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사람들은 자비를 하나의 단어라고 여긴다. 그런데 경전을 보면 자비는 엄연하게 자(慈)와 비(悲)라는 두 개의 단어로서, 그 뜻도 사뭇 다르다. 자는 상대방을 내 벗으로 여기는 우정이란 뜻의 ‘마이뜨리’이고, 비는 나와 다를 바 없는 이들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서 품게 되는 슬픔이란 뜻의 ‘까루나’이다. 그래서 <대지도론>에서는, 자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려는 마음이고, 비는 사람들이 처한 지경을 보며 애태우고 가슴 아파하는 마음이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이런 자를 자애, 우정, 사랑이라 풀이하고, 비를 연민, 슬픔이라 말하기도 하며, 단음절로 쓰기가 애매해서인지 두 글자를 하나로 합쳐 그냥 자비라고 말하면서 편하게 ‘사랑’이라 이해한다.
자비를 사랑이라 받아들이니 아무래도 ‘자’ 쪽이 좀 더 우세한 것 같지만 경전을 꼼꼼하게 읽어보자면 붓다의 마음은 자보다 ‘비’가 크다.
붓다가 굳이 세세생생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것도 이기심과 탐욕에 눈이 어두워 악업을 저지르는 이를 위해 자신을 바치는 큰 슬픔(대비심)에서 하는 일이요, 왕궁을 나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이룬 것도, 깨달음을 이룬 뒤 45년을 쉬지 않고 맨발로 마을에서 마을로 다닌 것도 사람들이 저질러서는 안 되는 일을 더 이상 저지르지 않게 하려는 큰 슬픔에서 한 일이다.
그뿐인가. 깨달음을 이루었기에 붓다라 불리는 만큼, 붓다를 낳은 이는 마야부인이 아니라 지혜(반야)이다. 그래서 반야를 붓다의 어머니, 즉 불모(佛母)라고도 부른다. 그렇다면 반야에게도 어머니가 있을 터. 그 큰 슬픔이 반야를 낳았으니 반야의 어머니는 큰 슬픔, 즉 대비다. 붓다의 족보는 이렇다. 세상을 향한 연민과 슬픔이 붓다로 하여금 깨닫게 했고, 그 깨달음을 이룬 자는 다시 세상을 향해 슬픔을 가득 안고 지혜의 이슬을 붓는다는 말이다.
패륜아와 패륜부모들은 뒤늦게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모쪼록 자신의 행위를 살피고 살핀 끝에 쏟아내는 슬픔의 눈물이기를 바란다. 이래저래 붓다도 슬프고 중생도 슬프고 마음도 슬픈 요즈음이다.
이미령(불교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