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공부 융합 씨앗 뿌려, ‘신세대 농부’ 움 틔운다
충남 홍성군 오미마을 젊은협업농장
» 함께하면 농사일도 즐겁게 할 수 있다고 한다. 더구나 같은 또래들끼리 하면 더욱 그런다는 젊은협동조합 청년들. 정민철 농장 대표(윗줄 오른쪽에서 두번째)와 농촌경제연구원 김정섭 연구위원(윗줄 오른쪽에서 세번째)와 농장 식구들이 체험활동을 온 학생들과 함께 했다.
청년 10여명과 견학생들 어울려
4천평 빌려 쌈채소 비닐하우스 8동
아침 6시 일 시작해 오후 4시 마치고
강의실에 모여 다양한 강좌
유기농·마을만들기·철학·여행 등
농업전문대 선생이던 정민철 대표
농사는 현장이라는 생각으로 설립
수십명 한달에서 1년 넘게 머물며
공감하고, 상처 치유 새 삶 모색
농사일과 마을살이 익히면 독립
인근 갓골은 활기찬 문화지대
도서관도 있고 협동조합 30여개
» 매일 오후4시면 손을 털고 강좌를 듣는 청년들.
충남 홍성군 장곡면 도산리 2구 오미마을엔 여느 농촌과는 달리 온통 청년들뿐이다. 8동의 비닐하우스에서는 젊은협업농장 청년들 10명과 견학 온 학생들도 상추만큼이나 푸릇푸릇하다. 비닐하우스 속에서 어울려 일하는 청년들의 얼굴엔 찌든 기색이 없다. 친구들과 이 얘기 저 얘기 주고받고 농담하며 웃다 보면 언제 시간이 가는 줄 모른다고 한다. 옛 어른들이 왜 공동 노동조직인 두레를 만들고, 품앗이를 해서 ‘함께’ 일을 했는지 알 만하다.
이들은 마을에서 각자 기거하면서 아침 6시면 이곳에 와 일을 시작한다. 아침은 건너뛰거나 간식으로 때우고 일하다 낮 12시에 공동 식사를 한다. 다시 1시에 일을 재개하고 오후 4시가 되면 일을 마친다. 오후 4시면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다. 마을 어르신들은 젊디나 젊은 것들이 ‘바짝 조여서’ 수확을 더 하지 않고 일찍 손을 턴다고 못마땅해한다.
“그렇게 벌어 어떻게 사나” 눈치도
그도 그럴 것이 젊은협업농장 4천평은 모두 이 마을 임응철 이장이 빌려준 것이다. 열명이 농사를 지어 쌈채소를 팔아 얻은 소득이 1억2천만원 정도다. 거기다 농촌 체험 프로그램 등 교육을 맡아 올린 수입 등을 다 합쳐도 연 소득은 1억4천만~1억5천만원에 불과하다. 점심값에 드는 연 2천만원에 임대료·운영비를 빼고 나면 1년 미만의 인턴들은 월 50만원, 1년이 넘은 고참들은 월 100만원을 가져간다. 그러니 마을 어르신들은 “그렇게 벌어 어떻게 살 수 있겠느냐”며 “돈도 벌고 땅도 사려면 밤을 새워서라도 일을 해야 할 것 아니냐”고 채근한다.
그러나 이곳 청년들은 오후 4시가 되면 어김없이 손을 씻고 강의실에 모인다. 강좌는 유기농업이나 마을 만들기 강좌뿐 아니라 글쓰기, 철학, 예술, 여행 강좌까지 다양하다. 홍성 일대는 귀촌자들이 많아 특별히 외부에서 돈 들여 모시지 않아도 될 만큼 강사 인력이 풍부하다.
2012년 이 농장을 설립한 정민철 대표는 홍성군 홍동면에 있는 풀무학교의 전공부 교사였다. 전공부는 전문적인 농부를 길러내는 2년제 전문대학이다. 그런데 전공부 졸업생들이 실제 농사를 지으러 마을에 들어가면 잘 적응하지 못했다. 그래서 농사는 학교가 아니라 현장, 즉 마을 안에 들어가서 배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설립한 게 젊은협업농장이다. 따라서 농장이긴 하지만 교육을 목표로 한다. 어느 정도 농사일과 마을살이를 익히면 이곳을 떠나 독립해 마을 속에서 살아가도록 하는 교육농장인 셈이다.
“돈벌이 외에 다양한 욕구 충족돼야”
정 대표는 ‘젊은이들이 농촌에 온다고 농사일만 하라는 법은 없다’고 생각한다. 교사 출신인 자신이 교육과 농업을 결합했듯이 ‘아이티’(IT) 업계에 종사했으면 아이티와 농업을 연계하고, 염색을 한 사람은 염색 작물을 키우고, 장사에 소질이 있으면 농업과 경영을 결합한 융합 지점을 찾아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곳 청년들이 일만 하지 않고 주경야독을 하는 것은 ‘새로운 농부’의 길을 찾아가기 위함이다. 이 농장에서 한 푼도 받아 가지 않으면서 이런 독특한 실험을 하는 정 대표야말로 새로운 인간형이 아닐 수 없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김정섭(48) 연구위원은 오랫동안 홍성 일대 농업을 연구해오다 안식월을 맞아 3개월째 이 농장에 머물고 있다. 그는 “돈만 벌 수 있으면 젊은이들이 농촌에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며 “청년들에겐 돈벌이 외에도 문화와 교육과 의료 등 삶의 다양한 욕구가 충족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이곳처럼 청년들이 농사와 마을을 배우며 농촌 문화를 창출해갈 새로운 농민을 길러내는 일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농장에서 멀지 않은 풀무농고와 전공부가 있는 홍동면 갓골은 농촌지역에서는 보기 어려운 문화지대다. 풀무농고 설립자인 이찬갑 선생의 호를 딴 밝맑도서관이 있고, 마을활력소도 있다. 또한 흙건축얼렁뚱땅조합을 비롯해 만홧가게, 술집 등 협동조합만 30여개가 활동하고 있다. 면 단위임에도 의료생협에 의사까지 있다. 풀무농고 출신으로 이 농장 시작 때 합류한 정영환(36) 스태프는 집에서 따로 농사를 짓는 부인과 5살, 8살 아이와 부모님과 귀농해 함께 살고 있다. 그는 “농촌 현실이 어렵고, 농장에서 청년들이 모두 나가 2주 동안 혼자 일한 적도 있을 만큼 녹록지 않지만, 협업농장도 농촌도 떠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또 그는 “시골이지만 교육과 문화를 누리며 아이를 키우기 좋은 이곳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 젊은협동농장 정영환 스태프가 홍성군 홍농 문당리 이장이나 정농회 회장인 주형로 선생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갓골에서 지역활동의 촉매 구실을 하는 밝맑도서관(왼쪽)과 마을활력소
“공부만 하면 도깨비, 일만 하면 짐승”
지금까지 이 농장에서 한달 이상 머문 청년들은 모두 35명이었다. 1년 이상 머문 이도 16명이었다. 이들은 이곳에서 앞으로 살아갈 길을 고민하면서 주경야독한 뒤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났다. 이곳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처받고 찌든 청년들이 땀을 흘리기도 하지만 또래들과 대화하고 공감하며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쉼터이기도 하다.
이아무개(35)씨는 영업실적 때문에 스트레스에 힘들어하다가 회사를 그만두고 지난해 12월 이곳에 왔다. 그는 “사람에게 치여 점점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도 않았는데 이곳에서 같이 일하니 힘도 덜 들고 재미가 있다”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박아무개(25)씨는 대학 졸업 뒤 6개월간 방황하다가 취업을 포기하고 같은 때 이곳에 왔다. 그는 “학교만 다니며 머리만 쓰고 살던 것과 180도 다른 삶이지만, 좀 덜 벌더라도 덜 치이는 시골에서 살고 싶은 생각이 많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유아무개(15)군은 홈스쿨로 중학까지 마쳤는데, 사람이 두려워 고교 진학을 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남들과 함께 지내보면 어떠냐’는 주위의 권유로 이곳에 온 그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함께 어울리다 보니 학교도 갈 수 있을 것 같고, 친구가 필요한 것도 알았다”며 “학교를 마친 뒤엔 농촌에서 살아보고 싶다”고 말했다.
함석헌의 스승 유영모는 ‘공부만 하면 도깨비가 되고, 일만 하면 짐승이 된다’고 ‘일학병진’을 권했다. 일하고 공부하면서 청년들이 치유되고 깨어나고 있다. 이렇게 전에 보기 어려웠던 ‘새로운 농부’들이 자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