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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기도가 성숙해질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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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렁이의 기도>를 통해서 본 한국 기독교인의 기도 행위

 

                  진규선 목사(스위스 바젤대학 조직신학박사 과정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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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2017, 기도 서적 한 권이 출판되자마자 종교부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심지어 그 책은 일반도서와 경쟁해서도 손색이 없었고, 교보문고에서는 최고 약 50위를 기록했다. 바로 <지렁이의 기도>이다. 필자도 바로 그 책을 직접 읽어고, 전형적인 한국 기독교 신앙을 서술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 책의 내용을 비판적으로 살핀다면, 한국 기독교인들의 전형적인 신앙도 다룰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필자는, 이 책을 중심으로 체험, 윤리, 신학이란 주제 아래 비판적으로 한국 기독교인의 신앙을 짧게나마 다루고 싶다.

 

체험 목록과 현실가능성

 

<지렁이의 기도>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포함하면 27개의 글 모음이라고 볼 수 있는데, 분량상 체험의 모음집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저자의 직접 체험 외에도 간접 체험 목록을 나열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예언

2) 엑소시즘

3) 환상 및 음성

4) 방언과 통역

5) 유체이탈

 

이상이 책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체험 목록이고, 그 외에도 한 추천사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어떤 한 신학자의 과거와 미래를 맞추었다는 부분도 있다. 그리고 저자는, 이것들은 자신의 체험 중 일부이며, 또한 책에 실린 체험의 사실관계를 일일이 재확인했다고 한다.

 

필자는 저자나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의도적인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전제 하에, 두 가지 가능성을 말하고 싶다.

 

첫째, 기억의 왜곡이다. 인간의 기억이란 터무니없이 불완전하다. 객관적 기록이나 증거가 없는 단순한 기억에 의존한 것들은 사실관계를 확인을 했다고 할 수 없다. 이 책에서 주장하는 체험 중, 상당수는 객관적 기록으로 남을 수 없는 것들이고, 확인 불가능하다. 그리고 현재의 편견에 따라 상황을 해석하고 기억을 해석하는 방향도 달라진다.

 

둘째, 엑소시즘, 환상 및 음성, 유체이탈은 지극히 개인 체험 및 해석에 속하고, 다른 가능성과 구별할 수 있는 방도가 없지만, 그럼에도 비일상적인 체험 중 충분히 검증 가능한 것이 있다. 예를 들면, ‘방언이라는 것이다. 저자가 실제로 방언을 한다고 주장하고, 또한 방언 통변도 존재한다고 말하기에, 블라인드 테스트를 진행한다면 검증이 가능하다. 이미 언어학 교수 윌리엄 J. 사마린(William J. Samarin)은 방언이 언어로써의 가능성이 있는지 과학적으로 검증하고 그럴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지만(<Tongues of Men and Angels: The Religious Language of Pentecostalism> 참조), 복수의 방언/방언통변가들이 블라인드 테스트를 진행하여 서로 일치한다면, 그러한 결과는 <지렁이의 기도> 저자를 포함한 다수의 종교인들에게 자신들의 정당성을 입증할 수 있는 작은 실마리가 되어줄 것이다.

 

한편, 기적이나 체험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한 기준은 자체적으로 기독교 내에 존재하지 않는다. 책의 내용과는 무관한, 그러나 언론을 통해 보도된 사건 하나를 예로 들어보자(KBS2 TV “제보자들이라는 방송 참고). 모 교회 내의 어떤 부부가 임신을 했는데, 정황상 목사와 불륜관계임이 분명했다. 친자확인 결과도 그러한 수치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실제 관계를 맺는 현장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정작 불륜 관계를 맺었다고 의심되는 목사와 해당 신도, 둘 다 그것을 기적적인 기도 응답이라 증언했다. ‘성경에 의하면, 성령 잉태는 예수에게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도 이삭과 삼손과 세례요한의 경우처럼 일반인에게서도 일어났다. 그리고 해당 교회 교인들도 목사의 말을 믿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 사건을 비난하는가? 그 목사와 관계가 없는 다수의 사람, 심지어 같은 기독교인들은, 그것은 거짓말이고, ‘당연히불륜이라 생각할 것이다. 이처럼 직관적으로는 구별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치밀한 이성적 분석을 시도하면 기준이 모호하다는 사실에 적지 않은 기독교인이 당황할 것이다.

 

혹자는 평소 보이는 삶이나 윤리를 기준으로 제시할 수도 있다. 실제로 다수의 기독교인이 윤리로 기적이나 그러한 체험의 진정성을 판단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다음은 윤리적 문제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배타적인 종교 윤리의 한계

 

<지렁이의 기도>는 전형적인 배타적인 종교 윤리의 한계를 보여준다.

 

1장에서는 무신론자 부모의 자녀가 아토피로 고생하는데, 기도할 수 없는 것을 예화로 들며, 기도할 수 있는 기독교는 행복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타인의 아픔을 예화로 쓰는 것으로 배려심이 부족하다고 느껴진다. 그리고 1장에서 무신론자들에게는 공허함이 있다고 주장한다. 19장에서는, 부부 중 한 사람이 불교를 믿는 집안에 찾아가 부처님이 집안 경제를 일으키면 부처님을 계속 믿고, 예수님이 집안 경제를 일으키면 개종하라는 말을 했는데, 결국 경제적으로 성공해서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22장에서는 괴로운 상황에서 불평, 불만이라도 쏟아야지, 만일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으면 이교도가 되거나 자연주의의 하나님(이신론을 뜻한다고 보는데,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다)을 섬기게 되는 위험이 있다고 말한다.

 

4장과 16장에서는 여성 인권에 대한 감각이 결핍된 듯 한 가부장적인 요소가 보인다. 4장의 예화는 모 목사의 책에 실린 어느 이야기를 인용한 것이다. 어느 시어머니가 아들이 기독교인이 여성과 결혼했음에 실망했으며, 그것을 며느리에게 직접 말했다. 그럼에도 그 시어머니는 잘 대해주었고, 그녀는 자발적으로 교회를 다니다가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19장에서는 남편이 술에 지나치게 의존함에 괴로움을 느끼는 아내가, 그럼에도 자신의 남편이 바람도 피우지 않고, 손찌검도 하지 않는 사람임에 감사 기도를 드리는 이야기를 예화로 든다.

 

태어날 아이의 성별을 직접적으로 하나님께 음성으로 듣는 장면도 몇 번 등장한다. 자신은 프롤로그에서 태어날 자기 아이의 성별을 간접적으로도 알려주지 않은 의사에게 화가 났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의료법상 금지이다. 5장에서는 어떤 부부가 4년을 아들을 기다렸는데 저자는 딸이라고 하자, 저자는 셋째는 꼭 아들을 주신다고 하니 너무 실망하지 마시랍니다라고 말해주었고, 실제로 아들을 얻었다고 한다.

 

17장에 등장하는 예화는 악령이 실제하며 그것을 예수 이름으로 물리칠 수 있다는 종교적인 엑소시즘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다. “‘자살의 영이라는 푯말을 붙인 귀신같이 생긴 존재가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것을 보고 화들짝 놀라 마음을 다잡고는 힘껏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우리 집에서 속히 떠나거라고 소리를 질렀더니 그 시커먼 존재가 옆집으로 갔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종교 서적으로 이해되지만, 그 다음 문장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참으로 조심스럽지만 서평을 위해 이 글을 인용하며, 모든 관련 아픔을 겪은 분들에게 미리 양해를 구한다) 그렇게 그 시커먼 존재를 옆집으로 쫓아냈더니, 그날 밤 옆집 아이가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고 하며(저자의 직접 경험이 아닌 누군가에 들은 간접 경험이다), “어떻게 그것을 가리켜 신화 혹은 상상 속 관념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23장에는 95세의 비기독교인 노인이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했고 위독한 상태의 혼수상태에서 밤새 예수님 잘못했어요. 제가 몰라서 그랬어요. 용서해주세요.”라고 7시간을 반복하며 소리 지르다가 아침이 되자 세례를 받고 싶다며 지난 밤 예수님이 계신 곳에 다녀왔예수님이 제 몸 아픈 것도 다 고쳐주시고, 제 죄도 다 용서하셨어요.”라는 고백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95세의 노인이 입원하여 그렇게 죽음이 두려워 말년에 회심하는 이야기는 배타적인 기독교인에게는 감동적인 구원 간증일 수 있으나, 한편으로 우리는 기독교인의 협박(천국과 지옥의 이분법)이 노인을 괴롭힌 것은 아닌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저자가 19장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이 땅에서 복 받고 죽은 다음 저 우주 너머 미지의 세계에 있는 천당에 들어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고 말한 것치고는, 개종을 상당히 중요시 여기는 듯하다.

 

이와 같이 책에 녹아있을 뿐 아니라 한국 기독교 전반에 퍼져있는 배타적인 종교 윤리의 한계는, 우선 다문화/다종교(무신론 포함) 사회 속에서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 부족이다. 또한 법률적인 문제를 포함한 가부장제적 사고, 타인의 아픔을 단순 예화로 소비하는 문제점도 있다. 이것은 불륜보다 덜 심각한 윤리적 문제일까? 이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기독교인들과 인식하는 기독교인들 사이에는 분명 갈등이 있을 것 같다. 다만 법률적인 문제까지 포괄하는 윤리 의식 혹은 상식의 부재는 다문화/다종교 시민 사회에서 경계되어야 한다.

 

신학적 도전들

 

기도는 고대 종교에 속한 행위였으나, 시간이 지나 신학이 발전함에 따라 까다로운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신의 절대적인 섭리, 작정, 예정 등과 같은 것과 양립가능한지와 같은 중세의 질문부터 시작해서, 자연법칙을 제정한 신과 그것을 깨트리는 신의 기적 혹은 응답 간 모순은 없는지와 같은 계몽운동 시기의 질문, 기도들에 대한 다양한 현대의 실험 등은 기도를 뿌리부터 흔들기 시작했다.

 

따라서 만약 기도의 내용을 신학적으로 다루려면, 당연히 이런 사안들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다수의 기독교인은, 이런 급진적이고 현실적인 질문보다는 보수적인 고대 기독교 세계관의 테두리 내에서 은사지속이냐 은사중지냐의 입장에서 서로를 비판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 서적 역시, 대부분의 기도 서적과 마찬가지로, 진지한 신학적 성찰보다는 동화같이 나열된 체험과 더불어 짧은 조언 정도가 있다. 그런 고로 아쉽게도, 몇몇 신학자들의 추천사처럼(추천인 32명 중 10명이 전문신학자이다), 신학적 내용을 다루었다고 볼 수 없다.

 

그리고 배타적인 종교의 특징은, 명쾌한 기준 없이 타종교의 체험을 평가절하 하거나 같은 종교 내에서의 특정 집단을 이단 내지는 사이비로 몰아간다. 그러나 과연 공평한 잣대 위에서 본다면, <지렁이의 기도> 뿐 아니라 교회 내에서 돌고 도는 기도-동화들은 그들이 무시하는 종교, 이단, 사이비로 몰아가는 집단의 것들과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 또한 다른 각도에서 예언에 국한해보자면, 이 책에서 허무맹랑한 예언으로 비판대상이 된 홍 모씨가 아니라, 대통령 후보를 예언하고 맞춘 무속인들을 진실로써 존중해줄 기독교인이 얼마나 될까?

 

공정하게 말해, 다수의 종교 신비체험은 착각일 수도 있다. 종교에 심취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소위 그러한 떠오르는 생각을 하나님의 음성이라 믿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머릿속 망상과 진실한 신의 음성을 구별해낼 수 있는 기준이 무엇일까? 추측해보건대, 실제로 맞아 떨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소한 인생의 낮은 확률에 대한 것들은 누구나 우연히 맞출 수 있고, 또한 사람은 다르게 선택할 때 찾아올 미래에 대해서 알지 못하므로, 다시 말해, 다른 선택에 따라 찾아올 결과를 모르기에, 어떤 것이 더 나은 선택이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누군가의 예언에 따라 한 선택이 지금 와서 보니 신의 뜻이었고 진정한 예언이었다는 믿음은 회고적인 해석에 불과하다. 질병의 치유 이야기는 어떠한가? <지렁이의 기도>에는 기도를 통한 기적적인 치유 사례는 없지만, 그럼에도 책의 말미에는, 정작 저자는 수년간 만성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으나, “수많은 공황장애 및 우울증 환자를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 고치셨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미 기독교의 기도를 통한 치유에 대한 보고나 기록 그리고 심지어 실험들은, 기도에 의한 치유 효과는 증명불가능하거나, 플라시보, 호손, 로젠탈, 평균으로의 회귀, 자발적 치유 등과 관련이 있는 수준이라는 연구도 있다(https://www.ncbi.nlm.nih.gov/pmc/articles/PMC2802370/#CIT32참고). 기적일수도 있지만, 그 정도 수준의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병원에 가는 것이 현명하다.

 

한편, ‘성경적기도란 도대체 무엇일까? 기독교인들의 담론을 지켜보면, 특정 신학적 편견에 사로잡혀서, 명확한 기준을 세워서 얘기하기보다, 편의대로, “성경적이다, 성경적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성경에 나타난 기도의 스케일은 상당하다. 자연 현상을 통제하고, 죽은 자를 살리고, 불치병을 즉시고치고, 물리적인, 화학적인 기적이 일어나고, 엑소시즘을 행한다. 어떤 사람은 절단환자를 위해 기독교인이 기도하여 재생시킨다면(도마뱀은 기적이 없어도 행한다), 전 세계가 하나님을 믿을 것이라고 진지하게 제안하기도 했다(https://www.ncbi.nlm.nih.gov/pmc/articles/PMC1924985/#R23참고; 또한 무신론자 샘 해리스가 목사 릭 워렌과의 대화 중에 유사한 제안을 했다. http://web.archive.org/web/20100328002309/http://www.newsweek.com/id/35784/page/1참고). 누군가 나에게 왜 기도하는 기독교인을 모조리 근본주의자 취급하냐고 화낼 지도 모르겠지만, 오히려 나는 그 외에 더 이상 이론의 여지가 없는 성경적이란 형용사 사용법이 무엇인지 묻고 싶다. 현대 기도 서적 중, 성경의 기적에 준하는 기도를 권면하고 가르치는 내용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어렴풋이 다수가 그것은 지나친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기도자가 고백하는 전능하신 하나님과 일치하는지, 혹은 <지렁이의 기도> 저자를 비롯한 많은 기독교인들이 비판하는 이신론자들에 비해 신학적으로 일관성 있는 주장인지 또한 되묻고 싶다.

 

나가며

 

기도에 대한 많은 책이 있고, 국내의 많은 교회는 기도 학교나 기도팀을 운영한다. 그리고 많은 기독교인이 틈만 나면, 유치한, 때로는 비도덕적인 반대 집회를 열거나 기도 모임을 갖는다. 기독교계에서, 특히나 개신교계에서 기도에 대한 서적은 언제나 인기다. 하지만 이 세상 도처에서 일어나는 비극에 대하여 무력한, 때로는 책임을 져야하는 지난 기독교 역사 속에서, 여전히 신학적 수준이 고대인들 수준에 머문다면, 아니 심지어 고대인들보다 더 비겁하게 신의 능력을 이런 저런 현학적인 말들로 제한하며 타협하는 자세만 정당화하고 있다면, 어떻게, 기독교의 복음이 온 세상에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되겠는가?

 

기도를 자신의 고달픈 인생의 현실에서, 복잡한 인간관계에서, 힘겨운 사회에서 도피하는 수단으로 삼는 기독교를 넘어서자. 기도라는 행위는 인격을 성숙시키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거나 슬픔을 위로하고, 무엇보다 사회적 대의명분을 공유하게 만들어주는 훌륭한 인류의 기술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끝으로, 신학자들에게 바라건대, 현대인이자 동시에 종교인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 상업적 글보다 때로는 진지한 신학적 고민에 앞장 서주길 간곡히 부탁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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