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명절이네요. 한 친구가 그러더군요. 나이를 먹으니 “설, 추석, 설, 추석…. 왜 이렇게 명절 밖에 없느냐고요.”
명절이 왜 이렇게 자주 오느냐는 것입니다. 명절 때마다 부부간에, 가족간에 갈등이 붉어지지않을지 조마조마한 마음이 묻어납니다. 그래서 명절이 애초 만들어진 취지대로 축제가 아니라, 비극의 서막인 경우도 적지않습니다.
명절증후군을 겁내는 이들은 많습니다. 일단 남녀불평등한 구조로 인한 아내들의 불만, 왜 시가집에서만 꼭 명절을 지내야하고, 이 많은 노동을 여자들만 감당해야하는지 화가 치밀어오릅니다.
남성들도 명절 전부터 스트레스지수가 높아지는 아내의 눈치를 살핍니다. 아내를 달래기 위해 장인장모에게 용돈을 얼마나 드려야할지 작은 지갑을 몇번이나 들여다보기 일쑤입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왜 명절은 재미도 없는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 가야하는지 입이 댓자는 나옵니다. 자식들 오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던 부모들도 자식들 눈치를 살피며 산뜻하지 못한 표정들을 보고, “내가 저희들을 어떻게 키웠는데…”라며 서운한 마음에 눈시울을 적시게 됩니다. 그런 부모를 보면 형제 자매들은 또 오빠를 향해 “엄마가 지를 어떻게 키웠는데, 오빠 지가 그럴 수가 있노”라거나 “새언니는 뭐한게 있다고?”며 마음 상해합니다. 며느리는 며느리대로 그런 시누이를 향해 “왜 쟈는 시가집에 안가고 친정집에 와서 남의 가슴이 불을 지르노”라며 열을 냅니다.
이 뿐이겠습니까. 서로 종교가 다르면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지, 그래서는 안된다는지, 성묘플 가서도, 절을 해야한다든지, 절을 안하는 불효막심한 자식이라든지 불만이 터져나오기도 합니다.
남들이라면 이렇게까지 마음 상하고, 이렇게까지 싸울 일이 없지요. 가족들은 너무 가깝고 애증이 깔려있고, 기대가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들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도 소중하지만, 명절 때만은 가족들과 다름을 이해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차원에서 그리스도만큼이나 ‘그럴수도’를 믿어보면 어떨까요. ‘오빠가 언니가, 네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라고 기 막혀하기보다는 일단 ‘그럴수도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불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 한자락, 말 한마디에 따라 이왕 모인 가족들이 축제의 장을 펼쳐 서로 위로하고 치유하고 용기를 줘 실의에서부터 일으켜세워줄수 있지요. 그러나 마음 하나 말 한마디 삐딱하게 나감으로써 깊은 상처를 주고, 축제를 비탄의 장으로 만들어버리고, 서로 고통과 증오에 휩싸이게 하고, 싸움판이 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마음 하나가 여러사람을 죽이는 살인도가 될수도 있고, 사람을 살리는 의사의 수술칼과 같은 활인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을 살리기도 쉽고, 죽이기도 쉬운 한가위 보름달이 떠오르고 있습니다.
찌그러지지않고 원만한 보름달같은 마음을 쓰도록 설악무산 조오현 스님의 <조주대사>(불세출의 선승 이름)란 시를 나눕니다. 어찌 이 명절에조차 우리는 이토록 살인검을 휘두르고 살아가는 것일까요. `한 사람 살아가는데 만 사람이 죽어있구나'란 대목에서 퍼뜩 정신이 듭니다.
‘진작 찾아야 할 부처는 보이지 않고/ 허공에서 떨어지는 저 살인도(殺人刀) 활인검(活人劍)/ 한 사람 살아가는데 만 사람이 죽어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