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제應制라고 했던가. 임금이 신하에게 글을 의뢰하는 것을 말한다. 그처럼 이 책은 대부분 상전(?)들의 부탁으로 쓴글이다. 청탁받은 그날부터 전전긍긍이다.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마감이 가까워질 무렵 섬광처럼 ‘글 고리’가 스쳐 지나간다. 책을 읽다가 신문을 보다가 혹은 차를 마시다가 그것도 아니면 그냥 ‘멍때리다’가 번쩍하는 그 고리를 낚아채야한다. 이후 씨줄과 날줄이 얽히며 사이사이에 살이 붙는다. 탈고한 뒤 잠깐이나마 해탈의 경지를 맛보기도 한다. 글로 인하여 윤회輪廻를 반복한다고나 할까.
그런데 해가 갈수록 섬광의 횟수는 잦아들고 섬광을 기다리는 시간은 길어진다. 글 만드는 일은 시간이 흐를수록 버겁기만 하다. 이제 응제는 샘물 곁의 바가지가 아니라 긴 밧줄을 드리워야 하는 두레박이 되었다. 우물은 날로 깊어지고거기에 맞추어 두레박줄도 하루하루 그만큼 길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응제마저 없다면 우물물은 고사하고 샘물마저 퍼올릴 생각조차 않을 것이다. 응제 때마다 지나가는 혼잣말로 ‘절필’을 운운하다가도 한편으론 혹여 두레박줄 길이가 모자랄까 봐 새로 새끼줄을 꼬아서 곁에 감춰두곤 했다. 이런 자기모순이 서너 해만에 또 한 권의 소박한 책을 만든 바탕이 되었다.
글자 한 자가 점점이 모여 한 줄이 되고 한 줄이 줄줄이 모여 한 편의 글이 되고 편편의 글들이 모여 한 권의 책이 된다. 수많은 별들이 모여 은하계를 이루지만 내가 발 딛고 서있는 곳은 단 하나의 지구별일 뿐이다. 또 그 안에서 한 평의공간이면 충분하다. 좁쌀처럼 흩어놓은 많은 글 가운데 한편 아니 한 줄이라도 남들에게 공감을 일으키는 구절이 있다면 장강長江의 청량한 물 한 모금 역할은 할 터이다. 잡서雜書의 한 줄이 남들에게 한 줄기 섬광으로 이어진다면 때로는 경서經書나 사서史書 노릇을 대신할 수도 있겠다.
몇 년 만에 또다시 종로에서 도심 생활을 하고 있다. 산과 도시가 둘이 아닌 또 다른 의미에서 심리적 ‘선농일치禪農一致’의 삶이라는 과감한 해석을 달아야 했다. 옛사람들은 벼슬살이를 위해 고향 농촌을 떠나 시정市井으로 몸을 옮길 때 나름의 해소책을 마련해 두었다. 그림으로 산수를 대신하고 화분으로 동산과 정원을 대신하고 책으로 벗을 대신한다고 했다.
그래서 필자도 책상 정면에는 강렬한 원색의 동해 일출 사진을 배치하고 측면에는 흑백목판본 대동여지도 장백산 부분을 걸어두고서 선인들이 위로 삼아 하던 도회적 삶의 일부분을 흉내 낸다.
천만 명의 도시인은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덩달아 곁의 수도승首都僧까지 바빠진다. 망중한忙中閑이라고 했다. 다시금 한가한 시간의 귀함을 알게 된다. 그 와중에서 시비를 일삼는 얘기는 귀에 들리지 않으면서 독서할 시간이 있고 글을 쓸 여유가 있으니 이만하면 더 이상 바랄 것도 없겠다.
글을 응제토록 해준 신문잡지사의 선지식들께 두 손 모아 감사드린다.
2017년 6월 어느 날 우정국로 우거寓居에서 원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