하다. 먹는 것이 곧 내 몸이 된다.
*(왼쪽)권포근씨가 꽃을 꽂아둔 나무요강. (오른쪽)아침에 요강의 오줌을 채소밭의 거름으로 주는 고 목사. 사진 고은비 제공
한의사이기도 한 도올 김용옥 선생은 말했다.
“문명에 의해 조작된 미(味)를 우리는 음식이라 부른다. 그런데 입구멍에서 똥구멍까지의 시종(始終)은 자연이다. 땅으로부터 입구멍까지의 미(味)는 조작될 수 있지만 입구멍으로부터 똥구멍까지의 미(味)는 조작될 수 없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똥이야말로 몸이라는 우주의 가장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이다.”
그렇다. 문명의 조작을 덜 가한 정갈한 음식을 먹으면 오줌 색깔도 맑고 탁한 냄새가 나지 않는다. 잡초를 뜯어 천연의 밥상을 자주 차려 먹는 우리 식구들의 요강 속 오줌은 산골짝 옹달샘에서 솟는 물처럼 청정하다. 도올의 표현을 빗대어 말하면, 맑은 오줌이야말로 몸이라는 우주의 가장 청정한 자연의 모습이다.
아침에 일어나 내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요강을 들고 텃밭으로 가는 일이다. 요즘 텃밭에서 한창 자라는 배추와 무에 거름을 주기 위해서! 찰랑찰랑하는 요강을 신줏단지처럼 조심스레 들고 텃밭으로 나가면 배추와 무가 자라는 밭고랑에 오줌을 쏟아붓는다. 비료 한 번 주지 않았지만, 오줌 거름을 먹은 배추와 무는 싱싱하다. 꼬물꼬물 기어다니며 배추·무 잎을 파먹는 벌레들이 있으나 거름 기운이 좋으니 식물의 성장엔 전혀 지장이 없다.
사실 내가 먹을 식물에 내 몸에서 나온 배설물을 주는 것은 매우 자연스런 일이다. 비료가 나오기 전 우리 조상들의 농법이 그랬다. 밥이 똥이 되고, 똥이 밥이 되는 이치를 훤히 꿰뚫고 있었으니까. 기억이 어렴풋하지만 어떤 시인이 ‘똥이 밥으로 돌아가야 세상이 바로 선다’고 노래했다. 이런 시구는 대자연의 ‘아름다운 순환’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매일 요강을 써야 하는 불편을 즐기며 내가 새삼 깨달은 것도 바로 그것이다. 양변기의 편리를 누릴 땐 까맣게 몰랐던 것이다.
이 소중한 지면에 내가 요강 타령을 늘어놓는 더 중요한 현실적 이유도 있다. 요강을 쓰자 물 절약도 엄청 되더라. 생각해 보라. 당신이 양변기에 눈 오줌의 양에 비해 흘려보낸 물의 양은 수백 배가 될 것이다. 우리나라도 해가 갈수록 가뭄 현상이 심각해지고, 앞으로 물 부족으로 고통받게 될 게 뻔한데, 아주 쉬운 데서부터 물 절약을 실천해야 하지 않을까. 양변기로 흘려보내는 물만 절약해도 식수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터. 그래서 이 지면을 빌려 제안하는 바다.
모두 예쁜 요강 하나씩 마련해 요강을 타자고! 작은 교회를 섬기는 나는 교우들에게도 요강을 쓰자고 자주 이야기하곤 한다. 그건 단지 이런 현실적 이유만은 아니다. 어떤 이가 말하는 ‘식탁과 변기의 순환적 동질성’이 절실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아침마다 용변을 보고 나면 배설의 수고를 치른 항문 주위를 애무하듯 만지며 물로 씻어준다. 문명의 편리와 위생의식에 길든 우리는 손이 배설물에 닿는 것을 칠색 팔색을 하지만, 똥오줌이 과연 그렇게 더러운 것인가.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성스러운 어머니 대지는 그 더러움을 품어 우리에게 생명의 밥을 돌려주지 않던가. 배설은 자연이다. 배설의 자연을 거스르면 생명은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날숨을 버려야 들숨이 들어오는 이치와도 같다. 날숨을 버리지 않겠다고 고집부리면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죽음뿐. 그러므로 숨이든 오줌이든 똥이든 배설은 중요하다. 어릴 적 송홧가루로 만든 다식을 잔뜩 먹고 똥을 누지 못해 죽도록 고생한 적이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이토록 변비 걸린 듯 답답하고 정체된 것은 탐욕의 숟가락으로 큰 아가리에 떠 넣을 줄만 알았지 배설할 줄은 모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너나없이 탐욕의 사슬에 꽁꽁 묶여버린 오늘의 천민자본주의는 배설, 즉 버림의 미덕을 모른다. 오죽하면 마이스터 에크하르트(1260~1327) 같은 수도승이 버림을 ‘모든 덕 가운데 가장 뛰어난 덕’이라고 했겠는가. “왜냐하면 그것은 영혼을 정화하고, 양심을 깨끗하게 씻어주며, 마음을 불태우고, 영을 깨우고, 소망에 생기를 주고, 하느님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에도 나는 찰랑거리는 요강을 들고 대문 밖에 있는 텃밭으로 나갔다. 영롱한 이슬이 맺힌 배추밭 고랑에 오줌을 쏟아붓고 돌아서는데, 앞집의 박씨 할머니가 경로당으로 향하던 발길을 멈추고 호동그랗게 눈을 뜨고 묻는다. “아니, 고선상네는 아직도 요강을 써요?” “네, 우린 변소가 밖에 있잖아요. 그리고 요강을 쓰면 거름도 배추밭에 줄 수 있고….” 박씨 할머니는 내가 들고 있는 요강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우리도 다시 요강을 마련해야겠어요.” 양옥에 사시는 박씨 할머니가 이렇게 얘기한 것은 당신 남편이 치매를 앓고 계시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치매가 점점 심해지는 박씨 할머니의 남편은 용변이 마렵다고 하여 화장실로 데려가다 보면 자주 똥오줌을 싼다고 한다. 어디 이 할아버지뿐이겠는가. 치매, 오늘 우리는 밥과 똥, 들숨과 날숨의 아름다운 순환을 망각하고 산다. 배설과 버림과 비움의 미덕을 잊고 산다. 이것은 기우뚱, 균형을 잃어버린, 심각한 영적 치매 현상이 아닌가.
고진하(원주 한살림교회 목사·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