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자들에게 출가는 한마디로 삶의 큰 전환이라고 말했다. 무지에서 지혜로, 이기적 욕망에서 나눔으로 삶의 방향을 선택한 것이다. 지혜와 자비의 수레바퀴를 굴리며 가는 길에 마음의 평온과 화목한 세상이 열릴 것이다.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출가는 단순히 삶터의 공간적 이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삶의 가치와 생활방식의 근원적 전환이 없다면 출가는 눈물겹고 지엄한 ‘밥벌이’에서 도피한 것이다. 아무쪼록 착각해서는 안 된다. 그대들이 산사에 들어와 누리는 자유와 평온은, 숨 막히는 경쟁의 틈새에서 쌓인 피로감에서 일시적으로 해방된 느낌일 수 있겠다. 그러니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그대들이 살아온 세간이 만만하지 않았듯이 그대들이 살아갈 절집 또한 신천지도 별천지도 아니다. 이곳 역시 사람과 사람이 살아가는 삶터이기에 온갖 시비와 갈등이 존재하는 곳이다. 형색만 바뀌었다고 출가수행자가 아니다.
행자들의 앞날을 위하여 조선시대 서산대사의 말씀 한 구절을 들려주었다. “출가하여 수행자가 되는 일이 어찌 작은 일이랴. 몸의 편안함을 구하려는 것도 아니며,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으려는 것도 아니며, 명예와 재물을 구하려는 것도 아니다. 나고 죽음을 면하려는 것이고, 번뇌를 끊으려는 것이며, 부처님의 지혜를 얻으려는 것이며, 고통의 세계에서 중생을 건지려는 것이다.” 낭독하는 사이 내 마음이 숙연해지고 부끄러워진다. 거듭거듭 마음에 새겨야 할 서늘한 죽비 소리다.
가만히 살펴보니 이 말씀은 두 개의 얼개로 짜여 있다. 수행자의 길은 선택과 포기가 분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선택은 무엇인가? 번뇌의 소멸이며, 존재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일이며, 지혜의 증득이며, 세상사람들에게 쉼과 깸을 주는 일이다. 수행의 목적이다. 그런데 단순하지만 묘한 이치는, 이런 선택과 함께 반드시 포기해야 할 것이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자면 포기하지 않으면, 지고한 선택은 결코 선택되지 않고 탈락한다는 점이다. 무엇을 버릴 것인가? 돈과 재물로 일신의 안락을 구하고 권력과 명예로 과시적 존재감을 누리는 삶의 방식이다. 행자들에게 직설적으로 물었다. 그대들은 돈 많이 벌고 마음껏 소비하기 위해 출가했는가. 높은 직위에 오르기 위해 출가했는가. 모두가 한목소리로 답한다. “아닙니다. 결단코 아닙니다.” 그 장한 초발심에 마음 한켠이 든든했다.
싯다르타의 출가를 ‘위대한 포기’라고 한다. 어떤 선택에는 반드시 포기해야 할 필수항목이 있다. 이러한 이치가 어찌 출세간에만 해당하겠는가? 지금 나는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