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울 속의 또 다른 나
언제부턴가 왼쪽 어깨가 뻐근하고 움직임이 영 신통치 않다. ‘육십견’이란 말도 쓰일까? 암튼, 컴퓨터 앞에서 오랫동안 자라처럼 목을 늘어 빼고 앉아 있다가 생긴 거여서 간단한 운동으로 부드러워질 수 있다는데, 본디 게으르고 몸 추스르는 일에는 더욱 무심한 편이어서 그냥 투덜거리며 견디고 있다. 그러는 중, 오늘 아침 세수를 하다가 묵직한 왼팔을 들어 올렸는데, 어럽쇼, 거울 속 꺼벙한 꼰대는 오른팔을 들고 있었다.
“어라, 요것 보소!” 고개를 갸웃거리며 거듭 팔을 바꿔 들어봤다. “이게 그냥 당연한 건가? 아니, 세상에 이 나이 들 때까지 이걸 모르고 살았단 말인가! 거울이라! 이거 참 묘한 물건이로고!” 요담에 만나는 사람들에게 물어볼 셈이다. 거울 앞에 서서 오른쪽 눈을 꿈쩍이면 그림자는 왼쪽 눈을 꿈쩍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느냐고.
어릴 적 내 살던 마을 한 청년이 장가드는 날이었다. 온 동네에 부침개 냄새가 진동하고, 새각시 집에서 소달구지에 실려 온 장롱이 시끌벅적한 잔치 마당 한쪽에 놓여 있었다. 사람들 발길에 이리저리 쫓기던 장닭 한 마리가 장롱 거울 속에 담긴 제 모습에 한껏 깃을 세우고 대들기 시작했다. 발톱으로 할퀴고, 부리로 찍고 한참 난장을 치다가 누군가 집어던진 고무신짝에 화들짝 놀라 달아나고 사람들이 박장대소를 해댔다. “저놈에 닭대가리 허고는!”
» 왼눈 오른눈이 뒤빠낀 거울 속의 나» 넌 누구냐?
옆방 도반에게 물었다. “근데 말야, 이 세상에 거울이 없다면 어떨까?” 답 왈 “웅덩이 물에라도 비춰보겠지 뭐. 암튼 좀 조신하고 겸손해지지 않을까?” 내 생각엔 오히려 그 반대로 가지 않을까 싶지만, “다른 이의 뺨에 묻은 검댕을 보고 자기 얼굴을 다시 씻을 수도 있고, 이웃의 밉살스런 행동거지를 스승 삼아 제 몸을 챙기겠지”라는 말에 굳이 토를 달지는 않았다. 그래도 여전히 내 입속에서는 “에헤이, 그럼 그게 천국인데 극락정토는 왜 찾아? 그게 곧 제대로 작동하는 마음속 거울인데”라는 말이 꼬물거렸다.
거울 속 그림자를 보고 좌우에 헛갈린 늙은 중이나, 잔뜩 목털을 세우고 장롱 거울을 향해 내닫던 장닭도,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젤로 이쁜 게 누구지?”라고 묻는 마녀도 실은 제가 보고 싶은 대로만 보려고 억지를 부리는 수십억 닭대가리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정녕 거울 속에서 보아야 할 것은 그토록 아끼고 챙기는 제 낯처럼 다른 이들의 얼굴과 삶 또한 무겁고, 중하다는 사실이다.
‘온 우주를 다 뒤져도 나보다 더 중한 것은 없더라. 다른 나들 또한 그렇거늘 네 싫은 것을 남들에게 주지 말라.’(말리카경)
재연스님(고창 선운사 불학승가대학 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