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가 무어냐고 물어라
올해는 1987년 민주화 운동 30주년을 맞습니다. 작년에 발생한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사태 이후 한국사회의 물줄기가 크게 바뀌고 있습니다. 촛불을 밝힌 시민의 참여와 연대의 힘은 역사의 퇴행을 막고 국민의 주권을 회복시키고 있습니다. ‘피플 파워, 시민의 힘’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고 거짓은 진실을 덮을 수 없다는 진리를 시민은 증명하고 있습니다.
언론을 통해서 연일 드러나는 국정 책임자의 부조를 보면서 민초들이 한숨 쉬며 묻습니다. “많이 배우고 가질 만큼 가진 사람들이 왜 저러냐?” 김기춘, 조윤선, 우병우, 안종범, 류철균, 최경희, 이재용…. 정말 그렇습니다. 이들은 좋은 가문 출신이고 최고의 학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머리를 가진 사람들이 상식 이하의 몹쓸 짓을 저질렀습니다. 상식적으로 이해 되지 않습니다. 곡학아세(曲學阿世)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새삼 실감합니다. 대통령의 정신세계와 교양은 애초에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와 함께 국정을 책임진 학자와 지식인들이 배웠다는 ‘공부’가 과연 어떤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그들은 왜 그 많은 공부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도 처음부터 이렇게 거짓되고 못된 짓을 하려고 작심하고 공부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과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요? 그들은 비록 많이 배웠지만 ‘잘 못 배운’ 것은 분명합니다.
이 시점에서, 시민은 반면교사의 입장에서 ‘공부’의 정의를 바로 세워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정명(正名)을 생각합니다. 개념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공자는 정치를 한다면 무엇을 가장 먼저 하겠느냐는 제자의 물음에 “반드시 개념을 바로 잡겠다(必也正名乎)”고 하였습니다. 개념이 중요한 이유는 말이 바로 서야 지향점이 왜곡되거나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같은 용어를 놓고도 저마다 각기 다르게 이해하고 해석합니다. 오천년 역사에서 고학력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우리 자신과 자녀들이 많이 배웠으나 잘 못 배우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기 위해서 ‘공부’의 개념을 바로 세워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가 “내가 이러려고 죽어라고 공부했나?”라는, 자괴심을 갖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중국 고전에는 공부에 대한 공부에 대한 개념과 목적을 곳곳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한 대목을 살펴보겠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옛날에 공부하던 사람들은 자신을 수양하기 위해서 배웠는데, 요즘에 공부하는 사람들은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배우는구나” 『논어』,「헌문」
자공이 물었다. “평생 실천할 만한 말 한마디가 있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아마도 서(恕)가 아닐까?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말거라” 『논어』,「위령공」
고전에 근거해보면 공부란, 사물과 세상살이의 모습을 살피고 이치를 궁구하여 마음을 바로 하고 연민과 사랑을 나누는 일입니다. 요약하자면 정신과 행실의 성장이고 성숙이 공부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명문 대학을 가기 위한 공부, 고시와 자격증을 따기 위한 공부, 취업하기 위해 하는 공부가 있을 뿐입니다. 오죽하면 “너는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맨 날 책만 보느냐”라는, 오는 부모의 말이 생겨나겠습니까?
곳곳에서 진실을 왜곡하고 세상을 호도하는 교묘한 ‘기술자’가 많은 세상입니다. 도덕과 윤리가 바로 서고, 참된 앎을 밝히고, 모두가 상생할 수 있는 방편을 개척하는 일이 공부이고 공부하는 사람이 나아갈 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시 공자의 말씀 한마디를 더합니다. “오직 어진 사람만이 남을 좋아할 수도 있고, 남을 미워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