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승이 출가하기 위해 처음 월정사를 찾아갔을 때, 만화스님은 지금의 월정사 대웅전 법당을 중창하시느라 허름한 작업복 차림으로 구슬땀을 흘리며 인부들과 같이 목도를 메고 나무기둥을 나르고 계셨습니다. 흡사 막일꾼처럼 보였지만 어딘가 모르게 범상치 않은 기운이 뿜어져 나와 자비불의 현신인 듯 자애롭고 맑은 모습에 소승은 저절로 하심하게 되었습니다.
불법은 인연법입니다. 소승이 만화스님을 은사로 모신 것은 오대산의 한암선사, 탄허선사의 대를 이어 한암 회상의 참다운 불법을 계승하는 필연의 불연이었습니다. 돌아보면 소승은 월정사에서만 별좌 공양주를 거쳐 별좌 원주소임 10년, 재무 소임 12년, 총무 소임 12년을 맡았었고, 지금 16년째 부주지 소임으로 수행과 심부름을 하고 있습니다. 은사스님은 소승이 어떤 사안을 놓고 판단하거나 결정을 내려야 할 때마다 아직도 많은 영향을 주시는 분입니다.
사는 6.26사변 때 잿더미만 남았습니다. 국군의 작전상 방화로 당시 김백일 장군 등에 의해 강행된 일입니다. 월정사뿐 아니라 오대산 내 거의 모든 가람이 소실되었습니다. 그때 만화스님은 피난을 가시지 않겠다는 한암스님을 모시고 참혹한 전장의 한가운데서 천년고찰 대가람을 굳건히 지키다가 국군의 방화로 대가람이 모두 불타는 현장을 가슴 아프게 목도했습니다. 또한 한암스님께서 목숨 걸고 상원사를 지켜낸 지 석 달 후에 좌찰입망 열반에 드셨습니다. 이후 은사스님은 잿더미가 된 월정사 대가람을 복원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였기에 대 서원을 세우고 중창불사를 시작했습니다. 인부들과 똑같이 작업복을 입고 솔선수범하여 막일을 하셨습니다.
소승이 만화스님은 은사로 모시며 이 장엄한 중창불사에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은 크나큰 불은이었습니다. 가람과 불법을 수호하시는 은사스님의 정신과 모습은 소승에겐 그대로 큰가르침이었습니다. 당시 월정사는 먹을 것이 없어 날마다 산나물과 감자와 옥수수로 끼니를 연명해야 했고 내복도 없이 승복 하나만 걸친 채로 그 엄청난 혹한을 견뎌야 했습니다. 그런 가난 속에서도 은사스님은 인부들과 함께 몸소 힘겨운 노동을 하면서 중창불사에 몰두하셨습니다. 그 모습은 그대로 살아있는 청정법문이었습니다.
눈보라치는 어느 겨울날, 소승은 은사스님의 명을 받고서 사찰 토지임대료를 받으러 리어카를 끌고 나갔습니다. 한나저을 고개를 넘어 진부, 상월, 오계리, 탑동리 등으로 돌아다녔지만 받은 것이라곤 콩 두어 말뿐이었습니다. 날이 저물기 전에 절에 닿아야 할 것이어서 돌아오는 길을 서두르는데 눈보라는 더욱 사나워져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리어카 바퀴가 눈에 묻혀 구르지도 않았는데 고갯마루에서 미끄러지면서 고꾸라지고 말았습니다. 그 바람에 콩자룪자ㅣ 떨어져 콩이 눈 속으로 쏟아졌습니다. 길은 사라지고 앞은 보이지 않고 칼바람은 휘몰아치고, 그 참담함이란 이루 형언할 수 없었습니다. 소승은 부모, 형제, 친지 등 세속의 인연을 싸늘하게 끊으면서, 또 세속적 성취를 모두 다 내려놓으면서, 출가를 결심하고 서울에서 월정사까지 걸어올 땐, 우주의 심법을 주파해 보려는 비장한 각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혹한의 눈보라 속에 가난한 소작인들에게 콩 몇 되씩 걷으러 다니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쓸쓸한 회의가 가열차게 압박해왔습니다. 멍청이는 휘날리는 눈송이를 멍청하게 바라보고 그저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저만치 눈 속에 가려진 산마루 어디쯤, 아니면 암중의 하늘가 어디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은사스님의 불호령이 들여온 것입니다. 성난 바람의 음성으로 천지를 뒤흔드는 그 소리! 화들짝 놀라서 눈 속의 콩을 보이는 대로 주워 담고는 리어카를 다시 끌고 걷기 시작했습니다. 보이지 않던 길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만화 희찬 스님 시봉 이야기
<오대산 월정사 중창주 만화>(원행 지음, 에세이스트사 펴냄)에서
원행 스님
강원도 평창 오대산 월정사 중창주인 만화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원주 치악산 구룡사 주지, 동해 삼화사 주지 등을 거쳐 현재 월정사 부주지 소임을 맡고 있다. 저서르는 <월정사 멍청이>, <월정사 탑돌이>, <10.27불교법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