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환갑을 보냈습니다. 구순을 바라보는 노모 덕에 나는 아직도 나이 값을 못하고 있지만, 아니, 하지 않고 있지만 젊은 친구들 눈에는 영락없는 구닥다리일 겁니다. ‘언제 이렇게, 그 긴 세월이 다 지나가 버린 걸까.’ 구태의연하다 여겼던 이 말도 요즈음 너무나 실감이 납니다. 젊은 시절, 제자들로부터 회갑기념논문집을 헌정 받던 선생님들을 보면 ‘이제 세상이치를 두루 꿰어 달관하셨겠지’ 하고 부러워했건만, 그 나이에 이른 지금의 나를 돌아보면 ‘전혀 아니올시다’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마당 한켠에 수북이 쌓여 말라가는 낙엽들을 놓고 노모와 한바탕합니다. “거 보기 좋은데 그냥 두지 왜 자꾸 쓸어버리시는 거에요?” 노모는 아들 잔소리에 아무도 안 볼 때 구석에 있는 것들만 슬쩍 쓸어서 보이지 않게 시꺼먼 비닐봉투에 담아 대문 밖에 내어 놓습니다. 내 눈에는 정취 있는 낙엽이지만 당신에게는 치워버려야 할 쓰레기. 누구보다 가까운 모자지간이래도 서로 물러서기 힘든 한판승부입니다.
이 세상 삶이 이렇습니다. 모든 개체들 사이에 놓여있는 넘어설 수 없는 이 아마득한 ‘차이’. 그래도 낙엽을 두고 어머니와 아들은 서로 생각의 차이를 인정하고 한걸음씩 양보를 합니다. 하지만 요즈음 저 길거리를 덮고 있는 ‘탄핵반대’ 태극기 물결을 보며 노모와 나는 저들에 대해 아득한 거리감을, 그리고 도무지 그 거리를 좁힐 수 없는 이 현실에 절망감을 느낍니다.
이 세상 모든 개체들 사이의 ‘차이’는 좀처럼 넘어설 수 없지만, 그래도 이런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같이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저 태극기 흔드는 노인들처럼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지에는 도통 관심이 없고, 자신들과 생각이나 이익이 다른 이들을 무조건 종북 빨갱이로 몰아 전혀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들이 있어 세상은 늘 이리도 고통의 바다입니다.
매일 성당 미사에 나가는 노모는 하느님을 탓합니다.
“아니, 하느님, 세상을 왜 이리 놓아두십니까?”
“저 답답하고 무지한 노인들을 어찌 저리 놓아두십니까? ”
“제발 저 사람들을 좀 깨우쳐 주세요.”
하지만 사실 노모가 매일 미사 때마다 기도를 바치는 상대인 예수님도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다가 ‘이 세상에 의해’ 붙잡혀 매 맞고 꼼짝없이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그러니 우리 어머니의 하느님은 저 높은 하늘에서 무소불위의 전지전능한 ‘힘’으로 이 세상을 평정하고 다스리는, 절대군주 같은 ‘분’이 아니신 건 분명합니다.
<주역>에는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도(道)는 “백성들이 일상에서 늘 쓰고 있음에도 제가 그러고 있는 걸 알지 못하고 (百姓日用而不知; 백성일용이부지), 도(道)는 ‘어짊, 자비, 사랑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세상의 작용 안에 숨어 있다(懸諸仁 藏諸用; 현제인 장제용).”
이 구절에 나오는 ‘도’(道)를 불교의 ‘공’ (空)이나 부처, 기독교의 ‘하느님’으로 바꾸어도 뜻은 그대로 통합니다. 부처님, 하느님은 어디 먼 서방정토나 하늘나라에서 우리와 다른 어떤 ‘존재’, ‘실체’로 계시는 게 아니고, 늘 우리 곁에 우리 안에 ‘힘’이 아니라 자비, 사랑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시고,
세상의 모든 작용 안에 숨어 계신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어린 백성’인 우리는 이걸 모르니 그저 딱할 따름입니다.
금강경에서도 ‘만일 여래(如來) 부처님을 색(色), 즉 어떤 ‘모습’으로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 들으려 한다면 그건 잘못된 길이요 결코 여래를 볼 수 없으리라’고 가르칩니다. 구 상(具 常) 시인은 이 가르침을 깨닫고 <말씀의 실상>이란 시에서 이리 노래했습니다.
“영혼의 눈에 끼었던/ 無明(무명)의 백태가 벗겨지며/ 나를 에워싼 萬有一切(만유일체)가/ 말씀임을 깨닫습니다. 노상 무심히 보아오던/ 손가락이 열 개인 것도/ 異蹟(이적)에나 접하듯/ 새삼 놀라웁고 창밖 울타리 한구석/ 새로 피는 개나리 꽃도/ 復活(부활)의 示範(시범)을 보듯/ 사뭇 황홀합니다
蒼蒼(창창)한 宇宙(우주), 虛漠(허막)의 바다에/ 모래알보다도 작은 내가/ 말씀의 신령한 그 은혜로/ 이렇게 오물거리고 있음을 상상도 아니요, 象徵(상징)도 아닌/ 實相(실상)으로 깨닫습니다.”
그렇습니다. 마당의 낙엽을 두고도 노모와 나는 차이를 절감합니다. 이 세상 모든 개체의 숙명입니다. 하지만 그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를 보듬어 안는 게 어짊이요 자비요 사랑이라. 이는 바로 도(道), 부처님, 하느님의 모습 드러내심이니 ‘懸諸仁(현제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손가락이 열 개인 것도 기적이요, 이 창창한 우주, 허막의 바다에서 모래알 보다 작은 내가 오물거리고 있슴도 도(道), 그 분의 은혜요 작용이니 ‘藏諸用(장제용)’입니다.
<공동선> 발행인 김형태 변호사
이글은 <공동선 2017. 1,2 월호>에 게재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