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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서 얻어먹는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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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숲에서 즐기는 가온들찬빛열음정과


[플루티스트 용서해 셰프의 요리 산책 - 2]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용서해  |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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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 숲에 내린 첫 서리 ⓒ용서해


거처할 오두막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입동을 맞이했습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대낮엔 햇볕이 뜨거워 피해 다녔는데 입동 무렵이 되니 낮에도 기온이 내려가면서 초저녁에는 땅에서 올라오는 한기까지 느껴졌습니다. 지금까지는 오두막 앞까지 끌어들인 호스로 개울물을 쉽게 끌어다 썼지만, 이제 곧 얼음을 깨고 양동이로 물을 길어다 써야 할 듯합니다. 밤새 내린 된서리에 은빛으로 변한 숲이며, 멋진 호랑이 털옷을 걸친 듯한 굽이진 산허리의 장관에 넋을 잃습니다. 한 번도 같은 색을 내지 않는 자연의 빛깔이 참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곧 들이닥칠 추위에 몸이라도 따뜻하게 지내려면 서리 내린 산의 모습에 한없이 취해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그동안 느긋하게 해오던 집짓기 일정을 서둘러야 합니다. 우선 방만이라도 따뜻하면 되지 싶어서 방 한 칸과 굴뚝, 아궁이 쪽부터 외부 벽돌 마감을 하기로 했습니다.

벌써 해도 짧아지고 기온도 떨어지기 시작해 일이 갈수록 더뎌지지만, 언젠가는 끝이 보이겠지 하며 일하시는 분들과 함께 열심히 벽돌을 나르고 조적을 쌓고 황토 흙을 나르고 구들장도 나릅니다. 이곳에 집을 짓고 온돌방을 들여 살겠다는 내 생각 때문에 여러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 같아 늘 미안했는데, 날이 추워져 일하기가 힘들어지니 ‘이곳에 들어오는 것을 그냥 포기할까?’ 하는 생각이 잠시 스치기도 했습니다.

 

숲속 생활 시작할 수 있게 도와준 고마운 사람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을 지내고 나니 제 의지를 굽히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연에 들어와 집을 짓고 산다는 생각은 저 혼자의 의지만으로는 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의 도움이 없다면 혼자서는 도저히 꿈꿀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길도 없는 이 깊은 산속까지 누가 목재를 나르고 구들장은 어찌 마련하며 황토 흙은 어디서 퍼올 거고 땔감은 어떻게 마련할지 처음엔 그저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누구보다 감사할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두막을 도맡아 지어주신 분입니다. 그분은 이제 저의 아주 귀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분 역시 저와 비슷한 꿈을 꾸었기에 자기 일처럼 해주었고, 지금은 아내와 함께 제가 머무는 숲으로 들어오기로 마음을 먹었지요. 그분의 도움이 없었다면 저는 숲으로 들어올 엄두도 못 냈을 겁니다.

 

구들장이며 황토 같은 꼭 필요한 자재를 구할 수 있었던 것은 제 소문을 듣고 찾아오신 한 할아버지 덕분이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할아버지는 오래 전 이곳에 터를 잡고 사시던 분이었습니다. 이곳 석등골은 과거에 열 가구가 넘는 이들이 화전을 일구며 삶을 이어갔던 터라고 합니다. 할아버지는 눈시울을 적시며 옛 추억을 하나씩 꺼내셨습니다. “저쪽에는 벙개 할멈이 혼자 살았고, 저기 앞산 너머에 살던 이는 장에 갔다 술 한 잔 먹고 오다가 얼어 죽고…….”

 

할아버지는 당시 모든 것을 집터 가까이에서 구했다고 했습니다. 할아버지를 따라 덤불을 걷어내니 과연 무너져 내린 집터가 보였습니다. 흙을 파보니 그을음이 그대로 묻어 있는 두껍고 넓적한 화강암 구들장들이 쑥쑥 나왔습니다. 오랫동안 쓰던 구들장인지라 어지간한 불에는 터지지 않아서 더 좋답니다.

 

할아버지는 황토가 묻혀 있는 곳도 알려주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감사의 외마디를 질렀지요. 마치 신께서 할아버지를 보내주신 듯한 기분이었어요. 저는 마을 사람들이 저장고로 썼다던 구덩이 두 개도 덤으로 찾았습니다. 이듬해 농사를 지어서 감자와 고구마, 옥수수를 수확하면 보관 구덩이로 쓸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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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 숲에서 개울 물 깃기 ⓒ용서해


드디어 눈이 펑펑 내린 11월 말, 방 한 칸이 완성되어 첫 입주를 했습니다. 이곳은 워낙 높은 곳이다 보니 한번 내린 눈이 녹을 줄 모르기 때문에 나는 서둘러 옷가지며 겨울 양식을 옮기기 위해 눈 덮인 산을 몇 번이나 미끄러지며 오르락내리락해야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천기는 오르고 지기는 떨어진다는 소설이 지나갔습니다.

 

선조들이 알려주신 월력의 24절기 72후의 변화는 숲속에서 더욱 정확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숲에서 살아가기 위해 한 달에 두 번씩 바뀌는 음력의 절기를 꼭 확인해야 했습니다. 숲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일기가 변하는 만큼 어떤 바람이 비를 쏟고 가는지, 어떤 구름이 눈을 몰고 오는지 감지할 수 있으려면 하늘을 자주 보면서 피부에 와 닿는 습도를 느끼고 땅 내음을 맡으며 날씨 변화에 재빠르게 대응해야 했습니다. 땅이 얼 때와 녹을 때의 냄새가 다르다는 것도, 나뭇가지 부딪치는 소리가 세찬 파도 소리같이 들리면 비나 눈구름이 왔다가 물러간다는 것도, 그리고 하지 이후로 뜨거워진 땅이 밤새 온기를 머금었다가 다음날 이른 아침 안개를 피워내면 하루 종일 찌는 듯한 무더위로 이어지고 그런 날씨가 계속되면 조만간 장마철 국지성 집중 호우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도 숲에 들어와 알게 되었습니다.

 

‘가을 들 빛 머금고 자란 열매’ 뜻하는 가온들찬빛열음정과
설탕 들어가지 않고, 섬유질의 씹히는 식감도 좋아

추운 겨울에도 개울에서 길어온 물로 된장국을 끓이면 다른 아무것도 안 넣었는데도 그 맛이 놀랍기만 합니다. 한 모금 꿀꺽 넘기면 온몸에 햇살 같은 기운이 퍼져 금세 한기도 사라지지요. 야생의 물은 장맛도 더해주지만, 김장할 때 배추를 소금에 절여도 그 기운을 그대로 살려줘 아삭아삭 씹히는 식감이 참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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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해

 


숲속에서의 하루는 아궁이에 군불을 때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군불로 숲의 찬 기운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먼저 잔가지로 불을 지피고 불이 활활 타기 시작하면 바싹 마른 아카시아 나무를 넣습니다. 옆 마을 아주머니가 나무를 거꾸로 넣으면 애가 거꾸로 선다고 하셨지만 저는 애를 더 낳을 일이 없으니 저 편한 대로 아궁이에 거꾸로 나무를 넣습니다.

이렇게 먼저 불을 지펴야 그 다음에 뭐든 먹고 씻을 수 있습니다. 저는 아궁이 불에 긴 밤 출출할 때 먹을 감자도 굽고 밥도 짓습니다. 타고 남은 잿불 위에는 된장뚝배기도 올리고,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며 삐들하게 말려진 겨울 이면수도 올려 노릿노릿 구워냅니다.

지나다 들른 어느 스님이 무소유란 더 이상 소유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이 너무 많아서 더는 가질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나는 이곳 숲속에서 이처럼 가진 것이 이미 너무 많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춥고 고된 일을 하고 난 뒤에는 피로감 때문인지 단 것을 먹고 싶은 유혹이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커집니다. 그래서 모처럼 찾아온 유혹의 손님을 달랠 만한 재료가 뭐가 있는지 항아리와 양념 선반을 들여다봅니다.

 

- 가을 들빛을 가득 머금고 익어간 돌사과, 야생의 돌배
  * 저절로 씨가 번져서 난 식물 이름 앞에 ‘돌’ 자를 붙입니다.
- 얼지 말라고 뒷밭에 묻어두었다가 캐낸 흙 묻은 생강 한 줌
- 다람쥐와 나눠 먹는 잣 몇 송이
- 식혜를 졸여 만든 쌀 조청

 

이 재료가 전부인데 무얼 만들까 생각하다가 생강의 향을 좀 더 짙게 낸 ‘가온들찬빛열음’(가을 들 빛을 머금고 자란 열매라는 뜻의 순수 우리말) 정과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이 야생의 재료들에는 우리가 이미 길들여져 있는 한 가지 단맛만 들어 있지 않습니다. 달달하면서도 쌉쌀하고 아리고 시큼털털한 여러 가지 오묘한 맛이 섞여 있죠.

 

우선, 돌사과와 돌배를 강판에 갈고 생강은 돌절구에 찧어, 다시 칼로 잘게 다진 뒤 베 보자기에 넣고 짜서 즙과 건더기를 분리한 다음 즙은 가라앉혀 전분을 축출합니다. (개인 취향에 따라서 양을 조절해도 되겠죠?) 프라이팬에 간 사과와 배, 생강 건더기를 넣고 졸이기 시작해서 빛깔이 투명하게 변하고 과일 즙이 어느 정도 졸여지면 생강 전분과 조청을 함께 넣어 재료가 뭉쳐질 때까지 졸입니다. (한번 끓으면 불에서 잠시 꺼내 식히고 다시 끓이는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하면 타지 않고 농도도 잘 맞출 수 있습니다.) 알맞게 졸여졌으면 차게 식혀서 한 입 크기로 뭉친 다음 잣가루를 묻혀서 그릇에 담으면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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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온들찬빛열음정과 ⓒ용서해


설탕을 넣지 않은 ‘가온들찬빛열음정과’는 곡물에서 나온 단맛이라서 목을 자극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섬유질의 씹혀지는 식감까지 느껴져 먹는 즐거움이 배가 되지요. 여기에, 새가 똥 싼 씨가 참나무에 박혀 10년 이상 자란 겨우살이를 따서 미네랄이 듬뿍 담긴 야생의 물로 끓여 만든 차를 곁들여 먹습니다. 겨우살이차는 오랜 세월 나무 끝에 버텨온 힘으로 아낌없이 저의 찬 몸을 녹여줍니다. 그래서인지 1년이 지난 지금, 제 몸의 알레르기가 사라지고 겨울에도 제 손은 아주 따뜻해졌답니다.

겨우살이차와 함께 정과를 아껴 먹으며 자연에서 공짜다시피 얻어먹는 이 축복에 감사드립니다. 내친김에 아예 저녁밥까지 일찍 지어 먹고 종일 군불을 땐 온돌방에 등을 지지고 누우니 금세 두 눈이 감기고 세상 부러울 것 없는 무욕의 마음으로 돌아가 잠에 듭니다.
 

 

*용서해
교향악단에서 24년간 활동한 플루티스트. 호스피스 센터에서 말기 암 환자들을 위한 음악 봉사를 했고, 이들이 먹는 문제로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호스피스 요리’에 관심을 갖게 되어 요리 공부를 시작했다. 이후 환자와 가족들을 초대해 함께 음식을 먹고 이야기 나누며 삶의 마지막 순간을 용서와 화해, 평화 속에 보낼 수 있도록 도왔다. 이 이야기를 담은 저서로 <삶의 마지막 축제>(샨티, 2012)가 있다.

 

 

*이 글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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