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태어나서 개인에게 가장 큰 사건은 죽고 사는 두가지 일이다. 이 생사 대사를 해결하겠다고 나선 이들이 선승들이다. 이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과 목전의 이해 다툼에 목을 매고 있을 때 이들은 바랑 하나 매고 일대사를 해결하기 위해 투신한다. 해탈열반하여 이고득락(離苦得樂·괴로움에서 벗어나 즐거움을 얻음)의 신세계를 열어 생사(죽고 사는 일)에 자재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다.
60평생 화두 하나 들고 정진한 지범 스님(62·서울 동작구 상도동 보문사 주지)이 선승들의 치열한 구도행을 담은 <선원일기>(사유수 펴냄)를 출간했다. 이 책엔 그가 죽음의 고비를 넘다들며 치열하게 맞선 수행담이 담겨 있다. 또 그가 출가 이후 40여년간 유명 선지식들과 은둔 수행자들과의 만난 뒷애기들이 담겨있다.
그의 수행담은 <화엄경>의 선재동자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진리를 깨달아가는 구도열정을 연상케한다. 선재동자와 달리 그의 구도가 선방으로 좁혀졌을 뿐, 그는 그곳에서 본래의 긍정적인 성격대로 선승 각자가 가진 장점들을 받아들여 자기화하려는 노력을 쉬지않았다.
특히 젊은시절 도를 깨닫기 위해 생사를 걸고 수행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지범 스님은 1987년 지리산 칠불사 선원에서 일종식(하루에 한끼만 먹음)을 하면서 참선정진했다. 당시만해도 한창때라 한끼만 먹고 버티려니 늘 코피가 터지고 좌복(방속)에 앉으면 졸기 일쑤였다고 한다. 그 해 여름은 무척 덥고 뜨거웠는데도, 그런 몸 상태임에도 정진을 이어가자 어느 순간 몸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고, 화두가 순일해 앉아있는 것이 가볍고 시간 가는 줄 몰랐다고 한다. 그는 몸과 마음에 변화의 계기가 된 칠불선원에서 삶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 지범스님
그는 여러 무문관에서 수행도 했다. 무문관은 방 밖에서 열쇠를 채우고 보통 100일씩 두문불출하고 참선정신하는 곳이다. 그가 계룡산 대자암 무문관에 간 게 1993년이었다. 선원에 다닌지 15년이 넘고 세속 나이가 40살이 가까워지는데도 공부시늉만 하고 죽는 것이 아닌가하는 급한 생각이 든 때였다. 그는 “역대 조사들은 20대에 일찍이 생사 대사를 끝마쳤는데 나는 이게 무슨 꼴인가하는 자책과 자괴로 괴로워, 이번에 끝내지 않으면 안에서 죽으리라는 생각으로 무문관에 입방했다”고 한다. 고향의 선친 묘소에 가서 이별을 고하고, 어머니 집 앞에서 삼배를 드리고, 세상이 마지막인양 눈물을 흘리며 무문관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공부가 순일하지 못하고 혼침과 망상으로 두달 가량을 허비하는 동안 엉덩이가 헐어 진물이 나고, 피가 좌복에 스며들고,온몸이 아파왔다. 그는 당시 문득문득 자살 충동까지 느꼈다고 한다. 몸이 쇠약해질대로 쇠약해져 누워있을 때 문틈 사이로 짐을 나르는 개미들을 보았다. 개미들은 턱에서 아래로 떨어지면서도 좌절하지않고 끝내 짐을 옮기고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미물들도 이렇게 해내는데 장부가 여기서 포기할 수 없다는 각오가 선 것이다. 그는 그동안 공부 열정을 컸지만 중생을 위한 자비심이 크게 부족했음을 느끼고, 이 날부터 매일 천 배를 하면서 화두를 들었다고 한다. 그랬다니 그제서야 화두가 들리고 좌복에 앉아도 몸과 마음이 편해졌다고 한다. 죽으려고 갔다가 크게 살아난 당시의 일을 그는 대자암 무문관의 기적으로 여긴다.
지범 스님은 1980년 출가한지 얼마되지않아 전북 순창 선운사 도솔암에 있을 때 어머니가 찾아와 눈물을 흘리면서 “기왕 출가했으면 서산스님 같은 도인이 되어달라”며 돈 3만원을 손에 쥐어주며 하던 당부를 잊지 못한다. 그가 수행에서 그가 나태해질래야 나태해질 수 없는 이유였다.
» 선방에서 참선정진하는 선승들
그는 그렇게 전국의 선방으로 수행을 다니면서 수많은 스승과 선지식들을 만났다. 그가 언급한 많은 스님들 가운데도 특별한 인연으로 느껴지는 선지식들이 있다. 먼저 언급된 분이 원공 스님이다. 서울 도봉산 천축사 무문관에서 6년을 정진한뒤 지금까지 40년 넘게 단 한번도 차를 타지않고 걸어다니면서 수행하는 스님이다. 지범 스님은 고교 3학년때 ‘전남 나주 다보사에 우화도인이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던중 광주 버스터미날에서 두분의 스님을 만나 출가했다. 한 명은 우화 스님의 상좌로, 그의 은사가 된 정진 스님이었고, 한 명이 바로 천축사 무문관 수행을 마치고 도반을 찾아온 원공 스님이었다. 원공 스님은 그의 은사와 함께 서울 불광동에 병상심방원을 개원해 병들과 힘들게 살아가는 스님과 불자들을 뒷받침했고, 지금까지 무소유의 삶을 살며 빈자들을 돕고 있다고 한다.
그는 또 1980년대 서울 도봉산 망월사선방에 갔을 때 선원장이었던 축서사 선원장 무여스님을 ‘수행자의 표상’이라고 했다. 그는 “만약 누군가 나에게 ‘이 시대에 가장 닮고 싶고 존경하는 스님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주저없이 무여스님이라고 말할 것이다. 무엇보다 언행일치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고 밝혔다.
그는 1999년 동안거 때 강원도 인제 백담사 무문관에 입방했을 때 회주였던 설악산 신흥사 조실 오현 스님을 ‘대한민국 거지들의 왕이요, 포대화상’이라고 지칭했다. 그는 “이 시대 최고의 원력보살이요 일체 상을 내려놓고 사는 오현 스님 같은 선지식이 설악산에 있어서 날카롭고 거친 도량이 이제는 공부하는 선승들로 가득찼고, 백담골 가을 단풍도 예전보다 더 붉게 물들어가고 있다”고 했다.
» 선방에서 3개월 안거를 끝내고 하산하려는 선승들
그는 또 학처럼 몸은 가볍고 공부의 기봉을 나투는데는 준엄하고 엄격했던 서옹 전백양사 방장, 오늘날 경북 문경 희양산 봉암사를 최고의 선도량으로 일군 서암 스님, 태산 같은 기운을 느꼈던 경남 합천 가야산 해인사 방장 성철 스님 등 일세를 풍미한 선지식들과의 만남도 소개했다.
이밖에 소백산 숨은 도인 봉철 스님이나 이 시대의 풍운아 월용 스님, 청빈 고고의 표상인 화엄사 종안 스님 등 열반해 다시 볼 수 없는 독특한 스님들에 대한 그리움도 담았다.
그가 선방에서 함께 지낸 다양한 수행자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먹고사니즘에 매몰된 자본주의 시대의 현대인과는 달리, 아직도 피안과 영원의 세계를 향해 불굴의 용맹심을 놓지않는 수행자들이 있다는 의외의 소식에 허망한 번뇌망상을 놓고 구도열정을 불태워볼 발심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하지만 세상 어느 곳도 세상과 별개로 존재할 수 없다. 그가 소개하는 선방의 풍토 변화도 마찬가지다. 1980~90년대까지만 해도 선방엔 20~30대가 주축을 이뤘다. 그러나 지금은 50~60대가 주축이다. 출가자수가 감소해 젊은층의 유입이 줄면서 선방도 고령화한 것이다. 수행 시간도 짧아졌다. 1980~90년데엔 고운사 선원에서는 동안거 때 100일 용맹정진을 했고, 해인사 퇴설당과 칠불사 선원, 동화사 선원, 봉암사 선원, 대승사 선원에서는 하루 12시간 이상 참선을 했는데, 지금은 대부분의 선원이 하루 8~9시간 참선하고 있다고 한다.
잠시 정진을 쉬고 삭발하고 목욕하는 날도 예전엔 보름에 한번씩이었는데, 지금은 봉암사, 송광사, 동화사 등 일부 선원을 제외하고는 10일 단위나 1주일 단위로 짧아졌다고 한다. 또 예전엔 차담을 매일 점심공양 후 대중이 함께 모여서 했는데 요즘은 각자 알아서 따로 하는 곳이 늘어나고 있다. 개인화에 따른 것이다.
» 경북 문경 희양산 봉암사에서 안거를 난 뒤 함께 기념사진
이런 현상은 선방 숙소에도 반영이 됐다. 예전에는 소임자 외엔 개별 방이 없어서 모든 선방 대중이 한방에서 함께 잤는데, 요즘은 1인1실 혹은 2인1실이 대세다.
따라서 선방도 1인1실이 보장되고 시설이 좋고, 3개월 안거를 끝낸뒤 주는 해제비가 많은 곳은 입방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고 한다. 요새는 통도사 선원이나 정혜사 선원, 월정사 선원, 대흥사 선원, 화엄사 선원 등이 선승들이 선호하는 도량이고, 봉암사 처럼 정진 분위기가 좋아도 시설이 좋지않고 해제비가 적은 곳은 예전에 비해 인기가 없다고 한다.
지범 스님들은 예전과 달리 능력이 없는 스님은 갈수록 선방도 뜻대로 다니기 어렵게 된 상황을 안타까워한다. 살림이 좀 넉넉하고 유명한 선사, 즉 능력있는 큰스님이 있는 사찰은 선승들이 3개월 안거(특별참선정진)를 끝내고 나면 여비격인 해제비를 더 많이 준다고 한다. 스님들은 몇백만원 가량의 헤제비를 받아 선방을 나가서 지내는 6개월을 살아가야한다. 통상 스님들이 선방에서 정진하면 ‘아는 인연들’(반연)이 그 선방을 찾아가 선승들 식사비 등 선방운영비에 보태라며 대중공양금을 보시한다. 그러나 평소 반연이 없는 선승은 선방 운영에 보탬이 되지못해 지난 안거때 탄 해제비를 다음 안거 때 선방 대중공양금으로 보태내놓아야 해서 해제한 뒤 연명하는 것도 쉽지않다는 것이다.
요즘 인기있는 선원은 대부분 인맥이 있어야 받아주기에 인연도 없고, 화주(공양금을 받아옴) 능력이 없는 청빈한 선승은 구참이라도 방부(입방을 신청) 들이기조차 어렵다고 한다. 지범 스님은 “내 주변에 인연 없이 곧게 살아온 선사들이 방부를 못들이는 것을 것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 보문사에서 선객들과 차담을나누고 있는 지범스님(맨왼쪽)
지범 스님은 은사 스님이 열반한 2000년부터 서울 동작구 상도동 국사봉 중턱 보문사의 주지를 이어받아 운영하면서 결제철엔 선방에 가서 수행하고 있다. 보문사는 지방에서 서울에 올라오는 선객들이 언제든 묵을 수 있도록 객실 4~5개의 방을 따로 마련해 24시간 절 대문을 열어놓고 있다. 예전과 달리 절집 인심조차도 달라져 지방에서 상경한 스님들이 서울에서 묵을 곳도 없는 처지를 잘 알기에, 어려운 살림에도 이렇게 객실을 운영하는데서 그의 마음 씀씀이가 엿보인다. 그래서 철마다 보문사엔 140~150명의 선객들이 묵어간다고 한다. 그런데도 지범 스님은 잠자리와 차·별식 공양은 대접하지만 여비를 제대로 주지 못한 것을 마음 아파한다. 그런데도 몸이 아파도 병원비조차 없는 선객을 위해 수십년간 들었던 보험을 해제했고, 지리산에 머물던 처소조차 팔아야했떤 스님은 지금도 객스님들로부터 삶과 수행과 지혜를 배우는 것을 소중히 여기며 모시고 있다고 한다. 그가 책날개에 내놓은 시 아닌 시가 구도심으로 일관한 담백한 수행자의 삶을 말해준다.
‘낮에는 탁발하고/밤에는 좌선으로/늦은 밤 잠에 들고/새벽에 일어난다//산중의 중노릇/고달프고 힘들어도//그래도/내가 좋아/내가 좋아’
혹자는 선방의 수행이 무슨 가치가 있냐고 비판할 수 있다. 무위도식이라는 비판도 가능하다. 그러나 반대로 이 세상적인 것, 가령 적자생존을 위한 매진은 무슨 가치가 있느냐는 물음도 가능할 것이다. 어쨋든 이 세상이 동류의 인간들만이 있다면 얼마나 삭막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