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블로 피카스가 그린 그림 <한국에서의 학살>
새삼 존재의 이유를 묻습니다
고오타마 싯다르타는 29세에 출가하여 6년의 수행 끝에 마침내 큰 깨달음을 얻어 모든 고뇌에서 벗어나 해탈을 성취했다. 석가모니는 인생의 고통이 무지와 욕탐이라고 진단했다. 그래서 평화로운 세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무지를 지혜로, 욕탐을 자애로 전환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인간의 무지는 단순히 정보와 지식의 빈곤이 아니다. 모든 생명이 서로 의지하고 도와가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연결된 존재라는 투철한 통찰과 인식이 결여된 상태라고 했다. 그런 무지의 맥락에서 살생과 전쟁은 욕탐의 최고 절정이다. 석가모니는 어느 한 개체에 대한 폭력과 죽임을 엄금했지만 전쟁의 행위 또한 전면 부정했다. 나쁜 평화라는 말이 형용 모순이듯이 좋은 전쟁이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깨달음을 성취하고 부처님은 고향으로 돌아와 해탈과 평화의 길을 사람들에게 전했다. 어느 날 고향 마을에서 사건이 발생했다. 극심한 가뭄이 계속되자 윗마을과 아랫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다툼이 일어났다. 서로 자기 마을 논에 물을 끌어들이려고 언쟁이 일어났고 큰 몸싸움이 번질 상황이었다. 이런 소식을 듣고 부처님은 현장을 찾았다. 자초지종을 들은 부처님은 마을 사람들에게 물었다.
» 한국전쟁 당시 학살된 민간인들
“그대들은 어찌 생각하는가요? 물이 더 소중한가요, 사람들의 생명이 더 소중한가요?”
이 세상 모든 존재는, 존재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꽃은 그 모습 그대로 기쁨을 준다. 물은 목마름을 해소하고 뭇 생명을 자라게 한다. 해와 달은 서로를 해치지 않고 존재하기에 모든 만물이 음양의 조화로 어울려 살아가는 존재의 이유가 된다. “이것을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저것을 말미암아 이것이 있다” 어떤 존재가 생성하고 생장하는 인연의 이치가 이러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부처님은 존재의 ‘본래 없음’을 통찰했다. 이를 ‘공(空)’이라고 한다. 쉽게 말하자면 모든 존재는 여러 조건이 결합하면 발생하고, 만들고자 하는 의도와 조건이 없으면 발생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모든 존재가 본래부터 고정/불변/영속적이지 않고 관계와 변화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자. 형태와 이름을 부여받은 세상 만물 중에서 굳이 존재할 이유가 없고, 지금 존재하고 있더라도 영속적으로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는, 존재도 있을 것이다. 현실 세계에서 그런 존재는 무엇이 있을까?
“지금 나의 생각은 어떻게 해서 나의 생각이 되었을까?” 하는 물음이 있다. 처음부터 유전인자와 같이 있었던 생각일까. 당연한 생각이고 의심의 여지가 없는 생각일까. 그 어떤 생각은 결코 변할 수 없고, 변해서도 안 되고, 영원히 존재해야 하는 생각일까.
‘군대’라는 존재, 군대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을 생각해 본다. 군대는 어떤 연유로 만들어졌고, 지금 존재의 의미는 무엇이고, 항구적으로 마땅히 존재해야 하는가? 그리고 군대가 굳이 존재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꿈꿀 수는 없는 것일까? 군대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은 바꿀 수 없는 생각일까?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하여 전쟁은 때로는 불가피하고 군대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차선/차악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말한다. 이해관계가 이리저리 얽힌 현실에서 부정할 수만은 없는 생각이고 마냥 매도할 수 없는 발언이다. 그러나 그런 현실에 발 딛고 있으면서도 다른 쪽으로 생각의 발을 옮겨봐야 하지 않을까. 그 발걸음은 질문에서 시작할 것이다. 군대! 그 존재의 이유가 무엇인가? 영원히 존재해야 하는가?
반전평화주의자 묵자의 말을 옮겨본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복숭아를 훔치는 것보다 죄가 더 무겁다. (그래서) 한 사람을 죽이면 그것을 불의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 크게 나라를 공격하면 그 그릇됨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칭송하면서 의로움이라고 한다. 이러고서도 의와 불의의 분별을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 『묵자』 「소염」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