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각산 진관사에서 집현전 학사들의 독서당을 만나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는 어느 명상시인의 시집제목처럼 절에 살면서도 절이 그리울 때가 있다. 도심의 절에 살면서 그 증세가 심해졌다. 살고있는 절은 근무지요 남의 절에서 머무는 템플스테이는 휴가지인 까닭이다. 하지만 살다보면 일하려 남의 절에 가는 경우도 더러 있다. 일하면서 동시에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뜻하지 않는 휴가가 된다. 이런 것을 일러 금상첨화라고 하는 모양이다. 잠자리는 편안했고 세 끼밥은 따뜻했다. 일하는 짬짬이 나오는 차와 간식은 작은 글자로 가득한 자료뭉치를 살피느라고 지쳐버린 침침한 눈을 달래주었고 의견불일치로 인하여 지끈지끈한 머리 속까지 개운하게 만들어 준다. 일한 양보다도 받은 대접이 훨씬 더 융숭한 까닭에 이구동성으로 출장이 아니라 휴가가 되었다고 입을 모았다.
삼경(밤 9시)을 훌쩍 넘기고서야 오늘 해야 할 몫을 대충 마쳤다. 길손을 위한 숙소 여러 채가 각각 규모와 위치와 높이를 달리하며 일렬을 이루었다. 가장 멀리 떨어진 채 숨어있는 객실로 갔다. 방 두칸이 마루방으로 연결된 작은 기와집이다. 여장을 풀고서 창문을 밀쳐 밖을 내다보니 가로등 불빛만이 마당에 가득하다. 하늘에는 장마구름이 걷히지 않아 별을 만날 수 없었고 앞을 가린 언덕산으로 인하여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잡 생각 일으키지 않고 잠을 청하기에는 그만이다. 성삼문(1418~1456)이 집현전 학사시절 세종에게 사가독서(賜暇讀書 유급의 독서휴가)의 명을 받고 이 절을 찾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위로는 반짝이는 별빛이 부딪히고(上磨明星熒) 아래로는 넓은 평야의 풍성함을 굽어보네(下瞰周原膴)”라는 시를 남겼다. 그 자리는 어디일까?
명산고찰의 창건에는 반드시 숨은 이야기가 전하기 마련이다. 고려 때 왕실의 골육상쟁으로 피신한 대량군(大良君)을 진관(津寬)대사가 숨겨 주었다. 뒷날 왕위에 올랐고 역사가는 현종(992~1031)으로 기록했다. 이후 왕실의 후원으로 이름조차 제대로 없던 토굴절(穴寺 굴을 판 후 입구는 지붕삼아 섶으로 얼기설기 덮어 비바람을 겨우 피하던 움막같은 절)은 제대로 규모를 갖추었고 그 인연으로 절이름도 진관사(津寬寺)로 바뀌었다. 이후 조선의 건국과 왕권을 다지는 과정에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한 왕실주관의 수륙재도 이 절에서 치루었다. 또 집현전 학사 여러 명이 단체로 휴가를 받아 글을 읽으려 올 만큼 명성과 사세를 유지했다.
» 50년간 진관사를 지키다 지난해 입적한 진관 스님
하지만 시절운세를 따라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것은 사찰이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다. 고려시대 토굴에서 시작한 절이 크게 번창하다가 임진란과 6.25를 거치며 다시 토굴로 바뀐 것이다. 휴전 후 십년이 흘렀지만 전쟁의 상흔이 그대로 남은 진관사(津寬寺) 자리에 젊은 비구니 진관(眞觀)스님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중심부 건물들은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고 가장자리에 손바닥 평수만한 전각 서너채가 전부였다고 한다. 폐사지나 다름 없었지만 그래도 인연터인지 동네이름까지 진관리(津寬里)였다. 비록 한문글자는 달랐지만 한글발음이 동일한 옛 진관스님과 현 진관스님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현 진관스님은 50년동안 이 가람을 가꾸었다. 어찌 환생이란 것이 따로 있겠는가. 작년(2016) 열반하실 무렵 장마철도 아닌데 큰비가 몇일동안 쉬지도 않고 계속 내린 기억까지 새롭다. 그 유지를 제자들이 한 치도 빈틈없이 잘 이어가고 있는 아름다운 절이다.
이틑날 수륙사(水陸祠)가 있던 자리로 갔다. 주춧돌과 몇 점의 유구가 남아있다. 일제강점기 양식의 탑은 온전했지만 제자리가 아닌지 생경하다. 언덕줄기에 올라서니 처마가 겹겹이 이어진 사찰전경이 삼각산 숲과 잘 어우러져 한 눈에 들어온다.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니 동구 밖에는 지방자치단체에서 의욕적으로 조성한 한옥마을이 보이고 그 뒤로 평야가 점점히 펼쳐진다. ‘넓은 평야의 풍성함을 굽어본다’는 성삼문의 글로 미루어 보건데 왕실행사 담당부서가 있던 이 자리의 객실에서 묵었던 모양이다. 함께 온 박팽년(1417~1456)은 ‘논마다 가득 채워진 물이 한강보다 더 넓고 많아 보인다’라고 맞장구를 치면서 벗의 글흥을 더욱 돋우었다.
서림진관사(西林津寬寺) 서쪽의 진관사로 숲을 삼았고
남압한강호(南壓漢江滸) 남쪽의 한강을 논물로써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