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선화
올 겨울 이 엘베강 하류에는 유난히 축축한 진눈깨비만 쏟아져 눈 쌓인 것을 볼 수 없었는데, 어제 왼종일 함박눈이 오더니 오늘은 세상이 하얗고, 바람도 없고, 해까지 나네요. (진눈깨비, 함박눈, 싸락눈 - 독일말에는 없는 이런 눈이름들은 참 예쁩니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벤치에 쌓인 눈을 쓸어내리고 앉아 눈을 감고 겨울 해바라기가 됩니다. 문득, 아주 어릴 때, 시골집에서 처마 밑에 매달린 고드름이 햇볕에 반짝이며 녹아 방울방울 떨어지는 것을 무심히 바라보다 아늑한 졸음에 들었던 느낌으로 빠져듭니다.
그런데, 살짝 코를 스치는 흙냄새. 어? 봄? 듬성듬성 눈이 녹은 벤치 주변의 잔디밭에서 나는 흙냄새는 저를 현재로 되돌려 왔습니다. 그리고 크로커스 싹이 빼꼼이 올라오고 있는 게 보이겠지요! 아, 너는 우리가 봄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우울해 하고 있는 동안 그렇게도 열심히 땅 속에서 자라고 있었구나! 고마운 마음이 하나 가득합니다.
크로커스는 북유럽에서 봄이 오고 있음을 알리는 첫 꽃이지요. 크로커스, 수선화, 히야신스, 튜울립과 모란들의 꽃을 보려면, 서리가 내리기 전에 뿌리를 땅에 묻어주어야 합니다. 이 녀석들은 겨울의 모진 추위를 땅 속에서 이겨내야만 꽃을 피울 수 있다고 합니다. 매년 첫 서리 내리기 전 늦가을 한 달 동안만, 저희 동네 보행자 거리에서는 이런 꽃뿌리를 팝니다. 정원이나 발코니가 있는 사람들은 부지런히 사다가 땅에 박아놓고, 겨울 내 그저 잊고 있어야 합니다. 기다리지 말고 그냥 그리워하다보면 어느 새 크로커스를 앞세우고서 수선화가 피고, 튜울립이 필 즈음이면 모란도 잎파리를 피우기 시작하지요. 사실 제가 모란 뿌리를 처음 사서 심을 땐, 이런 칡뿌리 같이 생긴 놈에게서 그 현란한 꽃이 필거라고 정말 믿진 않았습니다.그런데 정말 피더라고요. “모란이 피기까지는…” 소쩍새 울음과 천둥과 서리가, 뿌리를 얼레고 다독이고 애무하는 거름이 되는 모양입니다. 모란의 뿌리를 본 사람에게 모란의 꽃은 그래서 현란한 아름다움 이상의 감동을 안겨줍니다.
크로커스(왼쪽)와 튜울립
작은 씨알 하나하나에, 하잘 것 없어보이는 양파 모양의 뿌리에, 죽은 나무뿌리처럼 보이는 꽃뿌리에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꽃들의 생애가 완전히 담겨있습니다. 그리고 ‘저마다’의 꽃이 되어 피어 나려고 온갖 힘을 다합니다. 모란은 오로지 모란이 되기 위해, 민들레는 민들레가, 해바라기는 해바라기가, 고사리는 고사리가 되기 위해 아래로는 뿌리를 내리고 위로는 잎을 내고 자라갑니다.
가뭄이 와도 홍수가 있어도 꽃들은 최선을 다합니다. 그리고 그 최선에는 ‘생명’ 외에는 아무런 목적도 목표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욕심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기적이라고 하지도 않습니다.그래서 꽃들은 포기라는 것도 모릅니다. 당신 자신이, 당신의 자녀가 어떤 꽃인지 혹시 아시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