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지암과 스탠드빠
» 서울 서촌 이서재의 집전에서 <하루 일지암>이라는 행사 도중 일지암 암주 법인 스님이 방문객들과 차담을 하고 있다. 사진 이서 화백
“산중 절집은 바다와 같다”.
석가모니는 승가를 바다에 비유했다. 크고 작은 온갖 산의 계곡의 물이, 이 강 저 강의 물이, 심지어 가정에서 설거지한 물들이 흐르고 흘러 바다에 모이면 ‘바닷물’라는 한 이름으로 불린다. 다양한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출가하여 승단의 일원이 되면 ‘수행자’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평등과 화합을 지향하는 승가의 뜻을 읽을 수 있다.
그 시절이 그랬듯이, 지금도 산중 절에는 온갖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다. 산중을 찾는 벗들은 너나 없이 차 한잔의 맛으로 만난다. 성별, 직업, 빈부의 구별은 얼마나 헛되고 허망한 것인가. 오직 하심과 무심으로 차 한잔에 주의하고 집중한다. 그리고 맑고 향기로운 차맛을 벗하며 이야기를 나눈다. 이른바 차담이다. 그런데 차담이 늘상 맑고 향기로운 대화만 오가는 게 아니다. 괴롭고 아픈 이야기, 힘들고 부끄러운 고백도 오고간다. 그래서 한적한 차담이 진중한 상담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얼마 전 대흥사에 어느 여성 분이 오셨다. 그분과 많은 시간 차담을 나누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그 분은 차담의 풍경과 효능에 대해 색다른 견해를 내어놓았다. 그분 말씀의 요지를 말하자면 ‘일지암의 법인스님과 스탠드빠의 여성’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겠다. 그분의 발상과 상상에서, 정신의 깊이를 말한 ‘차와 선의 만남’의 한 축과, 오고가는 대화로서 ‘차와 술의 만남’이라는 한 축을 발견했다. 하여 그분에게 글을 요청했다. 아래의 글이다.
» 법인스님이 홀로 머물고 있는 일지암
“스님. 이 향 받침, 참 예쁘네요. 저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데요.”
차를 한참 마시다가 법인스님께서 향에 불을 붙여 사방 반뼘도 채 안 되는 백자 향 받침에 꽂으셨을 때 오갔던 대화이다.
“비교하지 마세요. 이것은 이것대로 예쁘고 저것은 저것대로 예쁘죠. 장미꽃은 장미꽃대로 예쁘고 안개꽃은 안개꽃대로 예쁜 것처럼… 저 향 받침이 들으면 얼마나 섭섭해 하겠어요?”
법인스님은 피아니시모의 조용함, 안단테의 속도, 그리고 첼로처럼 낮은 음정으로 말씀하셨다. 그 잔잔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일갈의 법문에 나는 또 한 차례, 일각했다.
이 세상 모든 존재가 부처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도 또 다시 사고의 습으로 이런 무례를 저질렀다. 나는 마음 속으로 폄하했던 ‘저 향 받침’에게 머리 숙여 사죄하고 참회의 기도를 올렸다.
해남 대흥사에서 한달째 머물던 어느 휴일 저녁, 저녁 공양을 마치고 일지암에 올라 법인스님께 차를 청했다.
사찰에 머물던 모든 순간이 행복했지만 또 한 차례 분별, 비교의 습을 일으켜볼 때 내가 가장 좋아했던 시간은 스님과의 차담 시간이었다.
법인스님은 초의선사가 머무셨다는 일지암에서 공양주 없이 홀로 살고 계시는 수행자이다. 스님은 오늘날 템플스테이에 해당하는 ‘새벽숲길’이라는 프로그램을 불교계 최초로 시작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아무리 값비싼 브루고뉴 와인 페어링 디너도 일지암에서 법인스님과 함께 하는 차담만큼 호사스러울 수는 없었다.
항아리에 담아 숙성시킨 물을 은으로 만든 주전자에 넣어 끓인 찻물은 이미 예사로운 물이 아니다. 스님은 예쁜 차통(Tea Box)에 담겨 있던 청차(Blue Tea), 홍차(Red Tea), 황차(Yellow Tea), 보이차까지 종류대로 꺼내어 우려주셨다. 로컬 작가들이 만든 찻주전자와 찻잔, 초승달과 초가집을 수놓은 다포는 로열 알버트 찻잔과는 또 다른 매력으로 카페 일지암을 찾은 게스트들을 감동시킨다. (또, 저지른다. 이 비교하는 습…..)
영롱한 색깔을 마시고, 조르르 흐르는 소리를 마시고, 향기로운 내음을 마시고, 미각의 절정을 마시고 나면 몸은 미묘한 각성의 상태가 된다. 피와 함께 기운이 돌고 의식은 더욱 부드러우면서도 또렷해진다.
차를 마실 때는 찻물을 탕관에 따르고 불을 붙이고 물 끓기를 기다리고, 끓인 물을 식히고, 찻잔과 다관을 덮히고, 찻잎을 다관에 넣고, 차를 우려내고, 우려낸 차를 수구에 옮기고 다시 찻잔에 따르는 그 모든 순간에 깨어 있게 되고 그 순간들과 만나게 된다. 차를 입에 머금고 마시는 순간만이 아니라 모든 순간이 꽃봉우리임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렇게 매순간 깨어 있으면서도 애씀이 없는 상태에서 즐기는 차, 그래서 선지식은 차 마시는 것과 선이 다르지 않다는 의미로, ‘다선일여(茶禪一如)’라 말씀하셨던 것이다.
차를 우려 앞에 앉은 손님들의 찻잔에 차를 따라주는 것을 팽주라고 한다. 법인스님은 몸에 베어 자연스럽고도 멋스러운 손놀임으로 객들에게 차를 따라주신다. 객들의 몸을 차의 온기가 덥혀 주고, 한 입 머금은 차는 흐릿했던 정신도 명징하도록 깨워준다. 이는 분명 각성의 상태이지만 이제까지 깨어있지 않은 채 살아가던 일반인들로서는 평상시의 의식 상태와 다르기에, 변성 의식 상태라고도 할 수 있다.
앞에 앉은 이들은 따뜻한 차로 인해 몸이 열리고 마음이 열려 스님에게 고민도 말하고 상담을 청하기도 한다. 그러면 스님은 사람들의 고민을 비판하지 않고, 조언하지 않고 그냥 들어주신다. 침묵으로 이야기를 듣던 스님은 객의 말이 끝나면 잠시 눈을 감으신다. 그렇게 존재(Presence)와 하나가 된 스님은 최소한의 언어로 객을 껴안는, 따뜻한 공감의 언어를 풀어놓으신다. 그 대화의 치유력에 많은 이들이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그래도 괜찮다. 눈물이란 가슴과 마음이 열릴 때 나오는 정화(Purification)의 액체이니까.
나는 스님이 한 가운데 앉아 나누는 차담을 보며 불경스럽게도 여성 바텐더들이 있는 스탠드바를 떠올렸다. 남자들을 따라 스탠드바에 가봤던 경험을 기억해보자면 여성 바텐더는 앞에 앉은 남자 손님들에게 그들이 마시고 싶어하는 술을 따라주는 것과 함께 말꼬를 틀 수 있는 말을 몇 마디 던졌었다. 그녀들은 부스에 선 채로, 아내 또는 애인이 있어도 외로운 남자들, 또는 혼자라서 외로운 남자들의 말을 ‘있는 그대로’, ‘비판 없이’, ‘포용하며’ 들어줬다.
파울로 꼬엘료의 책, <11분>의 주인공, 마리아 역시 ‘비판 없이’ 남자들의 말을 들어준다. 수많은 남자 손님들이 그녀를 찾아오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발가락을 만지며 우는 남자, 자기를 좀 때려달라는 남자, 욕을 해달라고 애원하는 남자 등 별의 별 남자들을 다 만난다. 그 남자들은 여염집 여자들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은밀한 욕망을 직업 여성인 마리아에게는 여과 없이, 솔직히 털어놓는다. 그녀가 비판하지 않고 조용히 들어주기 때문이다.
법인스님 역시 스탠드바에 서있는 여성 바텐더들처럼 차담에 참가한 이들의 말을 있는 그대로, 비판 없이 들어주신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담을 나누다 힐링을 체험하는 것이다. 스탠드바에서 그녀들이 내놓은 음료 역시 향기롭고, 맛이 있다. 차이점이라면 그녀들이 따라주는 음료는 인간의 의식을 각성과는 완전히 반대방향으로 이끈다는 것.
‘청년출가학교’와 ‘청년암자학교’를 운영하는 등, 유독 이 땅의 소외받은 청년들에게 남다른 애정을 품어오신 법인스님. 스님과의 만남으로 많은 청년들이 다선일여를 체험하기를… 그리고 스스로가 만든 상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치유를 경험하기를….
– 스텔라 박(Stella Park, 미주현대불교 칼럼니스트)
* 사족) 고려시대 백운거사 이규보는 이렇게 말했다. 끽다음주유일생(喫茶飮酒遺一生) 고래풍류종차시(古來風流從此始), “우리 생에 무엇이 남는가? 오직 차마시고 술마시는 일이라네”. 어느 뉘는 화를 낼지 모르겠다. 어디 맑고 고결한 차와 술을 비교하느냐고. 허나 생각해 보라. 일체가 공(空)이라고 했다. 어찌 술에 본디 선악과 미추가 있겠는가. 오직 절제하지 못하고 조화롭지 못하는 인간이 문제이지. 차마시는 나의 고아함을 뽐내고 집착하면 그도 독이다. 근심을 풀어 놓고 기쁨이 오가는데 때로는 술이, 때로는 차가 제격이겠다. 오직 그때 그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