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백수청년이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주님 저는 가진 것 없는 백수입니다. 제소원을 들어주신다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겠습니다.” 갸륵한 모습을 보신주님께서 “그래 네 소원을 말해 보아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갑작스런 대답에 놀란 청년이 “그래 취업시험에 합격하려면 머리를 달라고 해야지” 하는데 마음 한구석에서 ‘머리만 좋으면 뭐해 돈이 잇어야지’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맞아 돈을 달래야지’ 그런데 또 한구석에서 ‘머리좋고 돈만 있으면 뭐해 이쁜 여자가 있어야지’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청년이 갈팡질팡하는데 주님이 버럭소리를 질렀습니다. “빨리 말해 짜샤, 기다리는사람들이 줄서 있는거 안보여” 청년은 급한 중에도 한가지도 포기하기 싫어서 급하게 청했습니다. “ 머리 돈 여자 요” 그러자 주님께서 실성한 처녀 아이 하나를 보내주셨다고 합니다.
사람의 마음 안에는 욕구란 것이 있습니다. 생존하기 위한 기본적인 요소인데 간혹 종교인들 중에 사람의 욕구를 불편한 것으로 여기거나 심지어 죄스럽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에 무언가를 청하는 기도는 세속적이라고 비난하기도 하고 ‘욕심을 내려 놓아라 마음을 비워라’ 하는 등등의 주문을 합니다.
문제는 욕구와 욕심을 동일시해서 싸잡아 비난하는 것은 심리적 결핍이 심한 사람들에게는 자칫 신경증적 증상을 유발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본당에서 불우이웃돕기 차원의 기금을 모금한 적이 있습니다. 교우분들에게 집에서 사용하지 않는 물건을 기증하시라고 공지를 했더니, 그후 찾아와서 고민을 털어놓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불우이웃돕기의 취지가 좋아서 집에서 안쓰는 물건들을 모았는데 막상 내놓으려고 하니 아까운 마음이 들더라’면서 그런 자신이 역겹다는 것입니다.
어린시절 찢어지게 가난하게 사신 분들은 가난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에 가진 것을 내놓기기 어렵습니다. 즉 궁핍한 기억을 가진 분들은 가난의 영성을 실천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네딕토 성인은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하는 수도자들은 너무 가난한 집안 사람들은 뽑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럼 이런 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 그런 자신을 비난한 필요가 없고 배고픈 자신의 마음을 채우기 위해 애써야합니다. 채워야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 안에는 크게 세가지의 욕구 영역이 있습니다. 가장 밑바닥의 것은 생리적욕구 영역입니다. 먹고 입고 갖고 싶은 욕구의 영역이지요. 그런 욕구들이 채워지면 그 다음 단계의 욕구가 나타납니다. 정서적 욕구인데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구의 영역입니다. 돈벌고 먹고 살만하면 정치인이 되고싶어하거나 명함에 자기 스팩을 가득 채우고 싶은 것은 정서적 욕구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두가지가 다 채워지고 나면 그래서 시들하고 지루해지면 그 다음 추구하는 것이 영적인 욕구란 것입니다.
이런 심리적 발달론의 관점에서 영적인 영역에 진입한 분들을 들라고 하면 가톨릭의 프란치스코 성인과 불가의 부처님을 들 수가 있습니다. 두분의 공통점은 유복한 집안의 자제로서 모자람 없이 살다가 그런 삶에 식상해서 영적인 단계를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본 바탕없이 그저 그분들의 삶이 좋다고 무작정 따라하다간 가랑이가 찢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너무 궁핍하고 춥고 배고픈 분들은 채우며 사셔야 합니다. ‘왜 나는 비우질 못하지’ 하고 자신을 비난하는 것은 쓸데없는 자학일 뿐입니다. 채우시고 그러다가 마음이 내키시면 그때 나누십시요. 그래도 늦지않습니다.