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진짜 겸손
···겸손이란 자기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
어떤 콧대 높은 처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길을 가는데 뒤에서 누가 자꾸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 같이 가, 처녀. 같이 가, 처녀. ”
그래 처녀가 돌아보니 웬 생선 장수가 주제넘게 자신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처녀가 앙칼지게 말했습니다.
“ 아저씨, 왜 자꾸 같이 가자는 거예요? ”
생선장수 아저씨가 뜨악한 얼굴로 말했습니다.
“ 난 갈치가 천 원이라고 말한 것뿐인데……. ”
무안해진 처녀가 아무 버스나 올라탔습니다. 그런데 차가 가지 않는 것입니다. 화가 난 처녀 또 앙칼지게 말했지요.
“ 이 똥차 언제 가는 거예요? ”
버스 기사가 슬그머니 돌아보며 대답했습니다.
“ 똥이 다 차야 갑니다. ”
콧대 높은 처녀가 한 순간에 ‘ 똥 ’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다 제 잘난 맛에 삽니다. 이것을 자기애라고 하는데, 이 자기애가 지나치면 콧대 높은 처녀처럼 역효과가 납니다. 그래서 지나친 자기애를 절제하는 겸손이 필요한 것이지요. 그러나 지나친 겸손, 혹은 겸손을 가장한 자기 비하는 또 다른 문제가 됩니다.
하느님께서 연로하셔서 보필할 궁녀들을 뽑기로 하셨습니다. 잘난 척하는 사람들한테 하도 데어서 선발 기준으로 삼은 것은 오로지 겸손이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천당 각지에서 겸손한 여인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고, 마침내 무던이, 사양이, 겸양이 세 사람이 뽑혔습니다.
세 궁녀가 하느님을 보필한 지 어느덧 일 년, 하느님은 그만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병명은 화병이었습니다. 열두 제자가 걱정이 되어 여쭈었습니다.
“ 왜 화병에 걸리셨는지요? ”
하느님께서는 저만치 서 있는 세 궁녀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셨습니다.
“ 내가 저것들 때문에 이렇게 되었느니라. ”
“ 아니 왜요? ”
“ 무던이는 음식이든 일이든 잘 하는 게 하나도 없어. 그런데도 잘못을 지적하면 달라지려는 노력은 않고, 입이 댓발은 나와가지고 ‘ 내가 무던하니까 참지 ’ 하며 심통을 부려. ”
“ 사양이는요? ”
“ 사양이는 어디 좀 가자고 하면 끝까지 사양하지. 그래서 무던이와 겸양이 둘만 데리고 갔다 오면 자기만 미워한다면서 동네방네 내 욕을 하고 다녀. ”
“ 그럼 겸양이는요? ”
“ 말도 마. 뭘 시키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는 게 아니라 ‘ 저는 못 하옵니다. 안 하옵니다. 되었사옵니다 ’ 하고 겸손한 척 내숭을 떨어서 아주 속이 뒤집어져. ”
겸손이란 자기를 낮추는 것도 무조건 사양하는 것도 아닌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밥상을 차려놓고 “ 열심히 만들었으니 맛있게 드세요 ”라고 말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맛은 밥을 먹는 사람 입맛의 문제이고, ‘ 나는 최선을 다했어. 부족하지만 그래도 괜찮아 ’ 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피곤하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 차린 게 없습니다. 음식이 변변치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를 연발하다가 손님이 끼적거리며 먹는 것을 보고 ‘ 나는 왜 이렇게 음식을 못 만들까? 저 사람은 이제 나를 싫어 할 거야 ’ 하면서 눈물을 질질 짠다면 그것은 겸손이 아니라 병적인 콤플렉스입니다. 또 그런 마음은 은연중에 드러나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정말 겸손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편안한 느낌을 줍니다. 그래서 호감을 얻지요. 겸손한 척하는 사람은 비호감의 대상입니다. 하느님께서도 멀리하고 싶어 하십니다. 다른 사람의 호감을 얻지 않고 인생에서 성공하기란 불가능합니다. 행복하고 성공하는 인생을 위해서는 진짜 겸손해지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