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상중인 동자승. pixabay제공
헤아려 보니 산문에 들어온 지 어느덧 40년입니다. 십대 소년 시절에 만해의 시 〈알 수 없어요〉의 첫 문장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에서 그만 숨이 멎었고, 이어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든다’라는 경전 구절을 읽고 다시 숨을 내쉬었습니다. 어린 시절 출가한 이를 동진출가라고 일컫는데, 그렇게 동진출가의 인연을 맺었습니다.
출가 후 절집의 모든 것이 좋았습니다. 한낮의 고요를 넌지시 건드는 풍경소리, 먹기와 너머 푸른 하늘과 흰구름, 법당에서 풍기는 포름한 향내와 청아한 염불소리, 그리고 나의 생각을 흔들고 정신을 깨우는 경전의 말씀들…, 실로 값을 매길 수 없는 복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아름답고 무난한 풍경으로만 오지 않았습니다. 안팎으로 숱한 좌절과 고뇌를 만났습니다. 상식과 양심은 수시로 나를 찔렀습니다. 또 사회의 아픔과 호소에 눈길 주지 않고 산중 귀족이 되어 버린 절집에 깊은 자괴감을 누를 길 없었습니다. 어느덧 나 자신도 체념과 냉소, 자족과 안일의 타성에 젖어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출가 40년이 된 12월 초입, ‘땅에서 넘어진 자 땅에서 일어나라’고 했던 보조 국사의 일침을 떠올립니다. 상식과 양식을 가진 이는 부끄러움과 괴로움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문다면 이 또한 덫에 갇히는 일입니다. 끊임없이 성찰하고, 참회하고, 발원하고, 정신을 높이는 일이 수행자의 본분사입니다. 그리하여 출가할 때 나를 깨웠던 초발심을 다시 깨워봅니다. 나옹 선사의 발원문으로 나를 채찍질합니다. “원컨대 세세생생 지혜의 길에서 물러나지 않겠나이다.” 지혜의 길은 무엇입니까. 이치에 합당하고, 도덕과 윤리에 부합하고, 모든 생명의 안락에 동참하는 길입니다. 그 길을 선택하며 살겠다고 거듭 발원합니다. “내 이름을 듣는 이는 모든 고통 소멸하고 내 모습을 보는 이는 마음에 평안이 깃들기를 원합니다.” 이산교연 선사가 자신을 책려하는 다짐을 되새겨 봅니다.
세상에는 재주 많고 말 잘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갖은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분석하고 비평하고 지적하는 사람들, 또 좋은 말과 옳은 말을 하는 사람들이 넘쳐납니다. 종교인들은 거룩한 말을 잘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 그대로가 말이 되는 사람은 적습니다. 누가 보지 않아도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지금 여기에서 앎과 행이 일치하고 말과 행이 일치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빛이 되고 향기가 되는 수행자이기를 다짐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함께하는 삶’을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한 치 의심 없이 깨달은 이치는 ‘내 곁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 곁에 있는 자연의 기운과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의 수고로움으로 매 순간 내가 숨 쉬고 있습니다. 그러니 함께하는 삶은 엄숙한 필연입니다. “모진 질병 돌 적에는 약풀 되어 치료하고 흉년 드는 세상에는 쌀이 되어 구제하되 여러 중생 이익한 일 한 가진들 빼오리까?” 이산교연 선사의 발원입니다. 12월, 깊은 침묵 속에서 큰 울림을 듣습니다.
법인스님(해남 일지암 암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