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인권운동가의 평화와 인권은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는데, 많이 힘들고 지쳐 보였다. 평화와 인권운동을 오랫동안 했던 친구다. 가족, 일하는 관계, 친구관계, 어느 하나 평화와 먼 상태였다. 간혹 힘들어 보인다고 염려하면, 애써 부인하고 더 열정을 보이던 친구였는데, 이제 ‘자기현실’을 마냥 외면하고 부정할 수 없었다. “너는 평화와 인권 감수성은 큰데, 마주해야 하는 일상은 늘 갈등과 싸움 현장이니 내면은 더 힘들지 않겠냐”고 했더니, 눈물을 쏟았다. ‘평화운동’의 눈물이 아니라, 운동으로 고단해진 ‘자기현실’을 바라보는 눈물이었다.
누구보다 평화와 인권문제에 예민한 친구라 그냥 넘어갈 일도 늘 그 친구 눈에는 거슬렸고, 가만히 있지 못했다. 연약한 이들이 억울한 아픔을 겪는 신문기사를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던 친구다. 불의가 만들어 내는 복잡한 갈등 실상을 냉철하게 읽어내고 몸을 던지던 친구인데, 정작 자기 삶의 일상에서는 평화를 누리지 못했던 거다. 운동을 위해 절에도 가고 교회도 가지만, 운동을 돕고 지원해주는 고마운 승려와 목사, 신부들이 많지만, 그의 내면, 그의 파괴된 일상에 관심을 갖지는 않았다고 한다.
소위 평화운동 전문가인 그 친구에게서 사람들은 평화운동 얘기를 들으려 하지, 그것을 일상으로 사는 이의 내면은 오히려 더 깊은 갈등 속에 있을 수 있다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평화와 인권 감수성이 큰 이들은 불의와 소외가 더 예민하게 보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자주 갈등과 위기 상황에 놓이게 된다. 운동현장에서 만난 많은 이들이 그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졸업 후, 도시빈민운동에 투신했던 후배가 10년 후 우연히 만난 지하철에서, 그 쪽 일은 말도 꺼내지 말라며 병들고 지쳐있던 모습도 떠올랐다.
» 밝은누리공동체 마을밥상에서 함께 식사를 하는 공동체 사람들.
<밝은누리>에도 평화와 인권운동을 하는 친구들이 많이 있었고, 지금도 있다. 이들은 거의 예외 없이 내면이 다른 이들보다 더 큰 갈등 상황에 놓여있었다. 다루는 관념과 운동 의제는 평화와 인권이지만, 일상은 늘 투쟁이기에 그 간극이 만들어 내는 내면의 위기는 스스로도 감지하기 어렵게 깊어진다. <밝은누리>는 그 친구들이 우리 안에서 그런 말과 운동을 반복하지 않고 쉬도록 돕는다. 이들이 애써 억누르고 외면하는 ‘갈등에 빠진 자기내면’을 바라보게 돕는다. 침묵과 쉼이 지속가능한 운동의 토대가 된다. 성찰 없는 운동은 위험하다.
놀라운 사실은, 평화와 인권을 위하지만, 정작 현실은 늘 싸움이다 보니, 싸움 없는 평화로운 일상을 오히려 불안해하기도 한다. 정작 관계 속에서 평화로운 일상을 살아갈 감수성, 평화롭게 관계 맺을 지혜를 몸이 잃어버린 거다. 평화운동 현장에 함께 하는 것 뿐 아니라, 이들이 겪는 내면의 어려움에도 함께 하는 게 필요하다. 먹고 입고 자고 일하고 노는 더불어 사는 일상생활 속에서 서로 평화를 누리고 증언할 수 있을 때, 생명평화는 더욱 든든히 세워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