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에게서 한 별이 솟는구나, 이스라엘에게서 한 왕권이 일어나는구나. 그가 모압 사람들의 관자놀이를 부수고 셋의 후손의 정수리를 모조리 부수리라.’
하느님,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별이 바로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 알려진 예수님을 일컬으신 것입니까.
그런데 어째서 그 분은 유다를 점령하고 핍박하는 로마인들의 관자놀이를 부수지 않고,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알아보지 못하는 저 고얀 대제사장과 바리사이의 후손의 정수리를 모조리 부수지 않으셨습니까. 아니 오히려 그들로부터 유다인의 왕이라는 비웃음을 받으셨습니까. 그리고는 그나마 걸쳤던 천 조각마저 빼앗긴 채 도둑놈, 강도들과 나란히 나무 막대기에서 돌아가셨습니까.
그러고도 솟아나는 별이요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리실 수 있습니까.
옆에서 조롱하던 도둑놈 말마따나 십자가에서 내려와 당신도 살고 우리도 살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리하여 성벽은 벽옥으로 쌓았고 도성은 온통 맑은 수정 같은 순금으로 된 거룩한 예루살렘에서 영원무궁 살게 해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느님, 저 들판의 표범은 왜 저리도 순하고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 사슴을 잔인하게 찢어 죽이는 것입니까.
이 지구상에서 일 년에 1200만 명이나 되는 당신 자녀들이 굶어 죽어 가는데 어찌하여 다른 쪽에서는 곡물창고에 곡식을 수억 톤씩 쌓아놓고 썩지 않게 독한 방부제를 뿌려대고 있는 것입니까.
애당초부터 선악과도 안 만드시고 사탄도 안 만드셨으면 사람들이 타락하는 일도 없었을 거고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매다는 끔찍한 일도 없었을 것 아닙니까.
그러면 늑대가 새끼 양과 어울리고 표범이 숫염소와 함께 뒹굴며 젖먹이가 살모사의 굴에서 장난하는 아름다운 세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신께서는 왜 그리 어렵게 말씀하시고 행동하십니까. 야곱에게서 난 별이요 왕 중 왕이라는 분이 하필 비천한 목수의 아들로 나서 부귀영화 장수만복과는 거리가 먼 짧은 인생을 살다가 비참하게 가셨습니까. 평생에 데리고 다닌 자들도 왜 하필 거지, 창녀, 세리입니까. 그러니까 당신께서 일찍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가운데 이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고 극구 칭찬하신 세례자 요한조차도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하고 물은 것 아닙니까.
어리석은 우리 머리와 가슴으로는 당신 삶과 죽음이 왕의 그것, 하느님의 아들의 그것이라고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움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결국에는 또다시 당신 가르침을 우리 구미에 맞게 고쳐, 살아계실 때는 고난 중에 계셨지만 부활하신 뒤에는 왕 중 왕이 되시어 권세를 가지고 천지만물을 다스리고 지배하신다고 믿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도 당신을‘주여, 주여’하고 불러대면, 죽었다가도 다시 살아나 그 옆에서 권세를 조금 나누어 받고 장수만복을 누릴 수 있다고 믿고 있지 않습니까.
왕이란 누구인가요. 남을 지배하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이 왕 아닙니까. 당신은 도저히 그 이름에 걸맞지 않는 삶을 사시고, 그 이름에 걸맞지 않는 가르침을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만약 돌을 빵으로 만드셨더라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천사들이 손으로 받아내게 하셨더라면, 더 이상 아무 말씀, 아무 행동 안 하셨어도 사람들은 당신을 왕 중 왕으로, 하느님의 아들로 받들었을 것입니다.
당신께서는 이 세상에서 고통을 받고 거지와 병든 자의 친구로 지내셨지만, 어리석은 우리가 믿는 대로, 부활하신 뒤에는 황금빛 도성 높은 옥좌에 앉으셔서 돌을 빵으로 만들고 성전에서 뛰어내려도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는 권능을 누리시고 계십니까. 그래서 이를 믿는 자들에게도 역시 황금과 수정으로 둘러싸인 거룩한 성에 살도록 축복을 나누어주실 것입니까.
그렇다면 세례자 요한은 왜 세례 받으러 오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사두가이파 사람들에게 그렇게 심한 저주와 욕설을 하는 것입니까.
“이 독사의 족속들아, 닥쳐올 그 징벌을 피하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너희는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써 보여라. 그리고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 하는 말은 아예 할 생각도 말아라. 사실 하느님은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를 만드실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신께서도 우리에게 같은 말씀을 하시려는 것입니까.
‘이 독사의 족속들아, 누가 천당 가려면 예수를 믿으라고 가르쳐주더냐. 내가 너희들의 구원자요 스승이라는 말은 아예 할 생각도 말아라. 사실 하느님은 나, 예수의 이름도 모르는 채 한 세상을 살아간 어느 미개 부족 사람을 가지고도 제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려 나의 참 제자가 될 수 있게 하신다.’
예수님, 그런데 당신과 함께 숨 쉬고 땀 흘려 걷고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고 병을 고치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한 제자들조차 누가 하느님 나라에서 옆자리를 차지할까를 놓고 서로 다투지 않았습니까. 당신께서 “너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나 알고 있느냐? 내가 마시게 될 잔을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을 고난의 세례를 받을 수 있단 말이냐?” 하고 물으셨는데도, 그들은 그저 나중에 영원한 하늘나라의 높은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욕심에서 이승의 고난쯤은 참을 수 있다고 큰소리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 그렇지만 당신께서 말씀으로 행동으로 그리고 죽음으로 가르치신 것이 야곱의 별이니, 왕 중 왕이니, 죽어서 천당이니 하는 말들로 대변되는 부귀영화와 장수만복에 이르는 비결은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님, 왕 가운데 왕이라는 당신께서 삼십 평생 짧은 삶을 그렇게 힘들게 보내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오래 전 던졌던 이 무지막지한,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한 이 물음의 답을 이제는 알 것 같기도 하고, 아직도 모르는 것 같기도 하고, 영원히 모를 것 같기도 하고...)
김형태 <공동선> 발행인
<공동선 2018. 1,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