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의 한 노승이 한국인 불자들을 울렸다. 삼동린포체(79)가 나란다불교학술원 주최로 지난 12~16일 4박5일간 경북 경주 보문단지 황룡원에서 연 보리도차제실참대법회에서였다. ‘보리도차제’란 달라이라마가 속한 겔룩파의 개조인 총카파(1357 ~ 1419)가 ‘깨달음의 단계’에 대해 저술한 것으로, 삼동린포체는 총카파가 깨달음을 얻은 뒤 지은 ‘약송게’(깨달음의 노래)를 교재로 설법했다.
삼동린포체는 티베트가 중국의 침공으로 나라를 잃자 1951년 12세때 달라이라마와 함께 인도로 망명했다. 그는 인도 히말라야 다람살라에 있는 티베트망명정부에서 1991년부터 국회의장을 지내고, 2001년부터 10년간 선출직 총리를 지냈다. 그는 최고의 불교학자이면서도 티베트망명정부를 이끌면서 삼권분립을 이뤄내는등 이판사판(수행과 행정)를 겸비한 고승으로 꼽힌다. 티베트 카규파의 수장인 카르마파는 “삼동린포체는 달라이라마가 의지하는 유일한 존재임에 두말 할 나위가 없다”고 말할만큼 달라이라마의 절대적 신임과 티베트불자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두 차례 방한한 적이 있지만 직접 강의프로그램을 운영하기는 처음이다. 고령인데다 법회 스케줄상 시간을 내기 어려운 그가 이런 가르침의 기회를 해외에서 갖는 것은 드문일이다. 그런데 달라이라마의 통역자였던 박은정 나란다불교학술원장이 여러차례 편지를 보내 한국불자들에게 직접 가르침을 청해줄 것을 요청함에 따라 12~20일 방한했다.
숙식을 하면서 진행된 법회엔 30여명의 승려를 비롯한 140여명의 불자들이 참여했다. 승려들과 불자들 모두 어지간한 불교수행들은 섭렵해본 참석자들은 오전 오후 2차례 법문에 집중했다. 삼동린포체는 여느 고승들과 달리 농담도 웃음기도 없었다. 철저히 오후불식(정오 이후엔 일체의 곡기를 먹지않음)과 계율을 철저히 지키면서도 개인적으로 아무것도 지니지않은 무소유적 삶을 살아온 이의 엄정함 그대로였다.
“인간의 몸은 여의주보다 뛰어나다. 여의주에 빌면 만사가 뜻대로 된다고 하지만, 여의주가 삼악도(지옥·아귀·축생)에 떨어지지않고 해탈을 이루고 붓다게 되게 할 수는 없지만, 인간의 몸은 이게 가능하다.”
그의 냉엄함이 더해져 법문은 심층으로 파고들었다. 그의 설법은 곧 이타심을 격발시키는데 집중됐다.
“보살은 중생이 고통에 시달리는 것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이를 해결하겠다는 책임의식을 가지고 이타행(타인을 돕는 행동)을 한다.”
그는 “이타를 목적으로 하지않고 특별한 경지를 달성하려는 생각으로 부처를 이루고자하는 마음은 보리심이 아니다”며 “중생을 도울 완전한 역량을 갖추기 위해 그 수단으로 성불이 필요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삼동린포체는 또 용수보살의 자타상환법(自他相換法)과 무착보살의 칠종인과법(七種因果法)을 세세히 설명하며 타인에 대한 이타행을 불러일으켰다. ‘자타상환법’은 나와 남을 바꿔보는 것이다. ‘칠종인과법’은 수많은 생을 윤회하는 동안 모든 중생이 전생에 한 번 이상은 나의 어머니였던 적이 있음을 생각해 자비심을 발하는 것이다.
4박5일의 법문이 끝나자 환희심이 젖은 대중들은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언제 이런 법(진리)를 또 들을 수 있겠느냐”며 “부디 내년에도 다시 와 법문을 해달라”며 눈물로 청했다. 그러자 린포체는 엷은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 법회기간 중 오후 삼동린포체의 법문이 끝난 뒤에는 라다크불교대학의 콘촉 왕두 총장이 불자들의 질문에 상세히 답했다. 오른쪽은 이를 통역하고있는 박은정 나란다불교학술원 원장
다음은 17일 <한겨레>와 단독 인터뷰의 일문일답이다.
-티베트불교에서 강조하는 ‘공성(空性·자성이 없는 빈성품)’을 터득하면 자비심이 저절로 생기는것인가. 아니면 자비심을 따로 발해야하는 것인가.
=공성을 깨달았다고 반드시 대승의 자비심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연민의 마음을 일으키는 보살이 공성을 깨달으면 자비심이 강화될 수 있다. 그러나 인과관계는 아니다. 그렇기에 자비심을 계발하기 위해서 노력할 필요가 있다.
-한국불교는 견성성불 즉 깨달음을 얻으면 즉각 붓다가 된다면서도 계행을 중요하게 여기지않아 언행일치가 되지않은 경우가 있어 비판을 산다.
=인도 나란다대학으로부터 이어져온 법통에서는 견성성불이라는 말이 있는데 견성, 즉 마음을 보는데엔 두가지가 있다. 속제(俗諦)는 마음을 비추는 성품을 보는 것이다. 즉 불이 있다면 ‘불로인한 뜨거움’을 보는 것이다. 진제(眞諦)는 불도 본질적으로는 ‘비어있음’(실체가 없음)을 보는 것이다. 나란다전통에선 ‘성품을 보는 것’(견성)에 그치지않고 성품을 보는 ‘견도’(見道)에 이어 닦는 ‘수도’(修道)를 하고, 번뇌의 소지장(所知障)까지 다 제거해야 성불에 이른다고 한다. 부처님은 견성성불을 하고도 계행에 어긋남이 없었다. 그 어떤 경전에서도 견성 후 막행해도 좋다는 구절은 없다.
-한국인들이 가정과 학교, 직장 등에서 상처를 받아 인간관계를 힘들어하고 공동체성이 사라지고 홀로 살려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한국 뿐만이 아니라 물질을 추구하는 모든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발생하는 문제다. 어릴 때부터 함께 공존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경쟁하는 것을 가르쳐서다. ‘옆집 아이는 5살인데도 글을 읽는데 왜 우리집 아이는 왜 못읽지. 우리 아이도 어서 시켜야지’하고 부모가 성급해지면 아이도 위기의식을 느낀다. 서로 기대고 의지하며 함께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을 배우는게 아니라 가정 학교에서부터 경쟁을 시킨다. 인간이 가진 따뜻함을 발하고, 가정과 학교 등 사회 전반에서 각성이 일어나야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
-빈부차이가 심하다. 불교에서는 전생의 공덕과 업의 결과로도 보는데, 요즘은 부자가 탐욕으로 부를 이루고 이를 나누지않아 빈부차이가 더해진다는 비난이 높아간다.
=신이 모든 것을 만들었다는 운명론과 불교의 가르침은 분명히 다르다. 운명을 개선할 여지가 없는가,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불교는 전적으로 후자다. 만약 부자가 빈자나 병자를 도와준다면 전생으로부터 선업은 더욱 확대된다. 그러나 인색하고 나누지않으면 선업은 감소한다. 이처럼 카르마는 확대되기도 하고 줄기도 한다. 카르마를 받는 과정에서 인간의 의지와 선택이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따라서 빈자도 자신의 의지로 부유해질 수 있으며, 부자들도 이들을 돕는 것이 곧 자신을 돕는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