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교에 입학해 철자도 모르면서 먼저 익힌 라틴어가 있다. “쌍투스”, 말 그대로 거룩하다는 뜻이지만 그 공간에서만은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다. 파리한 얼굴로 기도에만 열중하고 혼자만 거룩하며 과하게 진지해 농담 섞기 어려운 동료를 빗대 부른 말이다. 생각해보면 이런 현상의 이면에는 두 가지의 무의식이 있었던 것 같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부응해야 한다는 강박이 종교적인 문화를 진부한 무엇으로 느끼게 한 때문일 테고, 거룩함 같은 관념들이 이 질주하는 세상에 실제로도 한없이 무기력해 보였기 때문일 게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난 한 번도 그런 놀림을 받지 않았다. 그런데 살다 보니 나도 유별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물론 운동권 신부란 불온한 별칭으로 말이다. 다른 결이지만 격려와 응원, 선입견과 불편함 그 모두를 괄호 속에 묶어둔 것은 신학교 시절의 그것과 마찬가지다. 구태하고 낡아서, 또는 낯설고 거칠어서 둘 다 불편한 것이다.
예수를 추적하다 보면 인간의 습속인 경계 긋기가 보이지 않는다. 죄인과도 어울리던 호방함만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 같은 시간의 경계도 희미하다. 율법의 한 자 한 획도 빠짐없이 지키러 왔다는 완고함부터 성전을 모두 허물라는 파격까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 구태와 세련, 보수와 진보 모두 무색할 뿐이다. 이 종횡무진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당대 종교권력과 충돌하면서까지 그가 강조한 것은 다름 아닌 율법의 정신이다. 법이 본디 받들고자 했던 하느님과 인간을 기억하라는 말이다. 사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허물어져가는 낡은 세상도 도래할 낯선 세상도 아니었다. 다만 영원한 무엇, 사람이다. 그의 지상생활은 이미 새겨진 그것을 흔들어 깨우는 것뿐이었다.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이 왜 신의 시간인지 알게 되는 대목이다.
지난 몇 주간 광장을 메운 촛불은 득실을 따지던 정치적 셈법을 흩어놓고 반전을 꾀하던 권력마저 침묵시켰다. 탄핵소추안이 통과된 그날 누구나 그랬겠지만 내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세월호 가족들이었다. 누구는 이 정권이 탄생한 날부터 연이어 목숨을 끊던 노동자들이었다고 한다. 모두 그렇게 살과 피가 흐르는 사람이었다. 이 추악한 현실이 결코 부도덕한 소수에 의한 것도, 훼손된 제도나 절차 때문이 아니란 것도 광장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광장이 응시하고 있는 것은 사람이다. 새로운 인물도 정당도, 진보도 보수도 아닌, 그보다 앞서, 언제든 지켜내야 할 저 너머의 인간다운 세상이다. 그렇게 본다면 ‘인간’은 모두가 만날 수 있는 광장이고 가장 세속적이면서 가장 거룩한 성전인 것이다.
신이 인간의 시간 안에 스스로를 담았다. 33년 예수의 지상생활은 완결되었지만 여전히 이어지는 사건이기도 하다. 인간의 역사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낡았지만 언제나 새로운 인간, 이 영원을 포기하지 않을 때 우린 비참하지 않다. 그때만이 우리는 우리일 수 있다.
장동훈 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