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찰에서 절을 하는 모습. 사진 곽윤섭 기자
서울에 있는 지인을 만나고 돌아오는 골목길에서 전신주에 붙어있는 글을 무심코 읽었다. “깨진 화병을 2018년 2월 10일 오후 7시 59분에 몰래 버리셨다가 3월 3일 오전 6시 4분에 가져가신 할머니,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뭔가 모를 신선한 느낌이 들어 폰을 꺼내 찍어두었다. 돌아오는 기차에서 글에 담긴 전후사정을 헤아려 보았다. 아마도 근방에 사는 어느 할머니가 밤에 깨진 화병을 버렸던 모양이다. 그게 폐쇄회로 티브이에 찍혔을 것이고, 어느 누구가 원상복귀하라고 메모를 남겼을 것이다. 그걸 안 할머니는 이십여일이 지난 뒤에 다시 집으로 가져간 것이다. 이 사연을 대하니 할머니의 정직하고 용기있는 ‘행동’과 아울러 글로 감사를 전한 분의 ‘마음’이 보여 흐뭇했다. 할머니는 창피를 당하는 불이익이 두렵거나 혹은 양심에 비추어 보아 부끄러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경고의 글을 올린 이는 무안해하고 있을 할머니의 마음을 헤아렸을 것이다. 이렇듯 이심전심의 깊은 이치는 석가모니와 가섭 존자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네 일상에도 흐르는 것이다. 참회와 용서, 그리고 화해는 진심과 사랑으로 이루어짐을 새삼 실감했다.
수행승들이 지켜야할 규칙에는 이런 조항이 있다. “용서하지 않는 것도 허물이다” 이 훈계는 아마도 다음과 같은 사례 때문에 제정한 되었을 것으로 잠작된다.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의 일이다. 어느 비구가 동료들에게 사소한 잘못을 저질렀다. 그는 곧 자기가 잘못한 것을 깨닫고 상대에게 정중히 사과하고 용서를 빌었다. 그러나 사과를 받는 쪽은 그것만으로 부족하다고 느꼈던지 그를 용서해 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 계속 큰소리로 윽박지르고 나무랐다.
옆에서 지켜보던 비구들은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는 쪽이 너무 한다 싶었다. 그래서 ‘이제는 그만 사과를 받아들이고 용서를 해주라’고 충고했다. 그래도 그는 막무가내였다. 오히려 제3자는 참견하지 마라고 호통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싸움을 말리던 사람과 시비가 생겨 목소리는 더욱 커지게 됐다. 그러나 보니 작은 시비가 큰 시비가 되고, 마침내 부처님조차 무슨 일인지 걱정할 정도가 된 것이다.
싸움의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부처님은 싸우는 비구들을 불러모아 놓고 이렇게 타일렀다. “잘못을 하고도 뉘우치지 않는 것은 잘못이다. 잘못을 사과하고 용서를 비는데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잘못이다. 그들은 모두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잘못을 하고 그것을 뉘우치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잘못을 비는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은 더 훌륭한 일이다. 이들은 모두 현명한 사람이다”
중생들이 살아가는 세계는 늘 다른 견해와 이해다툼으로 갈등한다. 부처와 예수의 시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인지혁명을 이룬 사피엔스의 위대함은 협동하고 상생의 길을 찾는 데 있다고 하지 않는가? 협동과 상생을 이루는 바탕은 아마도 진심으로 성찰하고 부끄러워하는 일이다. 그리고 진심으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일이겠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손을 모아 기도했다. 할머니! 더 건강하십시오. 감사의 글을 쓰신 분! 복 많이 받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