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antcast
Channel: 한겨레 수행·치유 전문 웹진 - 휴심정
Viewing all articles
Browse latest Browse all 3077

사랑의교회 사태로 본 목회자의 욕망

$
0
0

알고 보면 세속적인 목회자의 욕망
복음과상황 269호 커버스토리


‘목회자가 문제’인 시대다. 목회자가 교인들과 사회의 우환거리가 되어 인구에 회자되는 이 사태가 안타깝다. 그간 한국교회는 목회 세습, 재정 비리, 목회자의 윤리도덕적 일탈, 무리한 예배당 신축과 확장 공사, 그리고 목회자의 정치적 수구세력화 등으로 양식 있는 시민들의 지탄을 받아 왔다. 그런데 최근 상대적으로 모범적인 목회 승계로 신망을 받았던 사랑의교회가 내홍을 겪고 있다. 이번 사랑의교회 사태는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탄식과 비상한 영적 경성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사랑의교회 사태를 볼 때, 무엇보다 교회의 영적 건강도와 목회자의 영적 청렴결백, 무교병 같은 진실이라는 덕목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교회의 영적 건강도는 사회에 대한 교회의 선한 영향력을 지탱하는 결정적인 요소요, 목회자의 영적 청렴성과 진실은 영적 지도력의 축이다. 사랑의교회 담임목사의 논문 표절 문제는 한국교회와 사회에 대한 개신교회 전체의 리더십 쇠락을 초래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다. 담임목사 개인 문제에서 시작된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목회자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 사랑의교회와 한국교회 전체의 문제인 것이다. 사랑의교회 사태가 교회 내 파벌간의 권력투쟁적 양상으로 악화되지 않고 가장 신령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해결되기를 간구한다. 신속하고 철저하게 겸비하고 회개하는 사람들이 신령한 지도력을 얻고, 한국교회의 영적 건강도를 높여 주기를 기대한다. 

사랑의교회간판.jpg


지도력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

지도자의 지도력에 반발하는 구성원들이 무리지어 나타나는 현상은 리더십 누수에 기인한다. 성경과 일반 역사에서 지도력은 거센 반발 세력의 도전을 종종 받는다. 이는 어떤 토지 위에 하중이 무거운 건물을 지을 수 있을지 시험하는 일종의 토목공학적 슬럼프 실험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모세와 아론의 경우처럼 지도자의 죄악과 상관없이 고라, 다단, 아비람 등의 도전 세력이 나타나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지만, 다윗-솔로몬-르호보암 3대에 걸친 유다의 역사처럼 지도자의 죄가 누적되어 심판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반발과 도전 세력이 출현할 수도 있다. 성경은 지도력 위기 사태를 지혜롭게 수습하여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은 사례를 보여 주기도 하고, 지도력 위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쇠락의 길로 떨어진 실패 사례도 보여 준다.

다윗은 자신의 몰락을 저주하는 베냐민 지파의 두령 시므이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알고 저주를 참아냈다. 선지자 요나는 자신이 탄 배가 광풍에 타격당하여 침몰될 위기에 처하자, 그 사태가 자신의 죄악 때문임을 고백하고 광풍 이는 바다에 던져짐으로써 위기를 수습했다.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사도들은 이방인 선교 문제를 놓고 생긴 극심한 갈등을 마라톤 회의, 경청과 토론, 현장 보고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황금분할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이방 선교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보수파의 견해도 묵살하지 않고, 이방 선교사들의 중심 주장도 슬기롭게 받아들였다. 교회 분열 위기를 성령에 민감한 장로들의 겸손한 경청과 토론, 현실 분석과 하나님의 뜻 분별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극복했던 것이다.

반면 솔로몬은 에돔의 하닷, 북지파의 우두머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반란에서 하나님의 활동 동선을 포착하지 못했다. 이사야 당시의 예루살렘 궁중 권력가들과 유다 왕실은 쇄도하는 하나님의 심판 홍수를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앗수르 대홍수에 침수되고 말았다. 그 결과 유다 왕국은 국력의 3분의 1 정도를 상실했다. 히스기야 왕 시절의 유다는 최강 앗수르 제국과 전면 야외 기동전을 치르려고 철 병거를 사들이다가, 주전 701년 앗수르의 대 침략을 받아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은 후에야 간신히 나라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당시 유다 궁중 권력가들은 친애굽파와 친앗수르파로 나눠져 국력 누수가 심했고, 왕의 지도력이 쇠락한 틈에 유다 농민들에 대한 유다 지배층의 압제와 약탈이 만연했다. 이때부터 유다왕국은 멸망의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유다 왕실과 지배층이 영적 죽음의 잠에 빠져 영적 지도력을 상실했을 때, 앗수르라는 심판의 막대기로 타격당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 속 동선을 감지하거나 포착하는 데 실패한 공동체와 개인에게는 확실히 지도력 위기가 일어난다. 앞에서 본 것처럼 대개의 경우 리더십 위기에는 영적 위기가 내재해 있다. 사랑의교회 사태가 어떤 종류의 위기인지 예단하기 어렵지만, 리더십 위기 사태인 것만은 사실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번 사태를 통해 사랑의교회 영적 지도력의 견고성과 건강도, 그리고 사랑의교회 회중 전체의 영적 청렴도를 테스트하고 계시다는 점이다. 외견상으로는 담임목사의 논문 표절이라는 우발적 사건으로 보이지만 이번 사태는 그보다 더 중요한 영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사랑의교회가 한국교회의 미래를 책임질 만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을지, ‘강남’ 문화에 붙들린 동네 교회를 넘어 한국교회를 대표할 만한 공교회로 거듭나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하나님께서 측정하고 평가하고 계시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적국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그들의 죄악을 돌이키라는 예언자적 설교를 해야 할 선지자 요나가 번영의 항구 다시스로 줄행랑치자 하나님은 요나의 앞길을 막으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사랑의교회 사태를 통해 목회 행로를 급격하게 재조정하시고 재향도하시는 중일 수 있다. 더 나아가 사랑의교회뿐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를 향해, 번영제일주의 바알숭배신앙을 버리고 예언자적 사명의 길로 복귀하도록 촉구하시는 중일 수도 있다. 한국교회가 다시스 번영 항로가 아니라, 니느웨의 험난한 예언자적 소명으로 회항할 것을 명령하신 사건일 수 있는 것이다. 

교회십자가한겨레자료사진.jpg
*교회의 십자가 불빛.  한겨레 자료사진


예언자적 설교가 사라진 한국교회 

이사야 10:7 이하와 나훔서 등은 앗수르 제국과 그 수도였던 니느웨의 죄악을 통렬하게 지적했다. 포학, 독점, 배타적 자기주장, 멈추지 않는 약자 약탈과 정복, 무자비 등이 니느웨 거민들의 중심 죄악이었다. 하지만 선지자 요나는 그러한 니느웨를 향해 외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다시스로 가는 배의 삼등선실에서 영적 잠에 빠져 예언자적인 소명 항로를 크게 이탈하고 있었다. 요나가 영적 잠에 빠져 있을 때 다시스로 가는 배는 엄청난 광풍에 강타당하여 침몰 위기로 내몰렸다.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이 믿는 신들의 이름을 부르며 살려달라고 외치는 그 순간에도 요나는 잠자고 있었다. 

그때 자신의 불순종이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해 선상 공동체가 파멸 위기에 내몰린 것을 보고 요나는 영적 잠에서 깨어났다. 즉시 선상 공동체에게 자신의 죄와 허물을 고백한 후 자신을 광풍이 이는 바다 가운데 던져 풍랑을 잠재우라고 말하고, 스스로 바다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요나가 죽음의 광풍이 이는 바다 한가운데로 투신함으로써 풍랑이 이는 바다는 잔잔해졌고 선상 공동체는 다시 평화를 누렸다. 요나는 선상 공동체를 뒤흔든 광풍이 자신을 정조준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임을 감지하자마자 즉각 회개한 것이다. 하나님의 종 선지자가 자신의 시대를 향해 던지시는 하나님의 신탁을 선포하는 대신 다시스의 번영 항로로 가는 배를 타고 영적 잠에 빠져 있으면, 공동체는 격심한 풍랑을 만난다.

한국 사회의 중심 죄악도 니느웨 거민들의 죄악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니느웨 거민의 중심 죄악은 약자의 희생 위에 일군 번영을 소수의 강력한 정복자와 지배층이 독차지한 것이었다. “화 있을진저 피의 성이여 그 안에는 거짓이 가득하고 포악이 가득하며 탈취가 떠나지 아니하는도다”(나 3:1). 연약한 백성들과 약소국들을 쳐서 약탈하고 파멸시키는 자기 욕망의 극한 추구였다. 우리 시대의 주류 거민들은 약한 자들의 눈물과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무자비한 정복자처럼 활보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우리 시대의 중심 죄악을 지적하고 그것을 회개하도록 촉구하는 예언자적 사명에 충실해야 한다. 예언자적 설교는 불의한 강자들을 견제하고 비판하며 그들에 의해 압제당하는 연약한 사회 구성원들을 소생시키고 위로하는 설교다. 이런 예언자적 설교가 한국교회에서 사라져 버린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성령의 권능으로 고취된 참된 영성을 가진 목회자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미 3:7).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 앞에 사는 목회자가 희소해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주는 죄 사함의 권세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우리 시대의 중심 죄악으로부터 성도들을 구출하시려는 하나님의 열심에 붙들리게 된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참다운 구령 열정에 감화 감동된 목회자가 실종되어 버렸다. 

둘째, 자본주의적 물신 숭배 정신에 고취된 기업형 목회 사역이 예언자적 혁신과 쇄신 사역을 밀어내 버렸기 때문이다. 회중들은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신실하게 대언하는가를 보지 않고, 풍요와 번영의 능력으로 평가하게 되었다. 어쩌면 타락한 교인들이 목회자의 설교 변질에 상당한 책임이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셋째, 형식상의 신앙생활을 박해하지는 않지만 사실상 기독교 신앙을 위협하는 사회․정치․경제적 제 현상을 분석할 수 있는 영적 지각력이 흐려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과 교회 사이에 있어야 할 거룩한 긴장감이 사라졌다. 교회가 급격하게 세속화되자 성령께서 교회로부터 당신의 현존을 은닉하시거나 철수하신 것처럼 보인다. 거룩한 성령은 교회 안에, 목회자의 설교 언어 안에 갇히거나 유폐될 수 없는 초월의 영이시다. 한국교회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고 거룩한 성령을 근심케 하는 죄악을 즉시 돌이키지 않으면, 거룩한 진리의 영이신 성령은 한국교회로부터 당신의 현존을 철수해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대형교회예배모습.jpg
*대형교회의 예배모습


신앙 빙자한 종교 흥행사들과 이교도적인 신자들

한국 사회의 중심 죄악에 물든 사람들을 회개케 하는 예언자적 설교가 사라지고 한국교회가 한국 사회의 주류 가치인 풍요와 번영 숭배 풍조에 포획되는 사태가 벌어지는 지금, 어떻게 하면 한국교회 강단에 성령에 추동된 예언자적 설교가 다시 회복될 수 있을까? 

긴급한 선결 과제는 목회자의 급진적이고 철저한 회개와 쇄신이다. 돈이 많이 드는 일에 몰입한 교회일수록, 재정적 헌신을 많이 할 부유한 교인들에 대한 교회의 존중과 기대는 그만큼 비례해서 커진다. 이 과정에서 담임목회자는 회개와 각성을 부르짖는 설교보다는 고객만족용 설교, 대중추수주의적(大衆追隨主義的) 설교를 남발할 유혹에 시달린다. 목회자의 설교 변질은 타락한 세상 사람들이 거듭나지 않은 채 교회의 권력기관과 직분을 차지한 상황에서 벌어진다. 성령을 전혀 모르고 받지도 못한, 그야말로 세상과 짝한 ‘교인’들은 그들의 욕망을 부추기고 충족시키고 정당화하는 목회자의 설교를 선호하고 환영하는 것이다. 그들은 결국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의 더러운 욕망을 숭배하는 우상 숭배자인 셈이다. 그들은 '하나님이라는 이름'의 우상을 숭배하면서,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영적 교통을 전혀 맛보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 설교 강단의 변질과 타락은 회개와 죄 사함의 통과 의례 없이 하나님의 교회를 차지하여 왕 노릇하는 이교도적인 신자들에 의해 촉발된 점이 없지 않다. 

영적 혼미의 시대에 영적 분별력을 가진 사람들이 천연기념물처럼 희귀해진 오늘,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분명히 알아야 할 한 가지 진실은 회개와 쇄신을 요청하는 설교자가 하나님의 영에 가득 찬 예언자요 하나님으로부터 온 참 선지자라는 사실이다. “평안하다”고 외치며 ‘돈’과 ‘쾌락’을 추구하는 설교자들, 그리고 대중의 중심 죄악을 규탄하거나 전혀 애통해하지도 않는 설교자들은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는, 기독교를 빙자한 종교 흥행사들이다. 하나님에게 속한 설교자들은 하나님이 마음 쏟는 곳에 자신의 마음을 쏟는다. 하나님의 마음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던져져 사는 일 자체가 힘겨운 가장 연약하고 병든 사람들의 삶의 자리다. 가장 연약하고 병든 지체들에게 마음이 잇닿아 있는 상한 목자들이야말로 예언자적 설교자다. 예언자적 설교는 시대의 죄악은 규탄하지만, 그 시대의 중심 죄악 때문에 상하고 망가진 하나님의 어린 양을 돌보는 위로 넘치는 설교다. 곤핍한 자들을 도와주는 황금의 입과 혀, 십자가 핏빛 진심이 깃든 심장을 지닌 설교자를 통해 선포되는 설교다.

목회자의 세속군주적 욕망과 자아도취적 망상  

감화력 넘치는 예언자적 설교는 가장 연약한 교우의 삶의 자리를 주시하고 그를 돕고 사랑하려고 분투하는 과정에서 터져 나오는 말씀의 샘에 의존한다. 그러나 대형교회 담임목회자는 교회를 관리하고 경영하느라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을 응시하고 돌보는 목회 고유 업무에 정성을 바치기가 어려운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다. 심지어 기도와 말씀에 전력투구해야 할 담임목사가 건축 토목 등의 행정 일에 에너지를 소진한다면 영력의 현저한 쇠퇴가 일어나기 마련이다. 

사랑의교회가 대규모 예배당 신축프로젝트를 가동할 때, 주지하다시피 교회 안팎에서 많은 반대와 염려의 목소리들이 있었다. 사랑의교회뿐 아니라 예배당 건축하느라 큰 빚을 내고, 엄청난 빚에 시달리는 교회가 많다. 중소교회까지도 수천 명이 동시에 앉을 수 있는 예배당 신축에 열을 올린다. 이런 교회가 한두 군데가 아니다. 그 결과 교회 전체는 물론이요 빚을 내 헌금한 중심 교우들 대부분이 채무에 시달린다. 막대한 이자를 은행에 지불해야 하는 교회의 채무는 교인들의 헌금 의욕마저 꺾어 버린다. 선교와 구제에 바칠 하나님 자녀들의 헌금이 은행이나 고리대금업자의 뱃속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왜 이렇게 대형 예배당 프로젝트가 성황일까? 늘어나는 교인들을 수용할 시설을 확장하는 차원에서, 혹은 큰 예배당을 지어 놓으면 교인들이 몰려올 것이라는 공격적 경영 철학 때문이다. 편리한 주차 공간, 안락한 교회 문화 시설과 교육 시설이 교인들의 교회 선택을 좌우하는 현실을 겨냥한 결과다. 아울러 성령이 허락하시는 속도보다 더 급하게 교회 규모를 확장하려는 담임목회자와 당회의 과도한 열심과 야심의 결과다. 특히 한국교회 목회자들에게는 자신이나 자신의 교회를 크게 보이려는 그릇된 욕망이 있다. 자신을 하나님과 사람 앞에 대단한 사람으로 여기는 목회자일수록 대형 예배당 신축에 몰두한다. 큰 것은 작은 것들로부터 존경받고 대우받는다는 생각이 여기에 작동한다. 큰 교회를 숭배하는 목회자는 오도된 욕망때문에 자신을 큰 목사로, 즉 교황급 목사로 여기는 자아도취적인 증세를 보인다. 

성령을 알고 성령에 사로잡힌 목회자들은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록 자신의 욕망을 쉽게 부인할 수 있고, 자아가 작아지는 경험을 한다. 타인을 지배하고 조종하려는 권력 정치의 달인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몸과 마음을 하나님의 영에 맡겨버리는 순명과 순종만이 하나님을 아는 목회자의 특징이다. 목회자들이 대기업가들이나 정치 지도자들과 쉽게 친교하면서도 어떤 거리감이나 긴장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들을 그들과 동류의 지배자나 왕적 통치자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대형교회 건물, 불필요한 학위, 정치 경제 거물급과의 스스럼없는 친교와 어울림 등을 과시하는 것은, 교인들을 섬기려는 마음보다는 지배하고 통치하려는 세속군주적 욕망의 변형일 가능성이 크다. 실명을 부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엄청난 군중을 목회한다고 믿는 대형교회 목회자는 겸손하신 성령의 역사에 오랫동안 노출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성령은 거룩한 진리의 영이시며 지극히 인격적인 영이시기에,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군중을 모아놓고 목회한다고 주장하는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마음 안에는 거하실 공간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교황적 지배자 유형의 목회자들은 자신을 거대한 자장권을 만들어내는 거대한 지남철(磁石)로 생각한다. 자신이 발출하는 총체적 흡인력 때문에, 혹은 자신의 설교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의 교회로 몰려든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를 사(私)왕국화하여 자신의 아들이나 사위에게 당회장직을 세습한다. 목회자의 자아도취적 과대망상은 거룩하신 성령의 역사에 노출된 지 오래된 경우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거룩하신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목회자의 마음속에 내주하고 교통하면 목회자는 바람결처럼 가볍고 겸손하게 교회를 운영하며 섬긴다. 제왕의 권력을 휘두르는 교황 같은 위세를 드러내면서 군주처럼 행동할 수가 없다. 거룩하신 성령이 임한 목회자는 왕후장상이 노니는 고급 사교계나 클럽 출입에 치중하지 않고, 백골이 진토되어 나뒹구는 에스겔 마른 뼈들의 골짜기로 종횡하며 그 뼈들을 어떻게 되살릴 수 있을까를 궁리하고 질문한다.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겔 37:11)고 소리치는 영혼들을 보며 상한 목자의 심정으로 가득 차오른다. 굶은 지 사흘된 사람들이 행로에 기진할까 걱정하며 오병이어의 광야 식탁을 만드는 데 치중한다.  

사랑의교회예배모습.jpg
*사랑의교회 예배 모습. 


사랑의교회 사태는 하나님이 일으키신 위기

한국교회가 도덕적 윤리적 슬럼지대화되어 가는데도 왜 사람들은 교회로 몰려들까? 한국교회의 영적 무기력과 쇠락에 대한 절망보다는 자신들의 절망과 고통이 너무 커서 하나님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당회장의 설교, 목회자의 학식, 교회의 화려함이나 웅장함 때문에 사람들이 교회에 가는 것이 아니다. 죽임당한 어린 양 예수의 보혈이 왕 노릇하는 곳이 교회라고 믿기 때문이다. 교회의 진정한 부흥과 성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보혈 공로와, 그것을 개인의 심령 속에 매개하고 실재화하시는 성령의 종횡무진의 역사하심으로 가능하다. 그러니 모든 목회자는 성령의 역사에 자신의 몸과 마음을 내맡기기만 하면 된다. 기도와 찬양, 설교와 예배는 이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하심을 매개하고 중개할 뿐이다. 성령은 인간의 설교와 찬양 없이도 얼마든지 불신자의 마음을 거듭나게 하실 수 있다. 그러나 성령님은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순종, 전도의 미련한 사역을 통해 불신자의 마음에 연착륙하시기를 더욱 기뻐하신다. 교회는 어린 양 예수의 보혈만이 왕 노릇하는 보혈 공동체요, 그 보혈 공로를 바탕으로 중생과 성화의 사역을 부단히 일으키시는 성령의 활동 무대다.

사랑의교회 사태는 한국교회의 모든 문제를 집약적으로 보여 준다.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회개를 촉구하여야 할 예언자 요나의 불순종이 일으킨 풍파와 파란이다. 사랑의교회는 한국 사회에 회개의 메시지, 정의와 자비의 메시지를 힘 있게 선포할 예언자적 책무를 소홀히 하다가 풍랑을 만났다.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 가는 뱃길 삼등선실에서 잠자다가 만난 풍랑이다. 따라서 이 사태는 개교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교회가 남북 분단의 정국, 빈부격차와 양극화 심화, 청년 실업, 저출산과 고령화, 환경 파괴와 경제 정의 붕괴 등 시대의 중심 죄악을 회개하는 일에 앞장서기는커녕, 개교회 번영주의, 교회 확장주의, 세습주의 등에 몰두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일으키신 혼란이요 파란이요 리더십 위기다. 

우리는 사랑의교회 사태를 보며 우리 자신의 문제를 직시하고 비상한 각오로 겸비, 회개, 쇄신을 열망하여야 한다. 누구도 이 사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 모두 큰 것 숭배 풍조에 물들어 있고, 섬기기보다는 섬김받으려는 욕망에 시달리고 있지 않는가? 니느웨 항로보다는 다시스 항로를 선망하고, 회개와 자기 부인보다는 자기 정당화와 자기주장으로 완강해진 우리 자아를 어떻게 할 것인가? 

쇄신과 개혁의 영, 거룩한 성령이시여, 저희의 영적 잠을 깨워 주소서. 저희의 불순종과 영적 타락 때문에 일어나는 광풍을 직시하면서 그 광풍 속으로 뛰어드는 결단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니느웨 거민들의 죄악을 지적하고 회개케 하는 메시지를 증언할 용기와 패기를 허락하옵소서. 


김회권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서 공부했으며, ESF(한국기독대학인회)에서 회심하고 신앙 훈련을 받은 뒤 11년간 EST 간사로 섬겼다. 장신대 신대원을 나와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성서신학석사 및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하나님 나라 신학으로 읽는 모세오경 1, 2》 《김회권 목사의 청년설교》 《하나님 나라 신학으로 읽는 사도행전 1, 2》 등 다수가 있다. 


*이 글은 복음과상황(www.goscon.co.kr)에 실린 것입니다. 

Viewing all articles
Browse latest Browse all 3077

Trending Artic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