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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재 목사 신학자의 되새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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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jpg


한 청년이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를 놓고 틈만 나면 무등산 억새밭을 찾아 기도하고 사색했다. 그는 ‘일생을 바쳐도 후회하지않을 가치 있는 일을 알려달라’고 기도 아닌 기도를 했다. 그가 어느날 성경을 접했다. 성경은 목마른 그에게 생수처럼 시원하고 달았다. 그는 마침내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복무할 것, 예수 복음을 위해 살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다.

 그는 북한산 아래 흰눈과 송림에 덮은 수도원 같은 한국신학대학(한신대)를 찾았다. 그는 그 곳에서 큰 스승들을 만났다. 김재준, 함석헌, 김정준, 전경연, 박봉랑, 서남동, 문익환, 문동환 등 머리나 입만이 아니라 삶으로 하나님 나라를 증언하기 위해 치열하게 산 선구자들을 만난 것이다. 그는 스승들을 따라 신학했고, 구도했다. 도그마를 쌓는 신학을 넘어서는 신학이었다. 서양을 유학했지만, 그는 동양의 유교, 노장, 불교까지 폭넓게 섭렵해 신학의 지평을 넓혔다. 

 그가 바로 김경재(78) 한신대 명예교수 겸 목사다. 대표적인 신학자인 양심적 종교인으로 후배들의 존경을 받는 그가 신학 여정 60년을 뒤돌아보고 미래를 내다보는 신학 순례의 종합보고서를 내놨다. <틸리히신학 되새김>(여해와함께 펴냄)이다. 라인홀드 니버와 더불어 20세기에 가장 주목받는 신학자인 폴 틸리히(1886~1965)의 신학을 소나 염소나 낙타가 여물을 씹고 삼키고 내놓아 다시 씹으며 되새김하듯한 것이다. 틸리히의 대표 저서인 <조직신학>을 텍스트로 삼아 틸리히 신학론 중 50개 핵심 소주제를 간추려 동서양을 넘나드는 깊은 사유로 되새김한 것이다. 건강이 좋지않은 몸으로 최후의 저작이란 생각으로 내놓은 역작이다. 가령 50개중 ‘노트1’의 주제는 ‘궁극적 관심’이다. 일단 틸리히의 텍스트를 이렇게 제시한다.

 

 궁극적 관심은 무조건적인 관심이다. 그 관심은 개인의 성격, 욕망, 환경 등 어떤 조건에도 흔들리거나 좌지우지되지 않는다. 궁극적 관심은 총체적 성격을 지닌다. 다시 말해서 우리 자신과 세계의 어떤 부분일지라도 궁극적 관심에서 벗어난 자리가 없는 것이다. 총체적 성격을 지닌 관심은 무한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진정한 종교적 관심은 마음이 이완되거나 해이해지는 순간이 불가능하다. 종교적 관심이란 궁극적, 무제약적, 총체적, 그리고 무한적 성격을 지닌 관심을 일컫는다.-<조직신학> 제1권, 12쪽.

 

 되새김-.jpg 이어 필자는 이를 두고 ‘되새김’한다. 필자는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성경 구절을 들어 ‘마음, 목숨, 뜻, 힘을 다하여 사랑하고 관심하는 것’이 종교의 특징이라고 한다. 틸리히는 종교란 무엇인가에 대해 정의를 내린다면 여호와, 알라, 상제, 하나님 등 신의 호칭이 다른 특정 종교의 신을 참 신이라고 믿는 태도나 특정 종교가 역사 속에서 성취해놓은 위대한 상징, 교리, 교학,경전, 성직 체계나 이론을 믿는 것이 아니라 ‘종교란 궁극적 관심에 붙잡힌 상태’라고 했다는 것이다. 종교는 성숙한 인간의 인격적 결단과 선택과 참여의 행동을 필요로 하지만, 인간 실존적 주체성 그 이상의 어떤 힘, 의미, 뜻에 감동하고 사로잡히면서 참여하는 성격을 지닌다는 것이다. 어떤 인간에게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추구하도록 추동하고 매력을 주는 실재는 결코 평범할 수가 없다고 한다. 기독교 내에선 ‘성령 바람’을 중시하는 국내 보수 신학계와 달리 이성적 합리적 신학을 추구해온 노학자가 종교의 본령을 ‘사로잡힘’으로 본 것이 주목할만 하다. 냉철한 신학 여정을 거쳐 그 자신도 ‘예수 그리스도에 사로잡힌 그리스도인’임을 다시 한번 고백하고 있는 셈이다.

 필자는 자신이 사로잡힌 예수 그리스도를 왜 메시아라고 하는지를 ‘예수 그리스도의 궁극적 계시’편에서 되새김했다. 우선 틸리히가 변증신학에서 ‘왜 역사적 예수, 33년밖에 살지 않은 유대인 랍비, 그의 삶의 과정과 종국이 메시아의 모습과 거리가 먼 사람, 그 사람을 왜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가?’라고 묻는 현대인들에게 판에 박은 교리적 대답 대신 기독교란 예수 숭배론이 아니라고 답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인간 예수가 갖춘 위대한 종교적 지혜, 윤리적 교훈, 그의 예언자적 모습 등을 우러러보고 그를 신적 존재라고 숭배하는 예수론을 넘어서는 것, 곧 ‘그리스도론’에 기초한다는 것이다.


 인간 예수가 왜 그리스도일까. 김 목사는 “인간 예수가 지난 모든 위대성을 스스로 부정하고 비우고 낮추면서 예수가 ‘아버지’라고 친근하게 부르던 ‘하나님, 궁극적 실재’의 본성과 사랑을 인류에게 남김없이 보여주고, 끝까지 땅 위의 사람들을 믿고 사랑한 데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험한 세상을 살수록 ‘십자가에 달린 그분’이 참 구세주라고 고백하는 수많은 땅 위의 현자들, 과학자들, 지성인들, 민초들이 오늘도 계속 존재한다는 사실은 결코 범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가장 많이 회자되지만 직접 본 사람은 없다. 그래서 존재에서 비존재, 즉 있다든가 없다든가 360도 스펙트럼의 관점이 존재한다. 다석 유영모는 ‘없이 계신 분’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틸리히는 하나님을 ‘존재 자체’라고 했다. 필자는 이에 대해 “틸리히가 하나님을 ‘존재 자체’라고 부르고 싶어 하는 진정한 이유는, 인간이 만든 종교적 우상 신들을 폭로하고 허무주의가 삶을 밑동에서부터 허물어뜨리려는 시대 사조를 극복하면서, ‘아우슈비츠 이후 시대’의 ‘존재에로의 용기’를 현대인들에게 불어넣어주려고 한 것”이라고 밝힌다. 우리가 길을 걷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서려면 돌부리가 박힌 대지를 짚고서만 일어설 수 있는데, ‘돌부리가 박힌 대지’ 그것이 ‘존재 자체’를 나타내는 상징이 아니냐는 것이다.


 예수를 누구로 볼 것인가는 초기 기독교 교리를 세울 때부터 큰 논쟁이었다. 필자는 신약 성서의 복음서에서 직간접적으로 전해지는 예수의 가르침을 들어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신성모독죄를 절대로 범하지 않았다”고 한다. 예수의 율법 해석과 기적 행위를 보고 감탄한 나머지 한 추종자가 “선한 선생님이여!”라고 불렀을 때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으니라”하시면서 선한 선생님 칭호도 사양했으며,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라고 강조하면서 하님의 뜻에 철저히 순명함으로써 자기를 투명하게 비우고 하나님만을 드러나게 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것이다. 또 예수가 “바버지와 나는 하나다.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이다”라고 대담하게 선언한 것도 그 하나 됨이 형이상학적 본질의 동질성 때문이 아니라 뜻의 일치, 사역의 일치, 상호내주의 경험에 기초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필자는 기독교의 원죄론에 대해서 좀 더 폭넓은 관점을 제시한다. 예수는 기독교 교리가 확정한 원죄론으로 단죄하지않았다는 것이다. 인간이 유혹과 약함에 휩싸이지만, 그들이 자기 자신의 믿음으로 구원을 일으킬 수 있는 가능적 존재라고 보았고, 예수가 하는 일은 보통 사람도 할 수 있고 더 큰 일도 가능하다고 인간성 자체를 믿고 긍정한 분이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특히 기독교의 핵심인 ‘구원론’을 좀 더 명확하게 해석해준다. 틸리히가 조직신학자답게 잘 정리한 대로, 기독교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존재의 힘과 의미에 참여하고 그것을 수용하며, 그 의미와 능력에 의해 변화받는 것을 통해 구체적으로 구원을 체험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새 생명에 참여하는 구원의 모습을 ‘중생, 거듭남’이라 부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나타난 새로운 존재의 힘과 의미를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구원의 모습을 칭의라고 하며, 그 새로운 존재의 능력 의미에 의해 인간 실존의 옛 존재가 거룩하게 변화되어가는 과정을 성화라고 부른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김 교수는 틸리히가 빠뜨린게 있다고 지적한다. 중생, 칭의, 성화를 넘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간다는 영화(glorification)이 화룡정점을 찍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바울이 말한바 ‘영원한 생명의 기업’에 초청받아 참여하는 영생에 대한 소망의 구원을 뜻한다고 한다. 그러나 당순히 기대하거나 희망하는 사항이 아니고, 부분적으로 청동거울 속에서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나마 현재적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경험하는 사후생이라는 것이다. 틸리히의 신학관점을 따르면서, 일부 그를 뛰어넘는 영성가적이고 수도자적 해석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이밖에도 성령과 신비주의, 부활 등에 대해 동서양을 넘나드는 통찰을 담아 틸리히와 자신의 해석을 되새김질해서 후학들에게 새로운 신학의 지평을 열어보여주었다. 그것은 편협의 벽을 넘어 동서양을 넘나들면서 동양의 지혜로 신학을 더욱 풍성하게 하려던 신학 여정에 이미 담겨있었다. 제자인 김희헌 향린교회 담임목사가 이를 증언한다. ‘한번은 김 교수님이 중간고사 시험문제로 <반야심경>을 외워서 쓰게 했는데, 제자들은 영문도 모른 채 기독교와 불교의 낯선 경계를 오가며 끙끙댔지만, 그것이 사상의 편협과 나태를 깨뜨리기 위해 내리친 스승의 죽비였음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경재-.JPG» 김경재 목사 교수가 평생 봉직해온 한신대 교정에서 스승 장공 김재준의 글씨 앞에 서있다


 필자의 후배와 제자들은 추천사에서 주로 그가 ‘앉은 자리’인 한반도와 동아시아를 떠나지않고, 그 사상의 기반 위에서 자신이 사로잡힌 기독교를 되새김했다는 점을 무엇보다 높게 평가했다.

 이정구 성공회대 총장은 추천사에서 “한국 전통 사상과 문화적 감성으로 재차 되새김을 해주는 한국 신학사상사에서 새롭게 융기한 큰 산임에 틀림없다”고 했고, 채수일 경동교회 담임목사도 “자기 삶의 자리가 한국, 아니 동아시아인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새로운 신학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도전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정배 전 감신대 교수 겸 한국문화신학회 회장은 “서구적 이성이 아닌 동북아의 종교문화적 상황에서 틸리히 신학을 재구성한 저자의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고 했고,  김주한 한신대 신학대학원장은 “기독교 신학의 전통적인 범주의 현대 문화가 틸리히 신학을 통해 어떻게 통전되고 융합될 있는지를 보여줬다”고 평했다. 차옥숭 전 이화여대 인문과학원 연구교수도 “한국 기독교 신학에서는 추상적 교리와 목회적 실용만 남고 ‘사상’이 사라져 간다는 한탄이 들리는데 이 책은 이런 시대에 신학이 무엇인지를 되돌아보게 할 것”이라고 했다.

 정경일 새길기독사회문화원 원장은 “‘서양의 지혜자 틸리히’와 동양의 지혜자 김경재‘가 나누는 당대적, 주체적 대화에 귀 기울여 되새김하면 21세기에도 여전히 불안에 흔들리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그 흔들림조차 ‘존재의 근거’위에 있음을 신뢰하며 ‘새로운 존재’가 될 용기와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추천했다.

  

 ※김경재 목사= 한신대, 연세대 연합신대, 고려대 대학원 철학과, 미국 더뷰크대, 클레어몬트 대학원, 네덜란드 위트레흐트대를 거쳐 한신대 교수, 한신대 학장, 크리스찬아카데미원장, 씨알사상연구원장, 장공기념사업회장을 지냈고 현재 한신대 명예교수와 삭개오작은교회 원로목사로 있다. 저서로 <이름 없는 하느님>, <아레오바고법정에서 들려오는 저 소리>, <함석헌의 종교시 탐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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