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일 났다. 핸드폰을 못 찾겠다. 어제저녁 책상 위 어딘가에 둔 것 같은데 찾아보니 없다. 빨리 전화를 걸어야 하는데, 거기 전화번호가 다 들어 있는데 이를 어쩐다. 어쩌면 다른 데 뒀는지도 모른다. 아예 집에 안 가지고 왔을 수도 있다. 사무실에 두고 왔거나, 길거리 어딘가에 흘렸을 수도 있다. 사실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다. 사십 중반 넘어가니 깜빡하는 일이 잦아졌다.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안녕하세요, 목사님.” 예배 마치고 돌아 나오는데 누가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아, 이분, 내가 아는 분이다. 우리 교회 다니는 교인이다. 지난주에 바로 이 자리에서 인사를 나눴고, 통성명도 했다. 그런데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럴 땐 정말 난감하다. 그렇다고 “저, 죄송한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서 그러는데,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어요” 하고 정직하게 아뢸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를 교인에게 관심도 없는 불성실한 목사로 생각할 테니 말이다.
이런 상상을 해본 적 있다. 기억상실증에 걸리면 어떻게 될까? 자기 이름도 집도 학교도 기억 못 한다면 어떻게 될까? 자기를 낳아준 부모, 자기가 낳은 자식, 평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한 배우자도 기억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살 수 있을까?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나누는 슬픔과 기쁨을 추억하지 못한다면 과연 인간다운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이 기억 없이 살 수 있을까?
기독교는 기억의 종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독교인이라면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태초에 하나님이 이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했다. 그러나 인간의 반역으로 이 세상은 망가졌다. 이기적인 인간은, 마치 자기가 하나님인 양, 세상의 주인인 양 착각하여, 교만과 탐욕을 채우기 위해 돈과 권력으로 가난한 자를 억압하고 이방인을 내쫓고 약자를 죽이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를 보냈다. 그가 이 땅에 오심을 기억하는 날이 성탄절이다.
예수 탄생 이야기를 기억해보자. 성탄의 소식을 처음으로 듣는 영광은 들에서 잠을 자는 불쌍한 목자들에게 돌아갔다. 아기 예수께 예물을 드리려고 멀리 동방에서 찾아온 사람은 외국인 박사들이었다. 반면 권력자 헤롯왕은 예수를 없애려고 수많은 아기들을 죽였다. 그 바람에 예수는 태어나자마자 부모를 따라 이집트에서 난민 생활을 해야 했다. 예수의 탄생은 죄악으로 인해 고통받는 자들에게 기쁜 소식인 반면, 그 죄악으로 혜택 보는 권력자에게는 그 반대였다.
제대로 기억해야 한다. 예수 탄생의 메시지를 화려한 크리스마스트리와 축복의 탈을 쓴 탐욕의 설교에서 찾는다면, 그는 올바른 기독교인이 아닐 수 있다.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불과 작년에 벌어진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지 못해서, 혹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거짓말해서, 참사 당시 20여명의 아이를 구출한 의인이 피를 흘려야 한다면 그 책임자는 범죄자일 수 있다.
기억하는 성탄절이 되기를 소망한다. 고난당하는 자들을 위해 오신 예수를 기억해야겠다. 헤롯왕의 포악 때문에 죽어간 무고한 아기들을 기억해야 한다. 권력자의 교만과 탐욕으로 죽어간 우리의 아이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