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기 설교자들이 즐겨 쓰던 우화입니다. 수도사가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친구 어머니의 병문안을 가는 길이었습니다. 먼 길을 걷자니 점점 피곤해졌습니다. 정오가 되자 햇볕이 뜨거워 짜증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시장기가 돌았습니다. 도시락을 싸 놓고 깜빡하고 가져오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화가 났고 먼 길을 떠나온 것에 대하여 후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홧김에 발로 길바닥에 있는 돌멩이를 걷어찼습니다. 발가락이 몹시도 아팠습니다. 그는 길에 앉아 중얼거렸습니다. “도대체 이 돌멩이가 하필 왜 여기에 있어서 나를 괴롭힐까?” 그러자 돌멩이가 갑자기 배로 커졌습니다. “이것은 우연히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괴롭히려고 누가 갖다 놓았을 거야.”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돌멩이는 다시 배로 커져 큰 바위가 되었습니다.
“흐음, 이런 바위를 갖다 놓고 나를 괴롭힐 만한 녀석은 바로 그 놈밖에 없어.” 그는 중얼거렸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주변에서 자기와 사이가 나쁜 사람들을 머리에 떠올리며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바위는 몇 배로 더 커져 아예 길에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이 때 그 길을 지나가던 한 소년이 수도사에게 물었습니다. “수도사님, 어디가 편찮으세요? 길바닥에 앉아 무슨 이야기를 혼자 하고 계셔요?” 수도사는 지금까지 생긴 이상한 일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소년은 두리번거리더니 말했습니다. “그런 산더미만한 바위는 보이지 않는데요. 여기에 단지 주먹만한 돌멩이가 하나 있을 뿐인 걸요.” 그리고 소년은 돌멩이를 가볍게 집어 길옆으로 옮겨 놓고 인사를 한 뒤 제 길을 가버렸습니다.
절친한 친구, 다정한 부부 간에도 살다보면 다툴 때가 있습니다. 관계의 충돌이 일어나는 근본적인 이유는 서로를 향한 기대치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기대치가 다르니 나타나는 현상에 대한 반응도 다릅니다. 아무리 좋은 관계도 계속적으로 충돌하다보면 어느 듯 마음에 미움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그 미움은 분노가 되고 분노가 변하여 증오를 낳게 합니다. 겉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이는 관계인데도 가슴속에는 증오를 품고 있는 사는 사람을 봅니다. 그런데 증오의 씨앗인 미움은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스리지 않으면 마음은 쉽게 미움에 감염되고 맙니다.
미움과 분노가 마음속에 생겼을 때 그 미움과 분노가 어디서부터 왔는지 마음을 살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살핀다는 것은 마음 속에 품은 알을 바라본다는 것이고 알아차린다는 것은 마음속에 품고 있는 알을 깨뜨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알 속에 독사가 들었는지 병아리가 들었는지는 알을 깨봐야 알 수 있습니다. 마음에 품고 있는 알이 그 사람의 기대치입니다. 기대치는 그 사람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내가 만든 가공의 것입니다. 관계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그 가공의 기대치로부터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근본적인 가치인 우정, 사랑, 신뢰, 배려, 인정 등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좋은 관계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