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세 양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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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 도착하니 “제37주년 5.18 민중항쟁, 촛불로 잇는 5월, 다시 타오르는 민주주의”의 현수막이 옷깃을 여미게 했습니다. 구한말 양림동의 유림들이 개방적이었던 덕분에 선교사들을 통하여 지역문화가 발전하였고 뛰어난 문화예술인들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이 동네에 유진 벨 선교사에 뿌리를 둔 세 양림교회가 있습니다. 이름은 똑같지만 두 번(1953, 1961년) 분열하여 교단이 다릅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통합) 교회는 고색창연한 적벽돌 건물이고,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합동) 교회는 현대식 건축물이며,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교회는 언덕위에 성처럼 서 있습니다. 다행히 1997년 이후, 해마다 10월에 세 양림교회가 돌아가며 연합찬양예배를 드리고 세 목회자가 강단교류로 다른 교회에서 설교를 합니다. 또 봄가을에는 세 교회의 장년부 회원들이 함께 양림동 선교사 묘역과 주변을 청소하고 돌본다니, 분열의 상처를 딛고 공존하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예장통합 양림교회 곁에 역사적인 오웬기념각이 서 있는데, 의사이자 선교사였던 오웬이 세운 이곳에서 광주역사상 첫 번째로 거행된 문화행사들이 많았습니다. 오페라, 독창회, 연극이 처음으로 열린 곳이니 가히 광주 신문화의 발상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역사문화마을답게 보존된 두 고택(이장우, 최승효)에서 한옥의 아름다운 풍모를 본 후, 아기자기한 상점들과 미술관을 둘러보고, ‘광주의 어머니’ 조아라 여사의 기념관을 지나 호남신학대학 옆 동산에 오르니, 아름드리 상수리나무들이 서 있고 선교사묘원이 있었습니다. “당신들은 죽음으로써 살았습니다.”라는 글귀가 있는 이곳에 스물두 선교사들이 안식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은 교육, 의료, 사회봉사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과 5.18 민중항쟁의 증언이 되었답니다. 얼마 전 ‘조선의 테레사’로 불린 서서평(엘리자베스 셰핑) 선교사의 일생을 그린 영화 “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를 보며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학교(한일장신대의 전신)를 세우고, 여전도회를 창립하고, 대한간호협회를 창설하여 세계간호협회에 가입시킨 맹렬여성이었지만 묘지의 사진은 가냘프기 그지없었습니다. 1934년, 풍토병과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났을 때 남루한 침실에는 반쪽짜리 담요, 동전 몇 개와 강냉이 두 홉이 남아있었습니다. 얼마나 자신을 비우며 사랑으로 헌신하였던지 광주 최초로 시민장으로 거행된 장례식에 수많은 한센병자들과 가난한 이들이 서서평의 마지막 길을 애달파했다고 합니다. 동산묘원 옆 수피아여중고는 3.1운동과 여성운동의 본거지로서 광주학생운동 때에 무기휴교 당하였고, 신사참배반대운동으로 폐교당하는 등 민족의 고난에 동행하였습니다.
다시 양림동으로 들어가니 건물 벽에 ‘최후의 만찬-양림’이란 대리석 조각품이 보였습니다. 양림동이 낳은 대표적인 인물들을 재조명하려고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본 따서 만든 작품으로 역사적으로 기억해야 할 분들이었습니다. “빈민운동의 아버지”였던 최흥종 목사는 포사이드 선교사의 지극한 사랑에 감동받아 한센병자들의 친구이자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또 3.1운동 주도하여 옥살이를 하고 광주 YMCA와 여수 애양원, 소록도 자혜의원을 세우며 작은 예수로서 살았습니다. 조아라 여사는 수피아학교 시절 광주독립학생운동을 벌였고 광주 YWCA를 세워 섬기다가 5.18 만중항쟁의 수습대책위원으로 일한 것 때문에 옥살이도 하였는데, 군사정권 시절에 가장 안전했던 YWCA에서 회의가 잦았는데 거기서 뵌 적이 있습니다. 중국에서 항일투쟁하며 작곡활동하여 중국3대 음악가로 불리는 정율성 선생, 고독의 시인 김현승(아버지 김창국 목사는 양림교회 목사), 그리고 유진 벨, 서서평 등 선교사 등 열두 분이 예수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이분들은 아직도 한이 서린 광주에 대하여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떠나기 전 자동차로 무등산 자락을 둘러보았는데 무등산은 마치 어머니처럼 아픈 역사를 넉넉히 품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