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현 스님은 죽음이 거의 확실하고 생존 가능성은 만분의 일에 불과한 여행을 왜 감행했을까. 그것도 당시로는 노인인 64세에 말이다. 법현 스님의 구법여행 이야기는 정년 퇴직자들에게 용기를 준다.
그가 서역을 향해 사막을 지날 때 머리 위로 새 한 마리 땅에 짐승 한 마리 얼씬하지 않았다. 사방으로 아득히 펼쳐진 사막에서 도대체 어디쯤 사람 사는 곳이 있는지 예측할 수 없었다. 그저 태양을 방위 삼고 해골로 이정표를 삼을 뿐이었다.사막의 열풍과 악귀들이 여러 차례 출현하면서 우리 앞에는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었다.법현 스님이 타크라마칸 사막을 지나면서 남긴 기록이다.
조선은 오백년간 주자의 성리학을 추종하였다. 그러나 주자의 삶과 덕행을 찾아 복건성 무이암을 찾은 조선 선비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단지 무이구곡가를 흉내 낸 가사를 읊조릴 뿐이었다.
중국에 불교가 전해진 이후로 인도로 떠난 구법승들은 기록이 전하는 것만 180명이 넘는다. 그들은 중국에 없는 불경을 구해오기 위해 서천취경이란 이름으로 살아 돌아오기 어려운 길을 떠났다. 중국의 불제자들은 붓다가 태어나고 깨달음을 얻고 처음 설법하고 열반에 드신 사대성지를 직접 참배하기 위해 구도의 길을 떠났던 것이다. 인도 구법승중에 여행 기록을 남긴 3대 구법승이 있다.(그중에 제일은 현장)
불국기를 남긴 법현 스님 대당서역기를 남긴 현장 스님, 대당서역 구법고승전을 남긴 의정 스님이 그분들이다. 중국불교에는 수많은 고승들이 출현했지만 선승 신승보다 가장 중요하게 꼽는 분들이 바로 천축구법승과 역경승들이다.중국 승려로 최초로 인도를 다녀온 이가 법현 스님이다. 현장 법사보다 200년 앞서 인도에 다녀왔다. 그가 쓴 여행 기록이 바로 불국기이다.
더욱 감동스러운 것은 그가 인도로 떠난 때 그의 나이가 64세라는 것이다.인도로 떠난 목적은 중국불교에는 율장이 부족하기 때문에 인도에 가서 직접 구해와야 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떠난 것이다. 요즘은 경전도 율장도 책장에만 꼽혀 있고 펼쳐 보지도 않는다. 경전과 율장을 구해오기 위해 죽음의 길을 떠난 그들의 마음을 떠올려 본다.
법현은 11명의 도반들과 함께 천축으로 떠났지만 가는 도중에 두 명은 죽고 여섯 명은 되돌아갔다.두 명은 인도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법현 혼자 살아서 돌아왔다. 법현의 순례는 13년이 걸렸다.부처님의 8대성지를 순례하고 중천축의 수도 파트나에서 3년 동안 경전과 율장을 필사하고 연구하였다. 중국 구법승으로 유일하게 사자국으로 불리는 스리랑카에가서 2년간 체류하면서 율장을 필사하였다. 그리고 그곳의 풍토와 여러가지 불교행사를 기록으로 남겼다. 인도 스리랑카등 미지의 나라 30여개국을 순례하고 필요한 율장을 구해왔다.
갈 때는 육로로 갔지만 돌아 올 때는 해로를 이용했다. 해양실크로드를 통한 그의 귀로는 마르코폴로보다 900년 앞선 항로였다.중국에 돌아왔을 때 그의 나이는 77세였다. 법현은 그가 13년 동안 겪은 이야기들을 정리하여 불국기를 저술하였다. 그리고 인도에서 건너온 불타발타라 스님과 함께 경전과 율장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법현이 번역한 경들은 대반니원경 6권, 마하승기율 40권, 미완으로 남은 장아함경 5부 등이다. 그는 인도와 스리랑카에서 필사해온 율장과 경전을 번역하고 86세 되던 해에 열반에 들었다. 참으로 희유하고 거룩한 삶이다.
법현은 동진시대의 인물이다. 속성은 공씨이다. 현재의 산서성 옹단현에서 태어났다. 삼 형제인데 두 형이 어려서 병을 앓다 죽었다. 막내까지 죽을까 두려워한 아버지가 절에 보내 출가시켰다. 그때 나이 세 살이었다. 어릴 때부터 총명했던 그는 비구계를 받고 계율에 어긋나는 행실을 하지 않았다. 64세가 되던 해 부처님의 사대성지를 참배하고 중국에 없는 율장을 중국에 전하고자 하는 서원으로 길을 떠난 것이다. 동진 홍시원년 서기 399년이었다. 법현의 삶과 불국기의 내용을 더욱 자세히 알고 싶으면 ㅡ실크로드고전 여행기 총서3번 불국기 ㅡ다정 김규현 역주를 보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