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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애도인 오현 스님이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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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오현.jpg» 26일 몸을 벗은 무애도인 설악산 신흥사 조실 조오현 스님


이 시대 ’마지막 무애(無碍)도인’이 떠났다. 설악산 신흥사 조실 설악무산 조오현 스님이 26일 오후5시11분 강원도 속초 신흥사에서 입적했다. 승납 60년, 세납 87세다.

  고인은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7살에 입산해 1959년 성준 스님을 은사로 직지사에서 출가했으며, <불교신문> 주필과 신흥사·계림사·해운사·봉정사 주지를 거쳐 강원도 설악산권의 대표사찰인 신흥사와 백담사 조실과 조계종 조계종 원로의원을 맡고 있었다.


 특히 고인은 백담사가 출가 본사인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인 ’만해 한용운’의 애민·생명·평화 사상을 기리기 위해 1996년 만해사상실천선양회를 설립해 시작한 만해축전을 매년 8월 강원도 인제에서 개최해 전국의 문인, 지역민이 함께 하는 축전으로 만들고, 이 자리에서 시대정신과 양심을 상징하는 인사들에게 종교를 가리지않고 만해대상을 시상했다.   또 강원도 인제 백담사 초입에 2003년 만해마을을 조성해 문인들의 창작공간으로 내놓았다. 1999년 <불교평론>을 창간해 논쟁 없는 불교계가 논쟁으로 시대정신을 창출하게 했고, 만해가 창간했던 <유심>을 복간해 시와 학문과 세상이 회통하게 했다.


   고인은 무엇보다 이데올로기에 갇혀 물고뜯는 분단시대를 넘어선 국량을 보였으며, 종교와 승속, 국가의 벽을 넘어선 장쾌한 대장부였다. 그가 만든 만해축전은 만해와 <조선일보> 설립자와 방응모와의 각별한 인연을 들어 <조선일보>와 공동주최해 ‘독립운동가 만해와 친일신문은 어울리지않는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만해대상은 김대중 전대통령, 리영희 선생, 이소선여사, 고은 시인, 김지하 시인, 조정래 소설가, 강원용 목사, 함세웅 신부, 법륜 스님, 두봉주교, 백낙청 선생, 신영복 선생 등  당대 대표적인 진보인사들에게 종교의 벽을 넘어 시상됐다. 그가 아니면 남남갈등의 시대에 대표적 우익신문의 이름으로 ’좌익’으로 손꼽힌 이들에게 월계관을 씌워주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그 뿐이 아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남미, 중동 등 제3세계에서 군부와 독재자들의 폭압 아래서 목숨을 걸고 외로운 투쟁을 전개하는 평화·인권운동가들을 발굴해 시상함으로써 그들의 운동을 간접 지원했다.


오현 설악.jpg» 3개월간 밖에서 열쇠가 채워진 백담사 무문관 수행을 마치고 나오는 조오현 스님


 그는 걸림이 없는 언행을 보인 무애도인이자 기인이었다. 그를 대면한 이들은 오불조불한 관념의 세계에 갇히지않은 호쾌함에 매료됐다. 그는 말년에 매년 3개월씩 두차례, 즉 일년의 절반을 백담사 무문관에서 보냈다. 무문관은 밖에서 열쇠를 잠그는 ’폐관 수행실’이어서 구멍으로 들어오는 하루 한끼의 식사를 받으며 3개월간 방안에 갇혀 오직 참선정진을 하는 곳이다. 그가 무문관 수행을 끝낸 뒤 대중들 앞에서 한 설법은 절집에서는 전에 듣지 못한 것들이었다. 천년전 선사들의 말을 되풀이하는 앵무새 설법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 것이었다.


  그는 “부처님도 석가족이 멸망할 때 전쟁을 막기 위해 나 홀로 반전시위를 한 반전운동가였다”면서 남북관계에 대해서도 화통하게 마음을 열 것을 촉구했다. 그는 “남북관계에서 ‘사과를 받아야겠다거나 용서를 못 하겠다는 것은 감정싸움이나 핑계에 불과하고 자기 것을 빼앗길까 봐 두려워하는 기득권층의 인식이나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춤추기 때문’이라며 “미움과 분단이 지속되면 우리 국민은 숨통이 막히니 우리 국민이 살아갈 길은 부산에서 출발한 열차가 이북·시베리아를 거쳐 유럽의 여러 나라에 도착하는 길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2015년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한국학센터의 초청 강연 때 ‘북한 핵 폐기’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미국에선 서부 개척시대부터 총잡이들도 총을 동시에 꺼내고 내려놓는 게 정도 아니냐”며 “미국은 기독교 정신으로 나라를 세웠으니 핵과 살상 무기를 포기하는 모범을 보여 그 막대한 돈으로 복음 사업에 사용하라”고 권했다.


 그의 법문은 늘 허울의 불교를 던져버린 파격의 연속이었다. 그는 “절마다 교회마다 방송마다 신문마다 진리를 이야기하지만 시끄로운 소음이 된 지 오래다”면서 “노망기 있는 이 노승의 설법을 듣기보다 동해 바다의 파도소리와 설악산의 산새소리, 계곡 물소리를 듣는 게 낫다”고 말했다. 그는 또 “대장경의 글과 말 속에 무슨 진리가 있느냐. 여러분이 오늘 산문을 나가 만나는 사람들과 노숙자들의 가슴 아픈 삶 속에서 진리를 찾아라”고 경책하며 “절집은 승려들의 숙소일 뿐이니 소설가 이청준의 말대로 절집에만 ’당신들만의 천국’을 만들지 말고 세상 속에서 진리를 찾고 세상과 함께 하라”고 했다.

 그는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해 세월호 유족들을 위로하고 돌아간 뒤엔 “환자가 없으면 의사가 필요없듯이 고통받는 중생이 없으면 부처도 필요 없다”며 “천년 전 중국 신선주의자들, 산중 늙은이들이 뱉어놓은 사구(죽은 말)만 들고 살지 말고 교황처럼 중생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라”고 했다.



오현스님.jpg» 무문관 수행을 마치고 같은기간 설악산권 사찰에서 안거에서 참선정진한 선승들에게 설법을 하는 조오현 스님


 그의 행은 말만으로 그치지않았다. 겉모습은 격식을 떠난 파격적인 언행으로 기인이자 이인으로 비춰졌지만, 그는 가장 힘든 중생들의 손을 놓지않고 힘을 실어주는 ’자비보살’이었다. 

 기독교 주일학교 교사를 하면서 청계촌 피복노동자로 노동운동을 하다 분신한 전태일을 기리는 전태일기념사업회에 아무도 몰래 매달 후원금을 보냈다. 이 사실은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늘 “조오현스님을 뵙고 싶다”고 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가 2011년 이 여사의 장례식장에 조문을 감으로써 유족들에 의해 밝혀졌다. 고인은 백담사가 있는 인제 산골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아이들 수백명에게도 대학 재학 때까지 남몰래 장학금을 마지막까지 기부해왔다.

 고인은 또 2011년 반값등록금 촉구 집회에 나갔다가 집시법 위반으로 약식기소돼 대학생들이 1인당 15만~5백만원의 벌금고지서를 받고 힘들나다는 기사를 보고는 <한겨레>에 벌금총액인 1억3천만원을 기부해 벌금을 대납하게 했다. 이 사실도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않을 것을 전제로 해 당시 ‘조계종 소속의 한 스님의 기부’로만 알려졌다.


  불교계 대표적인 연구기관인 가산불교연구원이 현대 대장경 불사격으로 진행중인 불교대백과사전 <가산불교대사림 22권> 발간작업이 설립자인 전총무원장 지관 스님의 열반 후 위기에 봉착하자 아무도 몰래 연구원 대표를 맡아 수십명의 연구원들을 지원해온 것도 고인이었다. 2013년엔 동국대의 전신인 명진학교 1기 졸업생으로 동국대의 상징적 존재인 만해를 기린 만해마을 200억원대 전자산을 동국대에 기증해 만해의 뜻을 살려나가도록 했다. 갓 출가한 승려들을 교육하는 기본선원을 백담사에 설립해 교육을 한 것도 그였다.

 신흥사보다 사찰 재정이 넉넉한 사찰들에서도 자기 절을 키우거나 과시하는 것 이외 공익적인 지출이 거의 없는데 반해 고인은 불사금을 주머니에 정체시킨바 없이 당대 가장 필요한 곳과 사람들에게 지원해왔다. 


 그는 자신에 대해 “7살에 절머슴으로 들어가 늘어지게 낮잠이나 잤으니 언제 공부나 해봤겠느냐“며 ‘무식한 노승임’을 자처했지만, 실은 어린시절 대장경 원문을 외워 그대로 암송해낼 수 있는 천재적인 기억력의 소유자였다.

 그의 해탈의 정신세계와 파격의 언어, 세심한 내면은 시에 남았다. 그의 시에 대해 원로시인들중엔 “시인들조차 감히 넘 볼 수 없는 독특한 시세계”라고 평가했다.

  그의 시에선 7살 어린 나이에 원치않게 절집에 맡겨진 가엾은 동자승의 ’타는 목마름’과 중생들의 아픔이 그대로 배어있었다. 시조 ‘어미’에는 죽도록 일하다 힘이 떨어지자 미처 젖도 못 뗀 새끼를 두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던 어미소가 당산 길 앞에서 주인을 떠박고 헐레벌떡 뛰어와 새끼에게 젖을 먹여주는 장면이 그려져있다.


 그의 시에선 고통의 암덩어리를 그대로 끌어안고 이를 영롱한 진주로 바꾸는 수도자의 내공이 들어있다.

 ‘한 그루 늙은 나무도 고목소리 들을라면/ 속은 으레껏 썩고 곧은 가지들은 다 부러져야/ 그 물론 굽은 등걸에 장독(杖毒)들도 남아 있어야’<고목소리>.

 무심한 한 덩이 바위도/ 바위 소리 들으려면// 들어도 들어올려도/ 끝내 들리지 않아야// 그 물론 검버섯 같은 것이/  거뭇거뭇 피어나야.<바위 소리 들으려면>>

  그의 시는 마침내 어둠이 빛이 되고, 고통이 자비가 되어 영원한 세계로 나아간다. <사랑의 거리>에서 그는 중생계와 피안계, 우리와 그의 머나먼 거리를 하나로 이었다.

 ‘사랑도 사랑 나름이지/ 정녕 사랑을 한다면// 연연한 여울목에/ 돌다리 하나는 놓아야// 그 물론 만나는 거리도/ 이승 저승쯤 되어야’


 권영민 서울대명예교수는 2005년 ‘세계평화시인대회’ 만찬장에서 오현 스님이 예정이 없이 즉흥적으로 발표한 일화를 소개한 바 있다.

 ‘삶의 즐거움을 모르는 놈이/죽음의 즐거움을 알겠느냐//어차피 한 마리/기는 벌레가 아니더냐//이다음 숲에서 사는/새의 먹이로 가야겠다.’

 <적멸을 위하여>란 시조다. 당시 이 시조를 들은 노벨문학상 수상자 월레 소잉카 시인은 “이 시 하나에 ‘평화’라는 우리의 주제가 다 압축되어 있다”면서 “대단한 인물”이라고 경탄했다고 한다.


손잡고오르는집.jpg» 서울 정릉 흥천사 조실채의 편액. 조오현 스님이 이름을 붙이고, 신영복 선생이 글씨를 썼다


 고인의 시들은 <아득한 성자>, <마음 하나>, <절간 이야기> 등 시집에 담겼으며, 그는 현대시조문학상(1992년), 남명문학상(1995년), 가람문학상(1996년), 한국문학상(2005년), 정지용문학상(2007년), 공초문학상(2008년)등을 수상했다.

 그가 서울에 올라오면 가끔 머물던 서울 정릉 흥천사 조실채엔 ‘손 잡고 오르는 집’이라고 신영복 선생의 글씨로 쓰인 편액이 걸려있다. 고인이 붙인 이름이다. 그의 정신 세계는 일찌기 중생의 관념과 애증의 골짜기를 뛰어올라 창공을 비상했지만, 그는 늘 그 골짜기로 내려와 구부러진 허리를 한채 고통중생들과 언덕을 함께 올랐다.


  영결식은 오는 30일 오전 10시 원로회의장으로 설악산 신흥사에서 엄수되며, 이어 금강산 건봉사 연화대에서 다비식이 봉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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