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베를린에서 이레 동안 침묵하며 참선할 기회가 있었는데, 아침 예불의 타종을 맡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절에 있는 그런 큰 범종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높이 60 센티 정도는 되는 꽤 괜찮은 한국종이 아담하게 나무틀에 매달려 있습니다. 나무망치로 치는데, 종과 닿는 부분엔 날카로운 소리를 피하기 위해 펠트를 붙여 놓았습니다. 그런데도 가끔은 찢어지는 듯한 쇳소리가 났습니다. 종 하단의 동그란 무늬가 있는 곳에 마음을 모아 치는데도, 시종 부드러운 울림을 끌어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불쾌한 소리가 나는 것은 내가 종을 잘 몰라서 그런 것이니 종을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어디를 어떤 강도와 각도로 치면 될까 다양한 시도를 하던 어느 날 아침, 이 종에 내재하는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끌어내기 위해 온 정성을 기울이는 나는, 종과 지극한 사랑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문득, 내 남편이 가지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끌어내기 위해 내가 이만큼의 정성을 들였던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느 때 부터인가 나는 그를 잘 알고 있다는 생각으로 더이상 정성도 안들이고, 그의 ‘쇳소리’를 그의 탓으로만 돌린 것은 아니었던가? 그에게 내재하는 그만의 아름다운 소리가 있다는 것을 잊어버렸거나 포기한 것은 아닌가? 결국 부족한 건 나의 사랑이 아닌가?
우리 딸은? 그 애가 가진 아름다운 소리라는 것이 이러저러한 것일거라는 내 생각에 집착해서, 진정 그애의 아름다운 소리가 뭣인지는 알려고도 않는 것은 아닌가? 어쩌다 울림이 미미하다고 다구치지는 않았던가? 이런 생각이 들자 커다란 바람에 파도가 이는 듯 온 몸과 마음이 일렁이기 시작했습니다. 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것들, 떠다니던 것들이 파도에 쓸려서 해변으로 내동댕이 쳐지듯 그렇게 제 모습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스스로의 모습을 보는 건 참 아픕니다.
어느 시인은, 네가 내 이름을 불러줄 때 나는 네게 꽃이 된다고 했습니다.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그 존재를 알아준다는 뜻일테고, 꽃이 된다는 것은 그 존재의 최상의 모습이 드러난다는 말이겠지요. 종은 울려줄 때에 비로소 소리를 냅니다. 아무도 울려주지 않는 종은 그저 쇳덩어리일 뿐입니다. 그런데 종에게는 아름답고 은은한 소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갖은 소리가 다 내재해 있습니다.
이런 소리, 저런 소리를 내어보며, 그가 가진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울려내겠다는 마음으로 계속 탐구해가는 것이 바로 사랑인 것 같습니다. 나 자신을 향해서도 마찬가지가 아닌지요. 예쁜 소리를 못낸다고 나무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끌어내려고 탐구하고 정성을 들이는 사람이 바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