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같이 가~, 같이 가자구우!!” 서울의 어느 복잡한 매장 안에서 어린 여자아이의 다급하면서도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 어딘가 하고 소리 나는 쪽을 찾았습니다. 대여섯 살 쯤 된 계집아이는 앞서 가버린 아빠를 놓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어른들의 가랭이 사이를 헤쳐가고 있었습니다. 아빠의 다리를 겨우 낚아챈 아이는 “같이 가자구 했잖아~”하고 울부짖으며 서럽게 울었습니다. 그제서야 멈춰 아이를 안아주는 아빠의 가슴을, 아이는 작은 주먹으로 치고 있었습니다. “아이구, 우리 ㅇㅇ가 잘 따라오는 줄 알았지. 미안해~” 제 마음 속에선 여러가지 생각과 감정이 그 짧은 장면 속에서 교차됐습니다. 울부짖으며 아빠를 찾는 아이에 대한 안타까움, 자기가 살 물건만 챙기고는 자기의 속도에 따라 가버린 아빠라는 그 남자에 대한 분노, 동시에 그렇게 당당하게 자기의 욕구를 표현할 수 있는 아이에 대한 부러움. 하지만 딸에 대한 아빠의 태도엔 은근히 놀랐고 마음이 따스해졌습니다. 전 사실 그 아빠가 아이를 야단치거나 핀잔을 줄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어른도 그렇지만, 특히 어린아이들이 혼자 남겨질 때, 그들은 버려졌다는 느낌, 자신이 중요치 않은 존재라는 느낌으로 상처를 받게 됩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아이들의 감정을 묵살시켜버리는 어른의 태도지요. 독일에서도 흔히 보는 이 사소한 일상의 한 장면이 인상 깊게 남아있는 이유는 뭘까요?
아마 기다려 줌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과 상대방의 감정을 존중하고 인정해주는 모습 때문인지요.
심리치유사 자격시험을 치기 전, 독일의 한 종합병원의 정신과 병동에서 임상실습을 할 때의 일입니다. 과장 선생님께 면담을 청구한 한 환자와의 만남에 동석할 수 있었는데, 환자는 나이가 좀 지긋한 남자로 근무 중 좀 높은 곳에서 떨어져 뇌상을 입어 몸과 생각이 어눌해진 분이었습니다. 간호사가 그간의 경과를 짧게 보고하는 동안, 의사는 의자를 바짝 그 사람의 휠체어 앞으로 당겨 마주보고 앉았습니다. 환자가 자기 손에 쥔 손목시계를 계속 만지작거리는 걸 본 의사는 이유를 물었고, 환자는, 시계를 차고 싶은데 잘 되질 않는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차겠다고 하는 환자에게 의사는 한 번 해보라고 격려했고, 환자는 자꾸만 손에서 빠져나가는 시계를 채우려고 거듭거듭 시도를 했습니다. 간호사도 저도 숨죽이고 오로지 그의 손과 시계에 집중하는데, 의사는 이 세상에 내 환자는 오직 당신 뿐이라는 듯이 아무 말도 않고 여유롭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15분이 걸려 환자는 드디어 손목시계를 차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때까지 간호사도 가족도 그 어느 누구도 그에게 그 15분을 함께 해주지 않았던 겁니다. 그의 행복해 하던 얼굴! 그는, 해야 할 더 중요한 얘기는 없다면서 어린아이처럼 환한 얼굴로 면담을 끝냈지요. 정말 중요한 것을 저는 그 날 배웠습니다. 그 과장 의사 선생님이 독일의 의사들을 대표하는 건 절대 아닙니다. 환자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뭔지를 알아채는 특별한 분이죠.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위해, 어디로, 쉬지도 않고 기다려주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빨리빨리’ 가고 있는 걸까요? ‘빨리빨리’로 결국에는 더 많은 금전과 시간과 심지어 목숨까지 희생하게 만드는 일들이 허다한데도 우리는 기다릴 시간이 없다고 합니다. 기다림이 가져다 주는 진짜 풍요를 잃어가고 있지 않나요? 사랑은 기다려주는 힘인 것 같습니다. 아이들에게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같은 질문에 대답해 주어야 하듯, 치매가 온 노부모님께도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우리는 같은 대답을 해드리고, 기다려드려야 합니다. ‘잡아당긴다고 잔디가 더 빨리 자라지 않는다’는 독일 속담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달려들어 빨리 그리고 대신 해결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곁에 있으면서 기다려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