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에 유배간 추사를 찾아 위로하러 갔다가 초막을 짓고 살았던 초의. 둘을 형상화한 인형으로 제주 추사 유배지에 전시돼 있다
구멍이 숭숭 뚫린 제주의 담벼락을 보며 빈틈의 유용함을 생각한다. 틈이 용납하지 않으면 균열이 되고 말리라. 완벽하게 쌓아올린 가치와 빼곡이 채운 시간들이 어느 순간 자신을 옥죄어 작은 바람에도 견디지 못하고 흔들리게 되고 말리라.
바람길을 만들어 줘야
들숨날숨 드나들고
생각도
마음도
인연도
사람도 자유롭게 노니는 집이 되리라.
은정 씨는 책과 술과 차와 사람을 좋아한다. 수수한 은정 씨는 소박한 일상을 사랑하고 즐기는 사람이다. 출가수행자인 나를 친한 ‘동네 오빠’라고 생각한다. 내 기분이 아니 좋을 수 없다. 그는 근자에 ‘서투른 희망보다 여유로운 직시’라고 카톡의 문패를 달았다. 사유와 성찰의 인문학적 내공이 느껴진다. 그런 은정 씨가 제주를 여행하고 일지암 밴드에 위와 같은 소감을 남겼다. 이 글을 대하면서 홀연 추사가 떠올랐다. 그리고 8년 동안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한 추사를 찾아 함께 머문 초의와 소치가 자연스레 연상되었다. 이 연상은 단순히 제주라는 지역의 연고성만은 아니다. ‘틈을 용납하는 빈틈의 유용함’이, 바로 추사와 초의 선사에게 해당하기 때문일 것이다.
초의와 추사의 금란지교는 익히 알려졌다. 그런데 우리는 단순히 학문과 차를 나눈 교유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더 깊이 그들 교유의 행간을 들여다보면 빈틈 사이로 그들의 바람길과 들숨날숨을 만날 수 있다. 그 빈틈 사이로 그 둘의 생각도 마음도 인연도 자유롭게 오고갔던 것이다.
그들 사이의 빈틈은 무엇일까? 바로 그 어느 것도 감출 수 없는, 감출 일 없는 믿음과 사랑이다. 그들은 자연스레 서로가 서로에게 무장을 해제했다. 그들 사이는 권력과 명예를 다툴 일이 애초에 있지 않았다. 지식을 자랑하고 애써 자신을 포장할 필요가 없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진솔했기에 자신들의 인간적인 한계와 다른 이에게 하소연할 수 없는 속내를 드러내었다. 그런 빈틈의 들숨과 날숨을 지금 우리는 추사가 초의에게 보낸 편지에게 읽을 수 있다. 또 하나 그들의 우정이 놀라운 것은, 불교를 억압하는 유교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신분과 사상의 경계를 뛰어넘은 그들의 우정과 교유가 새삼스럽다.
추사는 불교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불교세계에 깊이 심취한 사람이다. 그는 젊은 나이에 학림암의 해붕대사와 불교철학의 진수인 공(空)사상에 대해 토론할 정도였다. 제주도 유배의 여정에서 일지암에 묵은 그는 달마대사의 <관심론>과 <혈맥론>에 대해 초의와 견해를 주고 받았다. 또 제주에서 초의에게 보낸 편지에는 <법원주림>과 <종경록>에 대해 토론해 보고 싶다고 했다. 이들 전적은 선사상을 논한 글들이다. 경전에 대한 깊은 천착 없이는 읽을 수 없는 사상서이다. 또 추사는 백파 선사의 <선문수경>에 대해 이른바 ‘망증 15조’를 공개적으로 던지며 논쟁했다. 추사의 불교인연은 집안의 내력이기도 하다. 그의 증조부 김한신은 예산에 화암사를 창건했다. 또 <가야산 해인사 중건 상량문>을 쓰기도 했고, 여러 스님들의 화상에 찬을 하기도 했다. 200개가 넘는 호중에서 불교적 이름도 많다. 병거사(病士), 정선(靜禪), 불노(佛老), 단파(檀波)가 그것이다. 단파는 범어 ‘단나바라밀’을 음차한 이름이다. 보시의 뜻이다. 추사는 생애 마지막을 서울 봉은사에서 지냈으며 불교에 귀의하는 수계를 받기도 했다. 이는 상유현의 기록에 있다.
» 초의와 추사가 함께 차를 마신 전남 해남 대흥사 일지암
당대의 금석학자요 고증학의 대가인 추사, 중국의 서예가들조차 혀를 내두른 탁월한 글씨, 그런 시대의 천재 추사가 단 한사람 초의에게는 그저 어린아이였고 응석받이였던 것이다. 늘 엄정하고 완벽주의자에 가까운 그도 숨 쉴 공간이 필요했던 것일까? 초의에게 보낸 편지에는 늘 장난이 가득하다. 초의가 보낸 편지와 차를 받고서 차가 맛있는 까닭은 오직 차에게 있지 스님과 스님의 편지에 있지 않다고 너스레를 친다. 산중에서 뭐 그리 바쁜 일이 있다고 편지 한 장 없느냐고 그리움을 은근히 내비친다. 나아가 스님을 보고 싶어 눈병이 날 지경이라고 솔직하게 속내를 털어놓는다. 두어해 묵은 차를 이번에는 보내지 않으면 고함소리와 몽둥이를 피할 길이 없다고 협박한다. 초의와 추사의 사이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묻는다. “나에게 이런 사람이 있는가?” 그런 추사가 그리워 초의는 그의 사후 2년 후에 비통한 제문을 올린다.
“슬프다. 선생이시여, 42년의 깊은 우정을 잊지 말고 저 세상에서는 오랫동안 인연을 맺읍시다. 생전에는 자주 만나지 못했지만, 도에 대해 담론할 때면 그대는 마치 폭우나 우레처럼 당당했고, 정담을 나눌 때면 그대는 실로 봄바람과 같고 따스한 햇살과도 같았지요.
손수 달인 차를 함께 나누며, 슬픈 소식을 들으면 그대는 눈물을 뿌려 옷깃을 적시곤 했지요. 생전에 말하던 그대 모습 지금도 거울처럼 또렷하여 그대 잃은 슬픔 이루 헤아릴 수 없나이다“ <완당 김공 제문>, 번역/유홍준
초의와 추사의 찻자리, 그 빈틈 사이에 꽃이 피고 물이 흐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