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렇게 멋진 혼인 과정에서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다. 반대하는 ‘어떤 힘’에 부딪힌다. 주로 부모님 반대로 시작되지만, 반대하는 실체가 꼭 부모님이 아니다. 맞서야 할 실체가 뚜렷하지 않다. 가부장 문화에서는 엄마가 먼저 나선다. “나는 괜찮은데, 네 아빠가 이해하시겠냐?” 그럴 때면 큰맘 먹고 아빠를 만난다. 아빠와 어려운 얘기 나눌 생각 하면 심장부터 뛰는 딸들은 먼저 편지로 할 얘기를 전하는 슬기를 발휘한다. 아무리 무섭고 고집불통인 아빠라도 장성한 딸의 편지 받으면 마음이 부드러워진다.
그래도 반대가 꺾이지는 않는다. “나는 충분히 이해하겠는데, 큰아버지나 고모가 이해하시겠냐?”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만나서 해결해야 할 대상이 엄청 많아지고 모호해진다. 말이 큰아버지고 고모지, 집안 어른 누구든 등장할 수 있는 거다. 또 한 번 큰맘 먹고 거론된 집안 어른들을 찾아뵙고 말씀드린다. “네 혼인식인데 네가 알아서 하면 되지! 근데 손님들이 좀 이상하게 느끼지 않겠냐? 그냥 사람들이 하는 대로 사는 게 좋을 거다.” 이제 누구를 만나 풀어야 하지! 반대는 여전한데, 맞서야 할 실체가 뚜렷하지 않다. 제풀에 지치게 하는 구조다. 이러다 보면 많은 경우 그냥 지쳐서 포기한다.
관습적인 삶을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려다 보면 이런 실체 없는 싸움에 자주 직면한다. 이럴 때는 말로 해결하려 하지 말고 정성껏 나누되 그냥 뜻한 바대로 살면 된다. 그 삶이 참되고 고운 것이라면 결국 삶을 보고 이해할 것이다. 관습의 힘은 그럴듯한 말로 이길 수 없다. 말은 천 냥 빚을 갚는 힘도 있지만, 우리 삶을 떠도는 말은 많은 경우 실체 없는 허상이다.
말은 잘 주고받았는데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어릴 때 뚜렷하게 경험했다. 고등학생 때 우리 집을 어렵게 만든 사람을 만났다. 나름 담판 짓는 마음이었다. 다방이라는 곳을 처음 갔다. 엄청 긴장되었다. 준비한 얘기를 설득력 있게 했다. 반응도 기대 이상이라 뭔가 해결되는 듯했다. 근데 얘기를 마치고 나오는데 기분이 묘했다. 얘기는 잘되었는데, 달라질 게 아무것도 없었다. 허깨비와 싸운 느낌이었다. 세상을 지탱하는 다른 화법이 있다는 걸 느꼈다. 그때 깨달음이 이후 ‘말도 안 되는 세상’을 사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냥 뜻한 바대로 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