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진만이 길이 아니다/굽이굽이 휘돌지 않는 강물이 어찌/노래하는 여울에 이를 수 있는가/부를 수 있겠는가' -박남준의 <마음의 북극성>
요즘은 세간의 벗들이 오면 마당 아래 숲속 도서관에서 차를 나눈다. 일지암 다실은 자우홍련사 마루에 앉아 건너편 초당을 바라보며 펼친 찻자리가 일품이다. 그런데 일품의 찻자리는 굳이 어느 곳 하나만이 아닐 듯 하다. 한 생각 밝으면 소소한 모든 존재가 그대로 부처님 모습이요 처처가 극락세계가 아닐 수 없다. 찻자리 또한 마주하는 사람이 좋으면 그 자리가 명품이다. 숲속 도서관 다실의 묘미는 차경(借景)에 있다. 이 곳은 사방의 풍광을 품어 앉는다. 창을 연다. 옆으로는 도솔봉과 나란히 하고, 앞으로는 혈망봉과 눈을 맞춘다. 어렴풋이 멀리에 해창 바다가 호수와 같은 수면을 조금 비춰준다. 와! 눈물난다, 라고 감탄한다. 서로를 품어 안으니 서로가 서로를 빛내주는 존재가 된다.
세간의 벗들이 차 한잔을 청한다. 도서관 다실에서는 직사각형의 판목 차탁을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천연 염료로 물들인 차포에 다기를 올려 놓는다. 6개의 차포가 있다. 많은 사람들과 차담을 나눌 때 유용하다. 대략 5명이 둥그런 차포에 앉아 차를 마신다. 멋을 아는 이들은 산중에 있는 여러 나뭇가지와 풀잎과 꽃잎으로 다기와 함께 찻자리를 꾸민다. 그 애들이 옹기종기 어울려 있으니 참 이쁘다. 저마다 잘난 체 하지 않고 알맞게 놓여 있을 때 절로 어울림이 되나 보다.
절집과 더불어 거의 모든 다실의 차탁은 직사각형이다. 반듯한 직선이다. 직선은 애초부터 굽이 돌고, 감아 돌고, 한 눈 팔며 천천히 걸을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타고 났다. 직선의 생리는 구분 짓는 일에 능숙하다. 서로가 정면으로 대면하고 대결한다. 그래서인가, 벗들과 직선의 차탁에서 차를 마시면 서로가 다소 긴장한다. 이러한 대면이 어색하다. 절로 형성되는 진지함이 조금은 불편하다. 직선의 찻자리가 그렇다.
» 전남 해남 사하촌에서 농사일을 도우며 감자를 캐는 법인 스님
반면, 둥그런 차포는 곡선의 찻자리를 만든다. 곡선은 서로의 시선과 기운이 어깨동무할 수 있어 좋다. 둥그렇게 모여 앉으니 주인과 손님의 경계가 없다. 곡선은 금 긋지 않는다. 저마다의 자리에서 오직 한 점이다. 그 한 점 한 점이 곁을 내주며 어우러질 뿐이다. 경험으로 말하자면, 둥근 차포에 펼친 곡선 찻자리는 처음부터 사람들이 긴장하지 않는다. 처음 차를 마시는 사람들도 편안하다고 한다. 곡선의 찻자리는 사람과 사람을 금 긋지 않는다. 금 긋지 않으니 평등하다. 평등하니 절로 편안한가 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결코 편안할 수 없는 자리가 있다. 높으신 분이 오시면 직원들이 직선으로 도열하여 맞이한다. 높으신 분은 그 사이를 직진한다. 쓸쓸하고 슬픈 풍경이다. 직진만이 길이 아니라는데, 굽이굽이 휘도는 강물이 노래하는 여울에 이를 수 있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