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인 VIP로 모시기 13년, 민들레국수집 서영남 전 수사
25년 수사의 옷 벗고 환속…알 깨고 나와 빈민 곁으로
정부나 큰손 도움 사절…작은 나눔과 정성 모아 ‘식탁’
» 노숙인들의 굳어진 입을 열기 위해 서영남씨 부부가 마련한 독후감 발표회. 매일 3~4시엔 노숙인들이 자신이 읽은 책의 느낌을 발표하면 3000원을 받는다. 가운데가 서씨, 오른쪽이 서씨의 부인 베로니카.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어머니는 스물두 살의 아들이 수도사의 길을 가겠다고 수도원에 간다고 하자 춤을 출 만큼 기뻐하셨다고 한다. 그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끈질기고도 오랜 물음 끝에 수사의 길을 택했다. 25년간 그는 수사의 길을 걸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수도복을 벗었다. 옷 몇 벌과 책 몇 권인 짐을 꾸려 환속했다. 결혼도 했다. 남들은 수근거렸다. 환속한 수사들은 평생 예수님의 제자로 살고자 했던 결심을 끝까지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민들레국수집에는 국수가 없다
그는 오십의 나이에 빈손으로 시작했다. 노숙인들에게 배불리 밥을 먹이고 싶었다. 국숫집을 열었다. 가난한 이들이 줄을 서서 식사를 기다리는 것이 안타까웠다.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줄을 세우지 않았다. 그래서 아침 10시부터 식당 문을 열었다. 그가 운영하는 ‘민들레국수’집에는 국수가 없다. 처음엔 국수를 준비했으나, 국수로는 주린 배를 충분히 채울 수 없기에 6개월이 지난 뒤엔 밥과 국, 반찬을 준비했다. 전직 수사 서영남(62·)씨는 자신이 환속한 이유를 ‘아프락사스’라고 말하며 환하게 웃는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서 나오는 아프락사스는, 알을 깨고 나온 새가 날아가려는 신의 이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가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되듯이 그는 자신을 둘러싼 수도원이라는 껍질을 깨고 나왔다. 어렵게 나온 속세에서 그가 하는 빈민 구제 사업 역시 기존의 틀을 깨고 있다.
전국 교도소 찾아가 장기수들 친구가 되기도
얼마 전 국내 대기업의 한 고위 임원이 그가 운영하는 인천의 민들레국수집을 찾아왔다. 노숙인들 사이에서 한 끼를 해결한 그는 한 가지 제안했다. 그룹차원에서 도움을 주겠다고 했다. 서씨는 미안한 표정으로 그 제안을 거절했다. 날마다 400~500여명의 노숙인들에게 해줄 밥을 지을 쌀이 떨어질까 걱정을 하는 그가 대규모 지원을 거절하자, 그 고위 임원은 그렇다면 개인차원에서 돕겠다며 달마다 후원금을 보낸다.
» 전직 수사 서영남씨가 노숙인들을 위해 각종 봉사 시설을 만든 인천 화수동 골목길에 서있다.
그는 지난 13년 동안 정부 지원금을 한푼도 받지 않았다. 또 돈 많은 이들의 자선이나 기증도 사양했다. 오직 주변의 자발적인 나눔과 정성으로 식탁을 차려냈다.
“굶주림의 문제를 국가나 부자들의 비인격적인 자선에 기대하지 말고, 우리 스스로가 어려움에 직면한 형제들의 보호자가 되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나누고 집없는 이들에게 쉼터를 마련해 줘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하루하루가 기적’이라고 말한다. 주린 배를 끌어안고 찾아온 VIP손님(그는 노숙인을 그렇게 부른다)들에게 아낌없이 내어드리면 신기하게도 더 많은 것들이 들어온다는 것이다. 이름을 알리지 않은 수많은 고마운 분들이 쌀 한 포대, 계란 한 판, 김 한 상자, 파 한 단, 라면 한 상자 등을 보내온다는 것이다.
“하느님을 굉장히 장난꾸러기이신 것 같아요. 전혀 대책이 없어서 두 손 두 발 다 들었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거들어 주세요. 분명히 해주시긴 해주시는데, 애간장을 늘 태우시니 말이죠. 허허허”
그는 수사시절 전국의 교도소를 찾아다니며 면회오는 이 없는 장기수들의 친구가 돼 주었다. 출소자들의 집인 ‘평화의집’에 파견돼 그들과 함께 살기도 했다.
책 읽으면 빳빳한 천원짜리 3장…필리핀에도 ‘희망의 홀씨’
환속한 뒤 그는 어려운 이들이 많이 사는 인천 화수동에 노숙인들에게 무료로 식사를 제공하기 시작해 식당 근처에 어린이공부방, 어린이무료식당, 어린이도서관, 노숙인쉼터 등을 마련하는 ‘기적’을 일궜다. 또 2년 전부터는 필리핀의 세 곳에 민들레국수집을 열어 필리핀의 빈민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그가 운영하는 노숙인쉼터인 ‘민들레희망센터’에 가면 은행에서 막 찾아온 신권 천원짜리 세 장을 받을 수 있다. 그냥 주는 것이 아니다. 쉼터에 있는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서 발표하기만 하면 된다.
서씨의 부인(세례명 베로니카)는 은행에 가서 항상 신권을 찾아 놓는다. 노숙인들에게 구겨진 지폐를 주지 않기 위한 배려이다. “가난하거나 소외된 사람의 특징은 억압에 눌려 제대로 자기표현을 하지 못합니다. 말할 기회도 박탈당했어요. 교도소를 찾아가서 갇힌 형제들을 만나며 그들에게 자기를 표현하고, 드러낼 수 있도록 도와주니 스스로 변하는 것을 느꼈어요.”
» 민들레국수집을 찾아온 노숙인 손님들에게 직접 밥과 반찬을 대접하는 서영남 전 수사.
10년형을 받은 소년원 출신의 30대 중반 제소자는 독후감 발표를 하며 책과 가까워져서, 중·고·대입 검정고시를 통과해, 마침내 대학에 입학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노숙인들은 처음에는 돈 욕심에 책을 건성건성 읽고 독후감 발표를 했다. 서울 영등포에 있는 한 다방에 가면 삼 천원을 내면 차 한잔을 마시며 한겨울 추위를 피해 잠을 잘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이 놀랍도록 변화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누구도 자신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는데,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이가 생겼고, 그들의 말을 들어주면 신이 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노숙인들은 거의 혼자 우두커니 지냅니다. 외톨이로 사는 것이 버릇입니다. 그들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멍하니 있으면서 책을 읽을 생각조차 못합니다. 입도 굳어집니다. 비록 독서 장려금 삼 천원에 책을 읽기 시작했지만, 혼자의 삶에서 이웃과 더불어 사는 것을 배웁니다.”
부인도 옷가게 차려 거들어…참다운 사랑은 조건 없는 밥
서씨는 찜질방 입장 티켓도 한달에 300장가량 나눠준다. 고급 찜질방에서 할인해 구입한 것이다. 처음엔 노숙인들이 이 티켓을 제시해도 입장을 시키지 않았다. 냄새가 난다는 이유였다. 이제는 달라졌다. 쉼터에 있는 샤워시설을 이용해 발과 몸을 씻으니 냄새가 해결됐다. 지하상가에서 조그만 옷가게를 하는 서씨의 아내는 노숙인들을 위해 비교적 깨끗하고 말끔한 중고 옷을 무료로 노숙인에게 나눠준다.
민간 구호기관에 흔히 있는 후원회도 없다. 800여명의 후원인들은 대부분 5천원에서 1만원의 후원금을 자발적으로 낸다. 연말정산에 세금 혜택도 못 받지만 후원자들은 서씨를 믿고 후원금을 낸다.
“나눔이란 자기의 귀한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먹기는 싫고, 버리기는 아까운 것을 생색내고 싶어서 주는 것은 나눔이 아닙니다. 참다운 사랑은 조건이 없는 밥입니다. 민들레국수집 손님들에게 신앙을 강요하거나 어떤 조건도 달지 않고 밥을 내주는 이유입니다. 봉사에 조건을 달면 봉사가 아니거든요.” 최근 자신의 봉사 경험을 담은 에세이집 <하루하루가 기적입니다>(샘터 펴냄)를 출간한 서씨가 주변의 어려운 이들이 낸 후원금을 소중히 여기는 이유이다.
글·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