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진하 목사시인의 딸 고은비 화백의 그림
당신과 나의 관계는
나는 '나 아닌 것들'없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최근에 <월드 쇼크 2012>(그렉 브레이든 외 지음)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우리 시대가 직면한 종말적 증후군을 제시하고 인간의식의 새로운 각성을 촉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는 책입니다.
이 책의 한 저자에 따르면, 지구 인구의 단 2%가 세계 부의 50%를, 그리고 단 1%가 40%를 소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열 명의 가족이 모인 저녁 식탁을 소개합니다. 금 접시에 수북이 담긴 육즙이 흐르는 고기, 신선한 채소, 전세계에서 가져온 진귀한 해산물과 디저트들, 와인과 온갖 음료. 이 모든 것이 한 사람을 위한 메뉴입니다.
그런데 테이블 오른쪽에는 슈퍼마켓에서 파는 냉동식품과 콜라만을 앞에 둔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나마도 그들은 나은 편. 나머지는 딱딱한 빵 조금에 도랑물을 마시고, 저 끝에 앉은 사람들은 아무것도 먹을 거라곤 없습니다. 먹여 살릴 식구는 점점 늘어나고 먹을 것은 점점 없어지는데 한쪽에서는 포식으로, 한쪽에서는 기아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이런 저녁 식탁의 모습은 분명 정신 나간 상황이 아닐까요. 그러나 이것이 지구촌 식탁의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이런 현실을 타개하려면 ‘문제를 야기시켰던 동일한 의식 상태로는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아인슈타인) 다시 말하면, ‘나와 너’를 따로 떼어 생각하는 분리의식으로는 우리가 당면한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는 건 이런 분리의식입니다. ‘나’라는 주체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와 이웃, 나와 자연, 나와 하나님 사이의 분리를 당연시합니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근원인 신성으로부터 분리된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합니다.”(위의 책)
오늘날 지구촌이 직면한 위기의 뿌리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실 내 존재가 타자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생각은 망상에 불과합니다. 생각해 볼까요. ‘나’라는 존재가 ‘나 아닌 것들’ 없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어느 수도자의 말처럼 ‘꽃’이 ‘꽃 아닌 것들’ 없이 꽃일 수 있을까요. 꽃 아닌 것들, 즉 햇빛, 흙, 물, 거름, 바람, 공기, 곤충, 새 등이 없으면 꽃은 꽃일 수 없습니다.
고진하 목사시인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는 존재 역시 나 아닌 것들 때문에 겨우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요. 그러나 우리는 마치 우주 안의 다른 존재들이 없이도 생존할 수 있는 양 분리의 망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분리의 망상은 인간의 삶을 파괴하고 지구공동체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첫사랑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는 당신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눈먼 짓인지도 모르면서.// 연인들은 끝내 어디에서도 만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서로 안에 있으므로.”(잘랄루딘 루미의 <연인들>에서)
이 시구처럼 진정한 사랑에 눈뜬 연인들은 어디서도 만날 필요가 없습니다. ‘처음부터 서로 안에 있으므로.’ 우리가 만물을 나와 더불어 살아야 할 연인처럼 생각한다면 우리는 ‘서로 안에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태초에 세상을 여신 분과 ‘서로 안에 있’다는 자각 속에 살았던 예수는 분리의식 속에 사는 사람들을 일깨우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닐까요. 예수가 지구별에 머무는 동안 남긴 기도문은 우리에게 그것을 일러줍니다. 이 기도문은 세상 떠날 때가 가까워 옴을 예감하고 남긴, 어쩌면 유언과도 같은 기도문입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요한 17: 21~23)
이 기도문에서 예수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친근함의 표현입니다. 예수 이전에는 아무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호칭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라는 호칭은 예수와 하나님이 ‘사이 없는 사이’임을 적극적으로 드러낸 표현에 다름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의 관계는 합일, 곧 ‘사이 없는 사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삶을 돌아보면, 이것은 단지 듣기 좋은 수사가 아니라 예수의 삶 그 자체입니다.
예수는 모든 존재의 원천이신 하나님과 자기 자신을 떼어서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과 둘로 나뉘어져 있지 않다는 자각 속에 살았기에 굳이 하나님과의 합일을 추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말씀은, 분리의식 속에 살아가는 인간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그 말씀을 우리는 짧은 문장으로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서로 안에 있음!’
예수는 ‘서로 안에 있음’, 즉 합일의 희열과 황홀을 당신을 따르는 이들과 함께 나누길 원했던 것입니다. 신성한 원본(原本)이신 하나님을 모르는 이들에게, 본래 모든 존재가 하나님과 하나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 했습니다. 그것은 곧 모든 존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분리의 망상 속에 살아가는 이들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의식의 혁명이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보여주는 예수의 염원은 이처럼 의식의 혁명을 동반합니다. 이때 낡은 삶의 방식이 깨어지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지닌 존재가 탄생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짧은 공생애 기간 동안 그것을 자기 온몸으로 실천했습니다. 그가 가서 머무는 곳마다 죄인과 죄인 아닌 사람의 경계가 무너지고, 유대인과 이방인, 남성과 여성의 차별이 사라졌습니다.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일이었습니다.
왜 경천동지할 일일까요? 율법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을 괴롭히던 낡은 관습이 깨어지고 새로운 신의 관습이 싹트기 시작했으니까요. 신의 관습이란 ‘합일’의 자각 속에 사는 삶의 태도를 말합니다.
실낙원 이후 인간을 지배한 것은 합일이 아니라 분리의 관습이었습니다. 이 오래된 분리의 관습이 깨지지 않는 한 인간은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예수가 자기의 삶과 가르침을 ‘복음’이라 한 것은 그것이 인간을 분리의 관습 속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신의 관습, 즉 합일의식을 일깨운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존재가 ‘서로 안에 있음’을 예수는 끊임없이 설파했습니다. 복음의 핵심은 결국 ‘서로 안에 있음’을 깨닫는 일입니다.
고은비 화백의 그림
생각해 봅시다. 지금 내가 창밖에 서 있는 나무 없이는 숨을 쉴 수 없으니 나와 나무는 ‘서로 안에 있음’이고, 내가 먹는 밥 없이 살 수 없으니 나와 밥은 ‘서로 안에 있음’입니다. 심지어 지구의 온난화로 만년빙이 녹아내린다는 저 북극이 미치는 영향과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있으니 나와 북극조차 ‘서로 안에 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우주만물이 서로 안에 있다면, 그것을 우리가 또렷이 자각하고 산다면, 지상의 모든 차별, 미움, 증오, 학대, 다툼, 갈등은 저절로 사라지지 않겠습니까.
서로 안에 있음! 예수는 당신을 따르는 인생들이 바로 이것을 깨우치기를 간구했을 것입니다.
“내가 이 사람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이 사람들을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의 간구는 오늘 우리의 간구가 되어야 합니다. 천민자본주의가 야기한 지독한 이기심에 물들어 ‘서로 안에 있음’을 망각하고 살아가는 시절이 아닙니까. 어떤 신학자는 이런 우리의 처지를 “자비를 유배 보냈다”(매슈 폭스)고 표현했습니다.
자비를 유배 보낸 뒤의 우리 꼴은 어떻습니까. 사막처럼 황량하기만 합니다. 돈, 편리, 속도의 악령이 인간의 영혼을 삼켜버렸습니다. 악령은 끊임없이 분리의식을 조장하길 좋아합니다. 우리는 이제 정신을 차리고 결심해야 합니다. 악령의 꾐에 속아 분리의 가위질을 계속하고 살 것인가. 아니면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실과 바늘로 분리된 것들을 꿰매는 합일의 삶을 살 것인가. 우리가 분리의 가위질을 멈추고 분리된 것들을 꿰매는 합일의식 속에 살 때 비로소 예수의 간구는 이루어질 것입니다.
고진하(목사·시인)
자연속의 목사시인 고진하
오늘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진짜 의미를 전해준 고진하(60)는 어느 한 직업으로 표현될 수 없는 분입니다. 감신대를 졸업해 목사 안수를 받았으니 목사입니다. 일요일이면 원주의 한 밥집을 빌려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 기도를 드리고, 마음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또 시집을 다섯권이나 내고 김달진 문학상 등을 수상한 시인이기도 합니다. 감신대를 거쳐 숭실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으니 교수로도 불립니다.
하지만 그 어느 것 하나 전직으로 하는 것은 없고, 치악산 아래 원주의 집에서 지낼 때가 많으니 백수로 불리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그는 인도를 여행해 <우파니샤드 기행>을 펴낸 순례자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자유로우면서 따스한 영혼을 지녔습니다.
원주 치악산 아래서 살아가는 고진하 목사시인과 부인 권기화씨
도시에서 많은 것을 가지고서도 좀체 자기 것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많은 것을 포기하면서도 여유를 누리는 그의 모습을 늘 부러워합니다. 저도 몇년 전 그의 치악산 아래 시골집에서 하루를 묵으며 예배당보다 더 깊은 안식을 느꼈습니다. 인터넷 휴심정에 선보일 그의 글에서 독자들도 생명의 기운과 안식의 평화를 느낄 수 있으리라 기대됩니다.
그와 시골집에서 살아가는 아내 권기화는 히말라야 요가를 한 요가수행자입니다. 역시 함께 사는 딸 고은비는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산티니케탄에 세운 비스바바라티 대학에서 그림을 공부한 화가입니다. 가족들이 다 그의 도반인 셈입니다.
고진하 목사시인이 이번에 낸 책이 <성서 속 기도의 스승에게 배우다>(꽃자리 펴냄)입니다. 딸의 그림은 아버지의 책이 영적으로 충만하도록 해주었습니다. 이 책은 하갈, 야곱, 모세, 한나, 엘리야, 사울과 다윗, 하박국, 욥 등 구약의 선지자들을 담아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비폭력 평화 자비의 모습과 달리 배타적이고 공격적이게도 보이는 선지자들이 그의 손끝에서 그가 사랑하는 나무나 꽃, 풀 같은 일상의 생명처럼 우리 마음에 새롭게 다가섭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