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의 검은 예수] <2>
의사도 손 놓은 뇌 손상 환자 기도로 되살아나
일대기 영화로 만들어져 ‘영웅’으로 심금 울려
» 세부 성당에 있는 베드로 칼룽소드가 순교하는 순간의 그림. 작살에 짤린 칼룽소드를 향해 디에고 신부가 순간적으로 성사적 사죄를 베풀고 있다.
순교는 자신이 믿는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그래서 순교자는 추앙을 받는다. 새남터에서, 절두산에서 한국의 천주교도들은 수많은 목숨을 바쳤다. 망나니가 날카롭고 커다란 칼을 들고 춤을 추며 자신의 목을 노릴 때 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후회를 했을까? 아니면 순교의 기회를 준 하느님에게 감사했을까? 그 무시무시한 칼날이 자신의 목을 파고드는 순간까지 순교자들은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자신의 믿음을 지키고, 증거할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가톨릭국가인 필리핀에서는 놀랍게도 순교자가 단 두 명이다. 그들은 신부도 아니고 평신자이다. 한 명은 괌에서, 한 명은 일본에서 순교했다.
성 베드로 칼룽소드는 1672년에 17살의 나이에 순교했다. 그는 2012년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시성됐다. 성인품에 오른 것이다. 그래서 필리핀에서는 그가 순교 영웅이다. 3년 전에는 그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베드로 칼룽소드>가 만들어져 필리핀인들을 울렸다고 한다.
» 세부 성체대회 개막 행사에 등장한 베드로 칼룽소드 상
그는 1655년 필리핀의 비사얀지역에서 태어나 예수회의 기숙학교에서 기초적인 종교교육을 받았다. 그는 1668년 몇몇 스페인 예수회 선교사들과 서태평양의 섬에 사는 원주민들에게 선교를 하러 갔다. 원주민들은 그들을 적대시했다. 그러나 용감하게 선교를 계속했다. 그는 디에고 루이스 데 산 비토레스 신부와 함께 한 마을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작살과 칼을 든 원주민의 습격을 받았다. 오두막에서 태어난 한 아이에게 유아세례를 하고 있을 때였다. 디에고 신부는 비록 위험은 하지만 선교단에게 무기를 지참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남들은 혼비백산하며 도망갈 때 칼룽소드는 디에고 신부 곁을 떠나지 않았다. 원주민들은 먼저 칼룽소드를 작살로 찔렀다. 죽어가는 칼룽소드를 향해 디에고 신부는 성사적 사죄를 베풀었다. 곧 디에고 신부도 살해됐고, 그들의 시신은 바다에 던졌다. 칼룽소드는 도망갈 수도 있었지만 신부와 함께 죽음을 택한 것이다.
이런 칼룽소드가 시성 절차에 인정된 기적이 있다. 2003년 한 50대 여성 사업가는 뇌 손상으로 혼수상태에 빠졌다. 의료진도 포기했을 때 담당 의사 중 한 명이 복자 베드로 칼룽소드에게 도움을 청하자며 기도를 올렸다. 놀랍게도 환자는 4시간만에 회복됐다. 다른 의료진들이 놔파 데이터 오류라고 의심할 정도였다. 의사는 환자에게 “새 생명을 얻었으니 칼룽소드에게 감사하라”고 했더니 그 환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 사람이 누구예요?”라고 반문했다. 설명을 들은 그 환자는 9일 감사기도를 바쳤다고 한다.
필리핀을 무력으로 정복한 스페인이 전파한 가톨릭은 집권세력이 적극적으로 전파했기에 순교자가 별로 없다. 조선시대에 전파된 천주교(서학)와는 배경이 다른 셈이다.
칼룽소드는 조선시대 순교자들처럼 순교 전까지 갖은 고문과 고초를 겪고 죽음을 당한 것과는 달리 순식간에 살해당한 셈이다.
조선시대 최초의 신부이자 순교자인 김대건 신부는 25살에 순교 당했다. 상하이에서 신부가 된 지 불과 13개월만에 벌어진 일이다. 그것도 상하이에서 조선땅에 오는데 두 달이 걸렸고, 잡혀서 4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했기 때문에 실제 신부로 활동한 기간은 단지 7개월이다. 그럼에도 김대건 신부가 추앙받는 이유는 그가 순교를 했기 때문이다. 피를 흘렸기 때문이다.
» 롤롬보이에 있는 김대건신부성당에 세워진 김대건 신부 동상(왼쪽)과 최양업 신부 동상.
김대건 신부와 마카오에서 공부를 한 최양업(1821~1861) 신부는 일반인들은 잘 모른다. 그는 김대건에 이어 두 번째 신부 서품을 받았다. 김대건 신부와 동갑내기로 함께 마카오에서 유학한 최 신부는 김대건 신부가 몰래 조선에 입국해 선교활동을 하다가 순교당할 때, 수차례에 걸쳐 입국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지 2년 뒤 신부가 된 최양업 신부는 1849년 철종 때 조선 입국에 성공해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펼쳤다. 당시 조선땅에 있던 유일한 조선인 신부였다. 그래서 할 일이 많았다. 전국에서 최 신부를 불렀다. 고해성사를 하려 해도 신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과로에 식중독이 겹친 최 신부는 40살의 나이에 길거리에 쓰러져 사망했다.
세부에서 열리고 있는 제51차 세계성체대회 한국 순례단 대표인 장봉훈 주교는 “김대건 신부는 ‘피의 증거자’이고, 최양업 신부는 ‘땀의 증거자’”라고 구별했다. 쓰임이 달랐다는 것이다.
필리핀 성당의 예수상과 마리아상 등 성물은 매우 사실적이고 구체적이다. 섬뜩할 정도이다. 손바닥에 박힌 굵은 못과 예수의 손금, 흐르는 피는 마치 실물을 보는 듯하다.
참! 지난 글에서 궁금했던 ‘정복자(스페인)가 전파한 종교를 국교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필리핀인들에게 물었다. 그런 질문에 대해 대부분 의아한 표정이었다. 전파된 지 오래됐기 때문에 그 어떤 나쁜 감정도 없었다는 것이다. 1521년 마젤란이 필리핀의 작은 섬에서 최초의 미사를 드렸으니, 이미 거의 500년이 흐른 셈이다. 그동안 가톨릭은 교육과 문화, 그리고 각종 방면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고, 전혀 이방인의 종교라고 생각되고 있지 않았다. 일본이 한반도를 병탄한 36년과는 비교가 안되는 오랜 기간이다.
그들에게 가톨릭은 종교가 아니다 . 그들에게 가톨릭은 생활이다.
(3편으로 이어집니다)
세부/글·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