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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슈바이처'여성숙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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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슈바이처'여성숙, 언론 최초 인터뷰


여성숙1-.jpg» `한국의 슈바이처'여성숙 선생



‘결핵 환우들의 99살 어머니’

여성숙 선생 첫 언론 인터뷰

 

신념도 사상도 내세우지 않았다

자신이 한 일 자료도 다 없앴다

 

돈 없고 오갈 데 없는 폐결핵 환자 등

평생 독신으로 살며 치료하고 돌봐

 

세상의 악과 싸우다 권력에 쫓기던 

김남주 윤한봉 윤영규 등도 숨겨줬다

 

재야인사도 유명인사도 아니었지만

그들에게 힘도 북돋아 줬다

결핵균 되지 말고 세상 살리라고

 

한국전쟁 때 의무대에 자원입대

국민방위군 젊은 이들 참상 보며

 

국가란 이름의 부패와 부조리 목격

죽어가는 생명 살리는 촛불 자임


목련처럼 수줍어하는 100세 소녀

하얀 목련 같았다. 저런 백목련이 끊어질 듯 토해내는 숨소리들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그처럼 가냘픈 여성이 어찌 울컥울컥 쏟아져 하얀 가운을 적시는 붉은 피를 받아낼 수 있었을까.

 오갈 데 없는 폐결핵 환자들을 어머니처럼 돌본 여성숙(99) 선생을 만났다. 그는 1988년 제1회 인도주의실천의사상과 오월어머니상 수상자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상을 거부할 만큼 자신을 내세우는 것을 꺼린 그가 2일 언론 인터뷰에 응했다. 그의 생애 최초다. 결핵환자들의 메카였던 전남 무안군 삼향읍 왕산리 한산촌에서다. 결핵환자들이 사라진 뒤엔 현재의 디아코니아노인요양원이 들어선 곳이다. 이 요양원은 여 선생이 전 재산을 헌납해 설립한 개신교 여성수도자 단체인 디아코니아자매회가 운영하고 있다.

 여 선생은 우리 나이로 100살이지만 수줍음 타는 10대 소녀였다. 그는 “이런것(인터뷰)을 처음 해봐서 떨린다”고 겨우 입을 열었다. 그에게 ‘왜 평생 봉사했느냐’고 물었다. 그는 “다른 재주가 없어서”라고 했다. 그리고 “좋아서”라고 했다. 자신의 삶이 거창할 것 하나 없다는 투였다. 1961년 목포 시내에서 목포의원을 하던 그는 한 10대 소년이 병이 심한데도 오갈 데도 없는 것을 보고 자기 방에서 돌보기 시작했다. 당시 폐병은 공기로 전염돼 패가망신한다 하여 가족들에게조차 버림받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여선생은 처음 간호사였던 동생이 그 소년을 한산촌에서 돌보게 했다. 그렇게 폐결핵 환자들 한명 두명 돌본 것이 한산촌의 시작이 됐다.


한산촌1-.jpg한산촌2.jpg한산촌3-.jpg한산촌4-.jpg

한산촌 교회와 예배당 내부, 디아코니아노인요양원의 노인들, 한산촌 전경



마스크도 쓰지않고 폐병환자들을 가깝게 마주보고 치료한 의사

 1980년 간호사로 한산촌에 왔던 디아코니아자매회 이영숙(67) 전 원장은 “선생님이 마스크도 쓰지 않고 중환자들을 진료하고, 10분이고 20분이고 말을 다 들어주는 것을 보고 너무나 놀랐다”고 했다. 의사를 만나본 적도 없고, 의사는 커녕 일반인들도마주 대하기를 꺼려해 환자들은 여선생만 만나면 모든 하소연을 다 털어놓곤했는데, 여선생은 이를 다 들어주었다는 것이다. 1977년 결핵에 걸려 한산촌에 들어가 1년 반을 머문 홍성담(62) 화백은 “박정희 정권이 경제개발을 명목으로 일본에서 받아들인 공해산업이 들어온 마산, 인천, 청계천 등에서 폐병에 걸려 온 젊은이들이 많았다”고 했다. 신안의 섬출신인 홍화백은 함께 당시 국민학교를 졸업한 동창 34명 중 중학교에 진학한 친구는 3명 뿐이고, 나머지 대부분은 마산수출자유지역이나 인천지역 공단이나 청계천 같은 곳으로 일하러가 갔다”며 “유신시대 경제개발이란 일본의 공해산업을 다 받아들인 것이어서 그 때 청년들이 그 열악한 곳에서 동생들의 학비와 부모들의 약값과 생계비를 벌기 위해 애쓰다가 폐결핵이 많이 걸려 들어왔다”고 했다. 그는 “한산촌에서 저녁에 회진을 도는 선생님을 모든 환자들이 어미 닭을 따르는 병아리들처럼 졸졸 따라다녔다”고 회고했다.

 여 선생은 국정을 농단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서만은 수줍음을 거두고 말했다. “젊은이들이 죽는데도 그렇게 태평하더니 지금은 말이 많네. 욕심이 꽉 찼어. 그렇게 사는 것도 사는 건가.”


여50대-.jpg» 여성숙 선생이 50대 때 모습(맨 오른쪽). 섬으로 무의촌의료봉사를 가면서 배위에서 찍은 사진으로 최근 옛지인이 보내온 것이다.


누구도 차별하지않고 가장 어렵고 힘든 환자를 우선시

여성숙 선생처럼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고도,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한 이도 드물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한 자료까지 다 없애버릴 만큼 그는 철저히 자신을 무화했다. 

 그는 치료비도 없고 오갈 데도 없는 무의탁환자가 대부분이던 한산촌 환자를 돌보기 위해 낮에 목포 시내 목포의원에서 일하고, 주중의 밤과 주말에 시내에서 10여㎞ 떨어진 한산촌에 와 환자들을 돌봤다. 처음엔 토담집 한채로 시작됐다. 갈 곳 없는 폐결핵 환자들이 늘면서 토담집을 짓고 또 지어야 했다. 나중엔 환자 50~60명이 모여들어 대규모 수용소가 됐다. 한산촌은 당시만도 외진 곳이어서 수도조차 없어 우물을 길러다 밥을 해먹었다. 여선생이 시내에서 벌고, 지인들로부터 후원을 받았지만, 그 많은 식구들을 먹이고, 연탄을 사 난방을 하고, 치료약을 사서 치료해주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토담집엔 인근 군부대에서 버린 철제침대를 두개씩 들여다놓고, 방엔 연탄을 땠다. 환자가 모여들어 나중엔 철제 침대 아래로 들어가서 자야하는 환자들도 생겨났다.

 한산촌엔 인근 1천여개 섬에서 무료로 치료받기 위해 찾아오는 환자들로도 문전성시를 이뤘다. 이영숙 언님(언니의 높임으로, 개신교 독신수도자들을 일컬음)은 “선생님이 몸도 아프고 녹초가 되어 ‘제발 오늘은 쉬셔야 한다’고 권해도 ‘그 먼 섬에서 배 타고 여기까지 오는데 어떻게 그냥 보낼 수 있느냐’면서 자기 몸이 부서질 때까지 환자를 돌봤다”고 회고했다.

 여선생에겐 진료 순서 등의 민원이 일체 통하지않았다. 여선생은 누가 부탁해도 그를 우선시하는 법이 없었다. 누구에게나 차별이 없이 평등하게 대했다. 오히려 섬에서 오거나 형편이 어려운 환자를 우선시했다. 


여성숙과언님-.jpg» 여성숙 선생이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농단에 대해 얘기하던중 이영숙 언님을 잡아당기며 "사람이란 이렇게 욕심이 없어야 되는데"라며 웃고 있다.



환자들이 집에 돌아서 가족생계 때문에 못돌아오자 가족 생계까지 돌봐

한산촌 환자들 가운데는 좀 나아지는듯 싶어 집에 돌아간 이들이 있었다. 여 선생은 아직 균이 그대로 있으니 곧 돌아와야한다고 했지만, 집에 간 환자들은 가족들이 생계를 잇지못하고 자녀들이 학교에도 가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 형편을 보고는 곧바로 일터로 나가곤 했다. 그러면 가족들과 일터 동료들도 감염이 되는 일이 허다했다. 이를 보다 못한 여선생은 한산촌 환자들의 가족들의 생계까지 걱정해야했다. 학비 조달에 어려움을 겪는 환자 자녀들에게는 몰래 학비를 대줬다. 그런 여선생의 뜻을 이어 디아코니아자매회가 지금따 고교 졸업때까지 27명의 학비를 대주고 있다. 디아코니아자매회의 언님들은 많을 때는 12명이 있었고, 지금은 8명이 남아있다. 여선생의 삶을 가장 잘 아는 이들도 그의 삶을 본받아 환자들을 먹이고 치료하기 위해 몸이 부서려라 헌신했다. 그들에게는 기도나 수도를 통해 들은 음성이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에서 버림 받고 죽어가는 환자들의 호소와 눈망울을 하느님의 소리와 눈으로 보았다. 한산촌에서 나간 젊은이들 가운데 4명은 공부를 해 의사가 되었다. 그 중 두명은 학업을 계속할 형편이 안되자 여 선생이 학비를 대주어 공부하게 했다. 그들도 여선생의 뜻을 이어 남다른 인도주의적 의술을 펼쳤다.


여언님목사조현-.jpg» 여성숙 선생 뒤로 김경재 목사, 이영숙 언님, 조현 기자. 김경재 목사는 여성숙 선생의 평생의 동지였던 안병무 박사의 후배로 한신대에서 20년간 함께 지냈다.


함석헌·안병무·황석영·김지하도 단골

 그처럼 많은 환자를 치료하고서도 여선생은 가진 것이 없다. 한산촌의 땅도 디아코니아자매회에 헌납해 무소유가 된 지 오래다. 평생 독신으로 살아왔으니 자손도 없다. 그가 없는 것은 그뿐이 아니다. 그는 일체 신념이나 사상을 내세우지도 않는다. 이날 인터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가 보통의 의사들과 다른 점이 발견된다. 그는 몸의 병만 치료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전태일이 분신했던 청계천 피복공장이나 공해산업 현장의 먼지 구덩이에서 결핵에 걸려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젊은이들을 살리려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았다. 1970년대 말 한산촌에서 치료했던 홍성담 화백은 “내 무릎에 피를 토하고 절명한 젊은이만도 두 명이었는데 봄이면 붉은 피처럼 진달래가 지천에 핀 한산촌은 불쌍한 환자들이 스러져가는 곳이었지만, 여 선생의 헌신과 아름다운 자연으로 지상 낙원처럼 회상되는 곳이기도 하다”며 “여 선생은 ‘너희가 살아나면 무엇을 하고 살 것이냐. 제 욕심만 채우려 사람들을 비참하게 내모는 결핵균이 될 것이냐, 세상을 살리는 이가 될 것이냐’고 묻곤 해 사회에 나가 남다른 삶을 살게 했다”고 말했다.

 여 선생이 세상의 악과 싸우는 이들을 숨겨준 것도 남다르다. 홍 화백이 공안당국에 쫓기던 김남주 시인과 후에 광주항쟁 주모자로 수배돼 미국에 망명한 윤한봉을 만난 곳도 한산촌이었다고 한다. 여 선생은 유신시대와 광주항쟁 때의 수배자와 윤영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초대위원장도 숨겨줬다. 수배자들은 현재 요양원이 있는 돌산 반대편 더 외진 곳에 중증 환자들만을 수용해 외부인들이 출입을 일절 꺼리던 곳에 숨겼다. 여 선생과 언님들만 알고 있었고, 환자들도 수배자들이 환자인줄로만 알았다. 

 여선생은 70년대 후반 수도권에서 갈곳없는 결핵환자들을 돌보기 위해 경기도 양평에 요양소 설립을 추진했다. 폐결핵요양소와 디아코니아자매회를 동시에 할 생각이었다. 그의 평생 지음이었던 민중신학자 안병무 박사와 함께 도모한 일이었다. 부지에 돌집들까지 지었다. 그런데 공안당국에서 혐오시설이 이곳에 들어오려한다며 주민들을 추동해 결국 그 꿈이 무산되고 말았다. 그 때 여 선생도 적지않게 좌절했다.

 한산촌엔 안병무 뿐 아니라 유신시대 재야의 지도자인 함석헌, 소설가 황석영, 시인 김지하도 이곳에 단골로 머물다 가곤 했다. 홍 화백은 “한산촌엔 그런 지식인들이 보던 책들이 한권 두권 쌓여 멋진 도서관을 갖게 됐는데, 그런 인물들을 만나고 명저를 보면서 병뿐 아니라 세상을 고칠 꿈을 품는 곳이었다”고 회고했다.

 지금도 여선생의 생일이면 한산촌을 거쳐간 사람들이 사발통문을 띄워 한산촌에 모여 파티를 한다. 그 때 여선생이 자신이 애독하는 책 한권을 나눠준다. 그가 즐겨 나눠주는 책이 헤르만헤세의 <싯다르타>다. 그는 ‘왜 <싯다르타>냐’고 묻자, “싯다르타는 자기 욕심이라는게 없고, 인간답게 살아볼려고 애쓴 사람 아니냐”고 했다.


목포에 의원하며 무안에 한산촌 문열어

 여 선생은 분명히 투사가 아니었다. 재야인사도 아니었다. 유명인사는 더욱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를 품었고, 그들이 세상에 나가 세상을 변혁시킬 힘을 주었다. 그런 삶은 어떻게 태동된 것일까.

 그는 황해도 태생이다. 소학교 4학년에 학업을 중단했다. 18살 때 결혼시키려던 집을 나와 원산 마르다신학원에 입학했고, 이어 일본여학교를 거쳐 29살 늦깎이로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고려대 의대 전신)에 들어가 1950년 5월 졸업했다. 그 직후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그해 11월 중국군이 개입하자 정부는 국민방위군법을 만들어 제2국민병역 해당자인 만 17살 이상 40살 미만의 남자 50여만명을 51개 교육연대에 분산수용해 국민방위군을 편성하고, 우익단체인 대한청년단으로 하여금 통솔케 했다. 그때 자원입대해 의무대 대위로 대구에서 근무할 때 본 참상이 그의 삶을 뒤흔들었다. 여 선생은 인터뷰 내내 이를 여러 번 언급했다.

 “병력을 보강한다고 젊은이들을 길거리에서 다 잡아다 놓고는 온종일 한 주먹밖에 안 되는 좁쌀밥 두 개만 줬어. 젊은 아이들이 그걸 먹고 어떻게 견뎌. 한겨울인데 덮을 것도 입을 것도 없어 지푸라기를 깔고 잤지. 못 먹고 병들어 죽어가는데 치료할 약 한 톨이 없었어. 의사는 왜 데려다 놨는지 몰라. 방에 가보면 젊은이들이 매일 죽어나가고, 옆 사람 발가락 좀 제 입에서 꺼내달라고 해. 그거 꺼낼 힘도 없는 거야. 그렇게 젊은 아이들이 다 죽어가는데, 그곳에서도 윗사람들은 고깃국에다 하얀 쌀밥을 넘치게 먹데. 얼마나 미웠는지 몰라. 나중엔 청년들을 총살했다고 들었어. 전쟁에만 죽은게 아니라, 그렇게 생떼같은 아이들을 많이 죽였어.”

 그때 그가 본 것은 참상만이 아니었다. 국가란 이름의 허울과 부패와 부조리를 보았다. 미처 꽃도 못 피우고 지는 청춘들을 너무 많이 본 그는 그 이후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태우는 촛불이 되었다. 50년대 전주예수병원과 광주기독교병원 결핵과장으로 있으면서 전북 순창 가막골에 평심원을, 광주 무등산에 송등원 등 결핵요양소를 만들어 무의탁환자들을 손수 돌보다 1961년 목포의원을 하면서 한산촌을 연 것이다. 그는 애초 한센병 환자들을 돌볼 생각이었다고 한다.


두언님과 요양원1-.jpg» 결핵환자가 줄며 노인요양원으로 변모한 요양원를 배경으로 선 디아코니아자매회의 두언님


목포에 의원하며 무안에 한산촌 문열어

 여 선생은 분명히 투사가 아니었다. 재야인사도 아니었다. 유명인사는 더욱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를 품었고, 그들이 세상에 나가 세상을 변혁시킬 힘을 주었다. 그런 삶은 어떻게 태동된 것일까.

 그는 황해도 태생이다. 소학교 4학년에 학업을 중단했다. 18살 때 결혼시키려던 집을 나와 원산 마르다신학원에 입학했고, 이어 일본여학교를 거쳐 29살 늦깎이로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고려대 의대 전신)에 들어가 1950년 5월 졸업했다. 그 직후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그해 11월 중국군이 개입하자 정부는 국민방위군법을 만들어 제2국민병역 해당자인 만 17살 이상 40살 미만의 남자 50여만명을 51개 교육연대에 분산수용해 국민방위군을 편성하고, 우익단체인 대한청년단으로 하여금 통솔케 했다. 그때 자원입대해 의무대 대위로 대구에서 근무할 때 본 참상이 그의 삶을 뒤흔들었다. 여 선생은 인터뷰 내내 이를 여러 번 언급했다.

 “병력을 보강한다고 젊은이들을 길거리에서 다 잡아다 놓고는 온종일 한 주먹밖에 안 되는 좁쌀밥 두 개만 줬어. 젊은 아이들이 그걸 먹고 어떻게 견뎌. 한겨울인데 덮을 것도 입을 것도 없어 지푸라기를 깔고 잤지. 못 먹고 병들어 죽어가는데 치료할 약 한 톨이 없었어. 의사는 왜 데려다 놨는지 몰라. 방에 가보면 젊은이들이 매일 죽어나가고, 옆 사람 발가락 좀 제 입에서 꺼내달라고 해. 그거 꺼낼 힘도 없는 거야. 그렇게 젊은 아이들이 다 죽어가는데, 그곳에서도 윗사람들은 고깃국에다 하얀 쌀밥을 넘치게 먹데. 얼마나 미웠는지 몰라. 나중엔 청년들을 총살했다고 들었어. 전쟁에만 죽은게 아니라, 그렇게 생떼같은 아이들을 많이 죽였어.”

 그때 그가 본 것은 참상만이 아니었다. 국가란 이름의 허울과 부패와 부조리를 보았다. 미처 꽃도 못 피우고 지는 청춘들을 너무 많이 본 그는 그 이후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태우는 촛불이 되었다. 50년대 전주예수병원과 광주기독교병원 결핵과장으로 있으면서 전북 순창 가막골에 평심원을, 광주 무등산에 송등원 등 결핵요양소를 만들어 무의탁환자들을 손수 돌보다 1961년 목포의원을 하면서 한산촌을 연 것이다. 그는 애초 한센병 환자들을 돌볼 생각이었다고 한다.


어머니 판액-.jpg» 디아코니아노인요양원에 걸린 목판. 여선생을 어머니로 여겼던 결핵환자들의 마음을 담은 것 같다.


전도보다 환자 우선인 전도부인에 감명

 “한센병 환자들 수용소였던 애양원에 가서 한 달간 돌보고 와 결핵환자들을 봤지. 그런데 한센병 환자들은 썩어나간 팔에 호미라도 묶고 호미질도 하며 농사라도 짓더구먼. 피부감염만 안 되면 되니 수용소에 사람들도 드나들었어. 그런데 결핵환자들은 숨이 차서 아무 일도 못했어. 또 공기에 감염되니 가족들조차 쫓아내고 수용소에 아무도 들어가려고도 안 해서 아무도 돌보는 사람도 없고, 치료해주는 사람도 없어 꼼짝없이 죽게 생겼어. 그러니 그들에게 간 것이지.”

 여 선생은 재야에 나선 것은 아니지만, 살아있는 현대사다. 한산촌을 거쳐간 인물들의 면면이 이를 말해준다. 디아코니아자매회가 지금까지 ‘수도’하는 것이 아니라, 약자들의 갈급 속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게 하고 가르침을 준 아버지가 안병무였다면, 여성숙은 삶 그 자체로 민중을 품에 안고 살아온 어머니였다. 그에게 살면서 가장 인상 깊은 인물이 누구였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그가 말한 이는 숱한 유명인사가 아니었다.

 “기독병원에 있을 때 한 전도부인이 있었어. 이름이 전도부인이지, 전도 이야기는 한마디도 안 했어. 환자방에 성경도 찬송가책도 안 가지고 들어갔어. 환자 얘기를 어떻게 잘 들어줄까. 환자가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그것만 보고 제일 아픈 사람, 지금 곧 죽어가는 사람만 찾아다녔어. 먹을 것을 몰래 숨겨가지고 먹여주고, 내가 뭐 좋은 일을 한다는 생각조차 없었지. 아, 나도 저이처럼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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