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6년 독일맥주잔 전시회 . 사진 이정용 기자
평신도 신학자’는 한국에서 아직도 낯설다. 개신교 신학 교수는 거의 같은 교파의 목사님들이다. 가톨릭 신학 교수는 대부분 신부님이고 드물게 수녀님이다. 불교는 자세한 사정을 모르겠지만, 미루어 짐작컨데 비슷하지 않을까. 평신도가 갑인 종교는 없는 것 같다.
20년 쯤 전에, 평신도 신학자로 살아보자고, 예수도 평신도였다고, 평생의 업으로 해 보자고, 어이없는 결심을 했다. 평생의 수수께기라면 그것 하나인데, 당시는 정말 막막했다. 성직자 중심의 교계 구조가 강한 한국 가톨릭에서 평신도 신학자는 단기필마로 살아야 한다.
서포트와 지원을 생각할 수 없는 독일 유학길이었다. 일하고 공부하자고 다짐했지만, 현실은 낯선 땅의 밑바닥이었다. 말도 통하지 않았다. 좋은 일자리는 당연히 없었다. 뜻은 거창한데 현실이 받쳐주지 않으면, 비뚤어지기 쉽다는 것도 체험했다.
당시는 수도회원들이 너무도 부러웠다. 형제들의 국제적 네트워크와 유무형의 축적된 자본은 휘황찬란했다. 수백명이 먹고 살 걱정이 없고, 학비 걱정이 없고, 일치된 영성으로 유복한 정신적 조건과 권위. 독일 유학 9년동안 한 번도 그런 모임에 참석해본 적이 없다.
주원준 박사. 사진 조현
크래프트 맥주. 사진 박미향 기자
하지만 격려와 기회는 좌절과 분노를 날려버린다. 통장에 딱 37유로가 남았을 때다. 막막한 필자에게, 가톨릭 학생회(KHG)를 지도하시던 예수회 뮐러 신부님은 구원이었다. 폐쇄된 작은 학생술집의 운영을 맡아 보라! 월화수 사흘만 열고 방학은 닫는, 작고 어두운 반지하공간이었다.
나 혼자서 가난하게 공부할 만큼의 돈은 흐느낄만큼 고마운 것이었다. 그렇게 평신도 신학자의 이상과 미래를 축복하고 적절한 방법으로 격려하는 것도 중견 사제의 역할이라고 깨달았다. 그 이후 몇년간은 주경야술집(!)의 생활이었다. 혀꼬부라진 알콜 도이치(!)는 부수입이었다.
가장 어렵다는 밀맥주 따르기가 독일 학생들에게 인정받을 무렵, 생활도 공부도 틀이 잡혔다. 언제 한번 밀맥주 대접할 기회가 되면 좋겠다. 과거의 고통을 감사하게 만드신 그 신부님은 물론이고 여러분에게도.
주원준 박사(구약학, 성서한님연구소 수석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